현대자동차그룹 등 대기업 지배구조개편 시장이 '행동주의'로 포장된 벌처펀드의 먹잇감이 되고 있다. 정부의 '재벌 개혁'이 단순히 속도와 대기업 때리기에 맞춰지면서 '탐욕의 약탈자'로 불리는 벌처펀드가 한국시장에서 '주주 행동주의'(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 따른)라는 명분으로 활개를 칠 무대가 만들어진 것.
마땅한 대응 카드도 없다. 국부유출을 막을 백기사도 더는 찾아보기 힘들 전망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한 국민연금기금운용이 '배임'의 덫에 걸려 곤욕을 치른 것을 본 기관이 선뜻 제 목소리를 낼 여지가 줄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제2, 3의 론스타, 소버린이 무혈 입성할 가능성도 높다.
이 같은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기업들 스스로 개혁의 중심에 서서 지배구조 개편과 주주 친화정책을 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정책 당국은 이들이 보다 효율적으로 지배구조를 개편할 수 있는 틀을 만들고, 연착륙을 유도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엘리엇,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에서 뭘 노리나
'벌쳐펀드'로 불리는 미국계 행동주의 헤지펀드 엘리엇이 햔대차그룹 사냥에 나섰다.
매니지먼트가 현대차그룹의 계열사 3곳에 10억달러(약 1조560억원) 이상 규모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고 4일 밝혔다.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2015년 제일모직의 삼성물산 흡수 합병에 반대했던 헤지펀드다.
엘리엇 어드바이저스는 자료에서 "현대차그룹이 각 계열사의 기업 지배구조(거버넌스)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 재무상태를 어떻게 최적화할 것인지, 자본수익률을 어떻게 높일 것인지 더 상세한 로드맵을 제시, 공유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국내 2위 대기업인 현대차그룹은 지난달 28일 부품 계열사 현대모비스를 지배회사로 만들어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는 지배구조 개편안을 발표했다. 정부와 투자자의 지배구조 개선 요구에 복잡한 순환출자 고리를 끊고 단순한 구조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개편이 완료되면 현대차그룹의 구조는 '정몽구 회장 부자(父子)→현대모비스→현대차 등 각사'로 단순화된다.
엘리엇 측은 현대차그룹이 발표한 지배구조 개편안에 대해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첫 조치를 취했다"고 평가하면서도 "각 회사와 주주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더 많은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엘리엇 측은 "현대차그룹 경영진, 다른 주주들과 직접 이 문제들을 논의하길 바라고 개편안에 관한 제안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블룸버그 등 주요 외신은 중국과 미국 시장에서 판매 둔화로 고전하는 현대차그룹이 엘리엇 측의 경영 간섭으로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일 수 있다고 전했다.
시장에서는 기업의 정상적인 경영활동의 제약과 심각한 국부 유출까지 우려한다. 썩은 시체까지 파먹는 '맹금류(vulture)'에 비유하는 '벌처펀드'인 엘리엇은 아르헨티나 국채를 매입한 뒤 매도공세를 펴면서 아르헨티나를 디폴트 위기까지 몰고 간 것으로도 유명하다. 시장에서는 소버린 판박이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당하고 또 당하고", 韓기업은 투기자본의 'ATM'
"2003년 4월 영국계 펀드인 소버린자산운용. SK㈜ 지분 14.99%를 매입해 2대 주주에 오른다. 당시 소버린 측은 SK그룹에 대한 경영 참여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는 것. 소버린자산운용은 이후 2년 3개월 동안 경영투명성 제고 등을 내세워 SK그룹을 상대로 최태원 회장 퇴진 등 경영진 교체 및 기업지배구조 개선, 계열사 청산 등을 요구했다. 1조원 가까이 투입해 방어전에 나선 SK를 소버린이 차지하진 못했다. 하지만 소버린은 지분 14.99%를 주당 5만2700원에 팔아 7559억원을 챙겼다. 배당금과 환율 변동 등에 따른 차익까지 감안하면 1조원 안팎이다."
"KT&G 역시 외국계 펀드의 먹잇감이 됐었다. '기업 사냥꾼'으로 잘 알려진 칼 아이칸은 스틸파트너스와 손잡고 2006년 KT&G 주식 6.59%를 사들였다. 이후 이사회에서 자회사 매각을 요구하는 등 적극적인 경영 개입을 시도하다 주식을 매각해 1500억원을 벌었다."
지금껏 한국 기업들은 행동주의 펀드의 자동화기기(ATM)나 다름 없었다. 왜(?) 그럴까.
"어느 가게에서 50달러짜리 예쁜 인형을 팔고 있다. 그런데 인형을 사면 100달러짜리 금반지를 선물로 준다. 인형만 사면 무조건 50달러를 번다. 이런 이상한 일이 실제 증시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런 미스터리를 '모(母)회사의 퍼즐(parent company puzzle)'이라고 부르자."(미국 캘리포니아대 브래드퍼드 코넬(금융학) 교수 2000년 '모회사의 퍼즐'논문)
시장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투기 펀드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큰 이유로 '모회사의 퍼즐'에서 원인을 찾는 이가 있다 .먹을 게 있다는 얘기다.
행동주의 투자 전략별 증가율자료=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또다른 이유로는 제도적으로 경영권 방어 장치가 취약하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소유 분산을 권장하고 소액주주의 권한을 단계적으로 강화해 왔지만, 신주인수선택권(포이즌필)이나 차등의결권, 황금주 등 선진국이 보유한 경영권 방어 장치들이 취약한 실정이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구글은 공동 창업자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에릭 슈밋 CEO 등이 시장에 공개하지 않은 클래스B 주식의 92.5%(2014년 말 기준)를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구글 의결권의 60.1%를 행사한다.
또 정치권에서는 '주주 행동주의'에 힘을 실어줄 법안을 추진 중이다.
◆기업 스스로 변해야
엘리엇과 같은 행동주의 펀드 상당수가 아시아 지역에 터를 잡았다.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운용자산(AUM)은 2009년 362억 달러에서 2016년 말 1300억 달러로 성장했다. 가까운 이웃인 일본에서 행동주의 투자자가 투자한 기업은 2015년 8개에서 2016년에는 2배 이상으로 늘었다.
한국시장도 예외는 아니다. 지배구조 개편과정에서 매번 '행동주의 펀드'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손 놓고 당해야 할까.
김예구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저금리, 저성장이 지속되고 기업들이 현금유보를 늘리는 상황에서 투자수익을 높이는 데 한계를 느낀 투자자들은 행동주의 투자 전략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며 "기업들이 이에 대응해 지배구조, 사업 전략의 취약성을 상시적으로 감시하고,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스튜어드십 코드나 다중대표소송제 등에 적극 대처할 필요가 있다는 것. 기업의 자본 효율성이 높아지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2004~2007년 노무현 정권의 재벌개혁 정책(기업 감시인)으로 기업의 자본효율성 높아졌고, 이는 기업의 멀티플 재평가로 이어진 사례가 있다.
구글과 GE가 좋은 예다. 구글은 연구개발(R&D)과 인수합병(M&A) 등을 효율적으로 활용한다. 구글의 매출 대비 'R&D+M&A' 비중은 30%다. 그만큼 기업의 성장성 확보를 위한 투자를 잘 진행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 회사의 주가수익비율(PER)은 30배로 미국 IT섹터 PER(25배)을 웃돈다. GE는 좀 다른 예다. 이 회사는 성장성을 보유한 업종은 아니다. 하지만 GE는 삼성전자처럼 2014년 이후 자사주 매입을 늘렸고, 자사주 소각도 이전보다 큰 규모로 진행하고 있다. 순이익 규모는 이전 최고 수준에 95%에 불과하지만 주당순이익(EPS)은 이미 사상 최고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