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직 2년차인 이모 씨(52·가명)는 악착같이 모은 2억 5000만원을 어디에서 불릴 지 고민이다. 주식이나 펀드는 복잡하고 자칫 원금을 까먹을 수 있어 선뜻 내키지 않는다. 저축성 예금에 넣자니 손해보는 장사 같다. 부동산 갭투자(전세 끼고 집 매입)도 생각했다. 하지만 정부가 강력한 부동산 대책을 쓰고 있어 있는 돈까지 날릴까 걱정돼 생각을 접었다. 결국 그는 프라이빗뱅커(PB)의 권유로 '수시입출금 예금'에 넣어 두기로 마음먹었다.
어렵게 마련한 목돈을 굴릴 곳이 없자 이씨 처럼 다른 투자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 돈을 빼서 쓸 수 있는 '은행 파킹(단기 예금 등에 예치)'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저금리 속에 만기에 따른 금리 격차가 과거에 비해 줄어들자 서민들이 돈을 은행에 오랫동안 묵혀둬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때문이다. 금리가 오른 후 더 높은 금리를 따라 자금을 쉽게 이동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난 영향도 있다.
한편에선 청년 실업과 고령화,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물가 상승으로 '소비절벽'이 우려된다.
◆ 금리인상 깜빡이에 예금도 짧게
16일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올 1월 말 기준 가계가 예금은행에 돈을 맡긴 총예금액(말잔 기준)은 601조3385억원이었다. 1년 전보다 20조6224억원이 늘어난 액수다.
그러나 과거 서민들의 목돈 마련 수단으로 각광 받던 저축성예금은 낮은 금리로 점점 매력을 잃어가고 있다.
지난 1년간 늘어난 가계 총 예금 증가분의 절반 가량인 14조 6321억원이 저축성예금(잔액 528조9874억원)이었다.
저축성예금은 지난 2016년 1월 처음으로 500조원(502조98억원)을 넘어섰다.
하지만 증가세를 보면 제자리 걸음이다. 지난 1년간 1%대 성장률을 보인 달은 9월(1.82%), 12월(1.30%) 단 두차례다. 올해들어서는 지난해 말 529조620억원 보다 줄었다.
은행에 돈을 넣어봤자 사실상 손해보는 장사를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해 가계(가계에 봉사하는 비영리단체 포함) 이자소득은 30조5795억원이었다. 가계 이자소득은 1년 전보다 2.2% 줄어들며 1995년(29조7340억원) 이후 최소를 기록했다. 반면 가계 이자지출은 8.6% 증가한 34조4654억원이었다. 이자 수지는 3조8859억원 적자를 기록했다.
은행에 일단 넣어 두고 보자는 '파킹 현상'도 심화되고 있다. 은행에 일단 넣어 두고 보자는 '파킹 현상'도 심화되고 있다. 2월 말 기준 가계 및 비영리단체의 시중통화량(광의통화·M2)은 1365조원이었다. 1년 전 1296조원 보다 5.29% 늘었다. M2는 언제나 원하는대로 현금화할 수 있는 자금을 말한다. 1년 전에 비해 수시입출식 저축성예금(14조원), 요구불예금(6조원), 만기 6개월 미만 정기예금(14조원) 등은 대폭 늘었다.
◆ 불안한 미래'소비절벽'현실로, 물가까지 덩달아 올라
서민들은 지갑도 닫았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민간최종소비지출은 1년 전보다 0.6% 포인트 떨어진 48.1%다. 2013년부터 5년 연속 하락했으며 한은이 관련 통계를 작성한 1970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올해 들어서도 소비는 늘지 않는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3월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전달보다 0.1포인트 하락한 108.1을 기록했다. 4개월째 내리막이다.
서민들이 돈 쓰기를 꺼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의 경우 고용시장에서 '재기'가 힘들어 돈 쓰기가 겁난다. 구조조정의 연쇄 사슬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기업들이 힘들어지면서 고용시장이 불안해지고, 개인은 언제든 파산의 길로 내 몰릴수 있다는 불안감이 크다.
경제협력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실업률이 글로벌 금융위기 전 수준으로 회복됐지만, 한국은 4년째 악화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실업률은 3.73%였다. 연간 기준 2013년 이후 4년째 악화한 것이다. 특히 청년실업이 심각했다.
현대경제연구원 홍준표 연구위원은 "청년층의 경제활동 제약이 심화되면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저하되고 사회적인 비용부담도 증가한다"며 "지속적인 경제 성장, 청년층의 심리적 불안 완화, 세대 간 갈등 해소를 위해 벼랑 끝 위기의 청년들이 처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100세 시대지만 노후자금 모으기도 빠듯하다.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에 따르면 중산층이 현재 마련한 노후자금은 평균 2900만원으로 모으려고 하는 평균 목표 노후자금 1억4800만원의 5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노령층의 소비는 급감했다. 신용카드 업계에 따르면 60세의 카드사용액은 55만7775원이었으며, 65세는 47만264원, 70세는 44만413원이었다.
최저임금 인상 이후 본격화된 가격 인상이 도미노 처럼 번지면서 생활물가 전반도 오르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3월 외식물가는 2.5%나 올랐다. 정부는 당초 최저임금 인상은 물가 영향이 제한적 수준에 그칠 뿐 아니라 소비 확대, 기업 매출 증대, 고용 증가로 이어지며 소득주도성장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급격한 물가 상승을 유발하며 서민에게 부담을 안기고 있다. 게다가 국제 유가 상승으로 석유류 가격도 오르고 있고, 서울시가 하반기 택시요금을 최대 25% 올리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어 물가는 더 불안해질 수 있다.
경제 전문가들은 "일자리를 늘리고, 실직에 따른 재교육, 재사회화 시스템을 구축해 가야 한다"면서 "속도감 있는 구조개혁과 과감한 산업 구조조정으로 경제 전반에 파생되는 위험을 줄이는 것도 함께 추진돼야 한다. 아울러 소비자 복지 등 다양한 대책도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