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년 차 직장인 김절약(34·가명) 씨는 3년간 허리띠를 졸라 매며 5000만원이란 목돈을 손에 쥐었다. 주식이나 파생상품 투자는 복잡한 데다 자칫 원금을 까먹을 수 있어 선뜻 내키지 않았다. 저축성 예금에 넣자니 실질금리 마이너스 시대에 손해보는 장사 같았다. 부동산 갭투자(전세 끼고 집 매입)도 생각했다. 하지만 정부가 보유세 도입 등 강도 높은 부동산 정책을 펼 가능성이 크다는 소식에 생각을 접었다. 결국 그는 프라이빗뱅커(PB)의 권유로 '수시 입출금 예금'에 잠시 돈을 넣어 두기로 마음먹었다.
실질 이자율이 마이너스(-0.6%)로 떨어지면서 김씨 처럼 다른 투자 기회가 나타나면 언제든 돈을 빼서 쓸 수 있는 '은행 파킹(단기 예금 등에 예치)'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저금리 속에 만기에 따른 금리 격차가 과거에 비해 줄어들자 서민들이 돈을 은행에 오랫동안 묵혀둬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금리가 떨어지면 소비와 투자가 늘어날 것이란 기대와 반대로 시중에 돈이 안 돈다는 얘기다.
4일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3월 말 현재 가계가 예금은행에 돈을 맡긴 총예금액(말잔 기준)은 614조3445억원이었다. 1년 전보다 27조1094억원(4.62%)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과거 서민들의 목돈 마련 수단으로 각광 받던 저축성예금은 낮은 금리로 점점 매력을 잃어가고 있다.
지난 1년간 늘어난 가계 총 예금의 75.73%에 달하는 20조 5306억원이 저축성예금(잔액 537조5421억원)이었다. 저축성예금은 지난해 12월 처음으로 600조원(600조1115억원)을 넘어섰다. 하지만 증가세를 보면 제자리 걸음이다. 지난해 이후 올해 3까지 월간 기준으로 지난해 12월(1.07%↑), 3월(1.17%↑)을 제외하면 1%대 증가율을 보인 적은 단 한 차례도 없다.
이 증가율은 지난 2008년 10월 8.0%로 높아지고서 서서히 상승해 2009년 8월과 2010년 7월에 각각 17.3%에 달하는 등 한국 경제가 금융위기의 충격을 벗어나고서 2009년부터 2011년 상반기까지 두자릿수 증가율을 대체로 유지했다. 그러나 한은이 2012년부터 기준금리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저축성예금 증가율은 바닥에 머물고 있다.
초저금리 시대가 시작되면서 은행에 돈을 넣어봤자 사실상 손해보는 장사를 할 수밖에 없는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국제금융센터와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한국의 실질 이자율(최근 기준금리-예상 인플레이션)은 -0.6%이다.
체코(-0.8%), 헝가리(-1.8%), 필리핀(-0.4%), 폴란드(-1.2%) 등을 제외하면 가장 낮은 수준이다.
은행권 한 PB는 "고령화 시대가 가속화되는 가운데 경기가 본격적으로 살아나기 전까지는 안전자산 선호, 예·적금의 단기화 현상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은행에 일단 넣어 두고 보자는 '파킹 현상'은 심화되고 있다.
3월 말 기준 가계 부문 시중통화량(광의통화·M2)은 1380조3841억원(원계열, 평잔기준)나 됐다. 지난해 말 1350조600억원 보다 30조3240억원 불어난 것이다. M2는 언제나 원하는대로 현금화할 수 있는 자금을 말한다.
국내은행의 요구불예금 잔액은 191조2426억원을 기록했다. 올해 들어(1월 186조1866억원, 2월 190조9208억원) 증가세다.
경기를 살리려고 금리를 낮춘 것인데 이렇게 돈 쓰기를 꺼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의 경우 고용시장에서 '재기'가 힘들어 돈 쓰기가 겁난다. 구조조정의 연쇄 사슬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기업들이 힘들어지면서 고용시장이 불안해지고, 개인은 언제든 파산의 길로 내 몰릴수 있다는 불안감이 크다.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 조사 결과 중 체감실업률을 나타내는 고용보조지표3(확장실업률)은 지난해 4월부터 올해 4월까지 전년 동월 대비 13개월 연속 상승했다. 체감실업률이란 근로 시간이 주당 36시간 미만이면서 추가 취업을 원하는 근로자와 비경제활동인구 중 최근 4주간 구직 활동을 했지만 취업이 불가능한 경우를 모두 실업자로 반영해 계산한 실업률이다.
돈 있는 사람도 나름 이유가 있다. 투자처가 마땅치 않아 손실 가능성이 적은 은행에 돈을 맡기더라도 다른 투자 기회가 나타나면 언제든 돈을 빼서 쓰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일자리를 늘리고, 실직에 따른 재교육, 재사회화 시스템을 구축해 가야 한다"면서 "아울러 다양한 투자처를 발굴해 돈이 돌 수 있는 환경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