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0조원에 달하는 국민 노후자금을 굴리는 국민연금이 최근 시장에서 공개적인 주주권 행사에 나서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찬성표를 던지며 '홍역'을 겪은 바 있는 국민연금은 올 들어 현대차 합병,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일탈 행위 등에 대해 시장 혼란 예방 차원에서 적극적인 주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내달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앞두고 국민연금의 주주활동 강화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되는 가운데 일각에선 국민연금의 막강해진 영향력을 두고 기업 경영 자율성 훼손 등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지난해 7월 이후 1년 가까이 공백이 이어지고 있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CIO)의 부재(不在)에 대해서도 뒷말이 무성하다.
4일 자본시장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국내 투자 규모만 무려 131조원(올 1분기 말 기준)에 달한다.
국민연금이 홈페이지에 공개한 투자 자료에 따르면 5% 이상 지분 보유 국내 기업은 276개사로 전기·전자부터 통신·화학·유통·금융·보험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대표적으로 삼성전자 9.5%, SK하이닉스 9.9%, 현대차 8.4%, 네이버 10.8%, LG화학 9.1%, 신한지주 9.6% 등 국민연금은 주요 상장사의 대주주 또는 2대 주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국민연금이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갑질 행위와 관련해 경영진 면담을 공개 요청하는 등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에 나서면서 국민연금이 실제 기업 경영에 참여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까지 나온다.
◆ 국민연금 "국민 우려 해소 위해 주주권 적극 행사"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30일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를 열고 대한항공 사태에 대해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명하고 공개 서한 발송 및 대표이사와 임원 등의 경영진 면담을 요청했다. 국민연금은 대한항공 지분을 12.45% 보유한 2대 주주로 주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까진 의결권 찬반 표시, 배당 확대 요구 등 제한적인 참여를 해왔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날 회의에서 "국민의 자산을 지키고 국민연금의 장기 수익성을 고려해 주주로서 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주주권 행사를 제안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 역시 "국민의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대한항공 경영진이 의미 있는 조치를 시행하고 실질적인 해결 방안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시장에선 국민연금의 이 같은 행보를 두고 내달 도입을 앞둔 스튜어드십 코드에 대한 선제적 움직임이 아니냐는 주장이 나온다. 실제 지난달 31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에 관한 연구' 용역 결과에 따르면 연구진은 국민연금의 공개활동 강화를 위해 내년부터 공개서한 발송, 중점대상회사 지정 및 명단 공개, 사외이사(감사) 후보 추천 등 주주제안, 의결권 행사 위임장 대결, 주주대표 소송 등을 강화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연구진은 보고서에서 "국민연금이 비공개 주주활동을 해왔으나 효과가 없어 공개활동으로 전환하고 경영 참여 해당 주주 활동 등을 할 필요가 있다"며 "지분 단순 보유에서 경영 참여로 목적을 변경 신고한 후 관련 주주권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 "기업 경영 자율성 훼손…'연금사회주의' 우려"
다만 일각에선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 행보에 정부로부터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개별 기업의 의사 결정에 일괄 개입에 나설 경우 경영 자율성이 크게 훼손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른바 정부가 기금 운용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정권의 성향에 따라 연금이 기업을 지배하는 '연금사회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 삼성물산-제일모직 사태와 최근의 현대차 지배구조 개편안 등을 보면 국내 기업이 이미 국민연금에 종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며 "이 같은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기 시작하면 기업의 자율성이 크게 훼손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자본시장의 대통령'으로 불리며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국민연금 CIO의 공백 장기화는 국민연금의 현재 '아킬레스건'으로 꼽힌다. 지난 4월 국민연금 기금이사추천위가 3명의 후보를 CIO 후보로 추천받았지만 2개월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최종 후보자를 낙점하지 못하면서 일부 재공모 가능성 등 뒷말이 나온다.
김성주 국민연금 이사장은 이에 대해 '국민의 눈높이'를 강조하며 "보다 면밀한 검증 중에 있다"는 말만 되풀이해 본부 전주 이전 등으로 적임자를 찾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비관론도 제기된다.
업계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주주권 강화 등 새로운 정책 시행을 앞둔 가운데 CIO는 국민연금의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심이 되는 자리"라며 "후보자까지 추천받은 상황에서 적임자를 내놓지 못한다는 것은 내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국민 노후자금 운용에 대한 불안감도 거론된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