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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북한/한반도

'하노이회담'서 '레이캬비크회담'을 엿보다

1987년 당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쵸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워싱턴에서 정상회담을 진행하는 모습/레이건 도서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역사적인 두 번째 만남이 베트남 하노이(2월27~28일)에서 '빈손회담'으로 끝난 가운데, 이번 회담에서 '레이캬비크회담'이 떠오른다는 주장이 나왔다. 생소한 이름의 레이캬비크회담과 하노이회담은 어떤 면에서 연관성이 있는 걸까.

우선 레이캬비크회담은 '냉전 말기' 때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쵸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1986년 10월11일부터 12일까지 양일간 북유렵국가인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가진 정상회담을 말한다. 이 회담은 당시 결렬됐으나 이후 냉전을 종식시키는데 큰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결렬된 부분이 레이캬비크회담과 하노이회담의 공통점인 셈이다.

케네스 아델만 전 유엔(국제연합)주재 미국대사는 지난 1일 미국 정치전문재체 폴리티코에 '트럼프의 실패한 하노이회담이 레이캬비크회담이 될 수 있는 이유'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실었다. 기고문에 따르면, 레이건 대통령과 고르바쵸프 서기장은 레이캬비크에서 만나 '군비 축소'를 논의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모든 핵무기 제거'를, 고르바쵸프 서기장은 '미사일방어시스템 규제 포함'을 각각 주장하면서 합의에 실패했다. 실패도 잠시, 두 정상은 1987년 워싱턴에서 열린 미소정상회담 때 '중거리핵무기 폐기협정(IRNFT)'에 합의한다. 조지 슐츠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은 레이캬비크회담이 IRNFT의 초석이 됐음을 주장하기도 했다.

하노이회담 역시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머리를 맞대 비핵화 관련 논의를 했으나 어떠한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회담이 결렬된 이유는 북한의 비핵화 조치와 미국의 상응조치간 인식 차가 큰 게 원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숙소로 돌아와 정상회담 합의문 불발 관련 "영변 핵시설 해체로 국제사회의 전면적인 제재완화를 요구했으나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 장관도 "비핵화에는 순서가 있다. 영변 핵시설 해체 후 핵탄두 및 무기시스템 등이 남았다. 이 부분을 북한과 합의하지 못했다"고 부연했다. 하노이회담 후 북미가 대화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합의점을 찾는다면 '제2의 IRNFT'가 이뤄질 수 있다는 얘기다.

한편 소련은 1922년대 초반부터 1991년 12월까지 유라시아 지역에 존재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연방국가다. 다만 1989년 동독일-서독일 통일을 비롯해 공산주의 국가들이 시장경제를 지향하게 됐고, 1991년 소련에서는 보수주의자들의 쿠데타가 발생하고 만다. 이를 계기로 소련은 공산주의 포기 및 공산당 해체를 선언한다. 이후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발트3국을 제외한 12개 독립공화국이 독립국가연합을 형성해 소련은 정식으로 해체됐다. 아울러 냉전은 제2차 세계대전(1939년 9월~1945년 9월) 후 공산주의진영국가와 자본주의진영국가간 군사적 위협의 잠재적인 권력투쟁을 말한다. 냉전은 소련의 해체로 붕괴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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