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 전자공시, 대한항공 1998년도 사업보고서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대한항공 1998년도 사업보고서
'방패'가 자신을 위협하는 '창'이 됐다.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을 20년 만에 대표이사 자리에서 끌어내린 이사선임 정관 얘기다.
대부분의 상장사에서 이사선임은 출석주주의 과반수만 찬성하면 통과되는 일반결의사항이다. 반면 대한항공은 출석주주의 3분의 2가 찬성해야 하는 특별결의사항으로 정해놨다. 조 회장 등 최대주주의 지분율은 33.34%. 특별결의사항으로 묶어놓은 이사선임 정관은 지난 20년간 원하지 않는 이사는 절대 선임하지 않을 수 있는 강력한 방패가 됐지만 반대로 이제는 원하는 이사를 선임할 수도 없도록 하는 자충수로 바뀌었다.
31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지난 27일 열린 대한항공 정기 주주총회에서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안은 부결됐다.
이날 주총에는 전체 주주의 73.84%가 참석했다. 이들 중 66.7% 가량이 찬성해야 했지만 64.1%만이 찬성표를 던졌다. 이사선임이 일반결의 사항이었다면 충분히 통과됐을 찬성률이지만 특별결의사항이었던 탓에 조 회장이 사내이사 연임에 실패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 2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공정거래 4개 기관 조찬 강연에서 "대한항공 주주총회는 시장참여자와 사회의 인식을 바꾼 이정표"라며 "특별결의사항에 해당하는 경우 과거와 달리 합리적 안건이 아니면 주총서 동의를 얻기 어려워졌다"고 평가했다.
주총 특별결의는 보통 정관변경이나 경영위임, 영업양수, 이사해임 등 중요한 사안에만 해당된다. 대한항공은 왜 이사선임을 어렵게 만들었을까.
업계에서는 외환위기로 자본시장 등이 전면적으로 개방되면서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대한항공이 이사선임 관련 정관을 바꾼 것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3월 주총이다. 이사 및 감사의 선임방법 변경 안건이 통과되면서다.
대한항공의 1999년 회계연도 사업보고서 정관에 따르면 '이사는 출석한 주주의 의결권의 3분의 2 이상의 수와 발행주식총수의 3분 의 1이상의 수로써 선임한다'고 되어 있다.
시장개방보다는 승계 과정에서 경영권을 좀 더 공고히 하기 위해서란 시각도 있다. 조 회장은 지난 1999년 회장으로 취임했다.
외국인의 경영간섭과 관련해서는 항공법이 충분히 막아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한항공의 경우 항공법에 따라 외국인은 이사 총수의 반수 이상 선임될 수 없다. 또 외국인은 대표이사로 선임될 수 없으며, 내부 위임 기타 여하한 방법으로도 회사를 대표할 권한을 갖지 못한다.
당시 외국인 지분율도 높지 않았다. 1998년 말 기준 외국인 주주는 한 명이며, 보유주식수도 82주에 불과했다. 이후 외국인이 매수에 나섰다고 해도 1999년 말 기준 외국인 주주 186명, 지분율은 0.56%에 그쳤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지난 27일 국회 정무위원회 업무보고에서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대한항공이 이사선임을 특별 결의안으로 분류한 것은 이해관계자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뽑기 위한 조처였다. 결국 제 발등을 찍는 자충수를 둔 꼴"이라는 지적에 "의원님 말씀이 일리 있어 보인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