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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회일반

[임시정부100주년] <6>대중매체 역사 살펴보기…①영화 '암살'

영화 암살 포스터



"우리 만주에서는 지붕에서 물이 새거나 벽이 부셔져도 고치질 않았어 곧 독립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갈텐데 뭐하러 고치겠어. 두 사람을 죽인다고 독립이되냐고?. 모르지 그치면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지난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이해 개봉한 영화 '암살'의 여주인공 배우 전지현의 명대사다.

영화 배경은 1933년 대한민국의 조국이 사라진 시대. 1919년 3월 1일 만세의 물결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지만 이후 일제가 한반도에 실시한 식민지 통치, 이른바 '문화통치정책'으로 민족의 주관과 개인적 이익을 맞바군 친일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때다. 당시 천만관객이 응원을 보낸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내용 중에 기록된 실제 역사와 비슷한 점과 다른 점, 또는 다시 한번 가슴 속에 새겨야 할 내용을 다뤄봤다.

암살에서 독립군 안옥윤 역할을 맡은 배우 전지현.



남자현 지사



◆ 女 저격수 '전지현' 실제 인물일까

영화 첫 부분이 시작될 무렵. 저격수 안옥윤(배우 전지현)은 1933년 만주국 수립 축하연에 참여한 일본군 장성 암살 작전을 수행한다. 영화에서 처럼 연약한 몸을 이끌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여자가 있었을까.

실제 안옥윤 역은 독립운동가 남자현 지사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남자현 지사는 일제 만행에 왜군의 전투로 나가 목숨을 잃은 남편의 원수를 갚고자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서로군정서에 가입해 군사들의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한 인물이다. 서로군정서는 1919년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만주에서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독립군 '속사포' 역할을 맡은 배우 조진웅.



◆ 속사포 '조진웅'의 신흥무관학교

"나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오."

배우 조진웅이 연기한 '속사포'에게는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란 이름표가 항상 따라붙는다. 신흥무관학교는 당시 조선 최고의 부자이며 명문 집안의 후손인 이시영, 이회영,이상룡를 필두로 만들어진 항일 독립을 위한 교육기관이다. 당시 6형제는 가산을 전부 정리해 만주벌판 서간도로 이주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학교는 18개의 교실이 동으로 이뤄져 산 아래의 평지에는 연병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학교 학생들은 오전에는 역사·지리·산술·화학 등 12개의 일반 과목을 배우는 시간을 보냈고 오후에는 군사훈련을 받았다.

한 역사 전문가는 "당시 독립의 쟁취 뿐만 아니라 독립 이후에 대한민국이 신국가를 건설했을 때 나라를 이끌어 갈 인재양성에도 목표가 있었다"며 "이 때문에 학술 이론과 군사 교육을 병행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흥무관학교가 세워진 이후 약 10여년 동안 3500여명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됐다. 이들은 청산리대첩, 의열단,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독립군 등 수많은 단체에서 활약을 했다.

영화 암살에서 약산 김원봉 역할로 특별 출연한 배우 조승우.



(오른쪽)약산 김원봉. /국사편찬위원회



◆ 비운의 독립투사 '김원봉'

"가서 선생께 전하시오 나 밀양에서 온 김원봉이오."

영화에서 약산 김원봉(배우 조승우) 선생이 상하이 임시정부에 백범 김구 선생을 찾아오는 장면이 연출된다. 짧은 시간 보여지는 특별 출연이지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는 독립운동가 중 한명이다. 백범 김구와 함께 중국 내 독립운동의 큰 축을 맡은 인물이다.

김원봉은 1919년 만 21세의 나이로 의열단을 조직했고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조선총독부, 종로경찰서,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경찰서 등을 상대로 폭탄을 던지고 총격전을 벌이는 등 치열한 싸움을 지휘했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 때 김구, 김규식과 북한으로 건너갔다가 그대로 잔류하며 월북인사가 됐다. 이후 북한 정권 수립에도 참여하는 등의 역사적인 발자취를 남겼지만 중국의 국민당 장개석의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교도소에 끌려갔고 그 이후에 자살했다는 설이 있지만 어떻게 죽었는 지는 현재까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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