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계가 '실적 빙하기'를 맞았다. 경제를 이끄는 대기업들이 잇따라 저조한 실적을 받아들고 우울한 모습이다.
주요 기업들의 상반기 부진한 실적은 미·중 무역전쟁 등 대외 불확실성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지만, 내부적으로도 ▲규제로 인한 투자의욕 감소 ▲반기업 정서 ▲귀족노조·강성노조 압박 등 '삼중고(三重苦)'가 겹쳤다.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퍼펙트 스톰(초강력 폭풍)'이다.
◆제조업 실적 악화… 위기 확산
25일 재계에 따르면 국내 경제를 주도하는 주요 기업들의 실적이 거의 모든 산업분야에서 하향곡선을 그렸다.
삼성전자는 잠정실적 발표를 통해 올해 상반기에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보다 무려 58.28% 급감한 12조7300억원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삼성전자의 영업이익 급감은 모든 사업부문에서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주력 분야인 반도체의 영업이익이 3조원대로 9분기만 5조원 이하를 기록할 것으로 우려된다. IM부문도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가전 역시 예상만큼 좋은 결과를 내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SK그룹 상황도 좋지 않다. 주력 기업인 SK하이닉스의 2분기 실적은 전년 동기대비 매출의 경우 38%, 영업이익은 무려 89% 급감한 6조4522억원과 6376억원을 각각 기록했다. SK텔레콤은 요금인하에 5G망 투자 등 비용 증가에 따라 이익 감소가 불가피하다. SK이노베이션 역시 전년 대비 50% 이상 영업이익 감소가 예상된다.
LG그룹 역시 별볼일 없는 중간 성적표를 받았다. 미래 주력 부문인 LG화학의 2분기 영업이익이 2675억원으로, 2017년과 2018년보다 3분의 1로 떨어졌다. LG디스플레이도 2개 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하며 우울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 LG전자가 '신(新)가전'을 토대로 선전했지만, 기대보다는 낮은 실적에 난처한 상황이다.
자동차와 철강 등 사업은 나름대로 선전했다. 현대차가 7분기 만에 영업이익 1조원을 넘어섰고, 포스코도 8분기 연속 1조원 이상 영업이익을 이어가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러나 속내는 다르다. 실적이 좋아진 것은 사업이 건실해서라기보다는 환율효과 때문이었다. 실제로, 현대차와 기아차는 2분기 동안 110만4916대, 70만2733대를 글로벌에 판매했지만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서는 각각 7.3%, 5.0% 줄었다.
포스코도 2분기 영업이익률이 9.7%로 한자리수로 주저앉았다. 극한의 원가절감에 나섰음에도 막지 못한 악재다. 포스코인터내셔널 미얀마 가스전 판매 확대 등 글로벌 인프라부문에서 실적이 좋았을 뿐, 주력 부문인 철강부문에서는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유통업계도 비상이다. 신세계그룹 캐시카우(현금창출원)인 이마트는 2분기 사상 첫 적자가 유력시된다. 롯데그룹도 2분기 실적 악화가 불가피하다는 평가다.
◆글로벌 무역 전쟁 쓰나미
업계 실적이 저조한 가장 큰 이유는 글로벌 시장 위기 때문이다. 지난해 미국과 중국이 무역 분쟁을 시작하면서 글로벌 경제도 급격히 움추러들었다.
스마트폰과 가전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가트너에 따르면 올해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은 전년보다 3.3% 줄어들 예정이다. 중국과 미국 소비자들이 소비를 줄이는 가운데, 신흥시장도 경기 한파가 덮쳤기 때문이다. 가전도 내년 도쿄올림픽 등 호재가 기대되지만 아직은 예상됐던 만큼 성장이 보이지 않고 있다.
유통업계도 같은 문제에 직면해있다. 여기에 하반기에는 일본 수출규제에 따른 불매운동으로 시장 분위기도 얼어붙을 조짐이 보인다.
국가 경제 측면에서는 반도체가 가장 큰 문제다. 최근 수출의 대다수를 반도체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반도체시장은 지난해부터 시작된 메모리 반도체 가격 하락에 국내 반도체 업계 이익이 급감한 상태다. 7월부터는 일본 수출규제가 시작되면서 가격이 반등했지만, 정작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생산 차질과 경쟁력 약화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미국 마이크론과 대만 TSMC 등이 수혜자로 떠올랐다. 중국 반도체 굴기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걱정도 다시 시작됐다.
◆규제로 인한 투자 감소
국내 정세도 나쁘다. 삼성전자서비스가 파업을 시작했고, 현대차와 한국지엠 등 자동차 업계에서도 노조가 파업을 준비 중이다. 현대중공업을 비롯해 여러 회사 노조들도 사측과 오랜 갈등을 지속하고 있다.
규제도 여전히 심각하다는 지적이다. 막대한 법인세와 지배구조 개편, 일감 몰아주기 등으로 재계를 꾸준히 압박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 수출규제에 따른 피해 책임을 대기업에 떠넘기는 무책임한 모습까지 보였다. 급격하게 오른 최저임금도 부담이다. 검찰도 뚜렷한 증거없이 무리하게 삼성바이오로직스 관련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국내 투자가 줄어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투자를 하면 각종 규제와 압박에 쫓겨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대표적이다. 삼성은 미래 먹거리인 바이오 시장 선점을 위해 막대한 돈을 투자했지만, 잇딴 수사와 정부 견제에 제대로 사업을 펼치기 어렵다는 전언이다.
반도체 업계는 업황 부진으로 하반기부터 대대적인 투자 축소를 공식화했다. SK하이닉스는 하반기 반도체 생산량을 추가로 줄이겠다며, 내년 투자액도 대폭 하향할 것으로 예고했다. 삼성전자 역시 마찬가지다. '반도체 비전 2030'에서 계획한 10년간 133조원 투자를 구체적으로 사용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전언이다.
남는 돈은 해외를 돌고 있다. 삼성전자는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 인도에 꾸준히 공장을 늘리고 있으며 미국에도 반도체와 가전 생산 공장 확대를 검토 중으로 전해졌다. 현대차도 국내 공장 생산량을 늘린지 오래됐지만 유럽, 인도, 동남아, 미국에까지 투자를 대폭 키웠다.
SK는 아예 계열사끼리 돈을 모아 동남아투자회사 등을 통해 해외에만 투자하고 있다. LG전자는 MC 부문 원가 절감을 위해 스마트폰 생산라인을 베트남으로 완전히 옮긴다.
재계 관계자는 "글로벌 경제가 불투명하다는 문제도 있지만, 여전한 정부의 규제와 강성노조, 반기업 정서 등이 국내 투자를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이라며 "국내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분야에서 광범위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