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에 급식실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반에서 키가 제일 큰 친구가 단신인 급우에게 "너는 어떻게 앉은 키도 작냐?"라고 했다가 숟가락으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때 깨달았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발작버튼'이 있는데 그것을 누르면 안 된다는 사실을. 발작버튼은 콤플렉스를 의미하는 신조어다. 간절히 원했으나 갖지 못해 콤플렉스가 된 것을 건드려 폭발하게 하는 일을 두고 흔히들 '발작버튼 눌렸다'고 말한다.
MZ세대의 발작버튼은 '공정'이다. 학교에서는 분골쇄신하면 마부위침한다고 배웠는데 악전고투해도 저력지재 신세를 면치 못해서다. 이들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를 바랐다. 그러나 돌아온 건 권력형 성추행 범죄로 인한 재보궐선거와 LH사태였다. MZ세대는 태어나 단 한 번도 공정한 사회를 갖지 못해 공정을 운운하면 발작버튼이 눌리는 걸까? 1980년대~2000년대 초 한국에서 태어난 MZ세대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공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이들은 계급장 떼고 자연인으로서의 '나'를 그대로 존중하고 이해해주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국내 상장 스포츠마케팅 회사에서 장애인 스포츠지도사로 근무하는 조주연(29·이하 가명) 씨는 공정을 "누구에게나 무한한 기회가 주어지고,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는 "모두가 출발선이 같을 순 없겠지만 노력에 따라 뒤집을 여지를 최대한으로 보장해주는 사회가 공정사회"라고 얘기했다.
공정이란 개념은 그가 지켜보고 경험했던 수많은 장애인 사례에서 확대됐다. 장애인들이 받는 불합리한 차별에 대해 많은 고민 거듭하면서다. "주거·이동수단·소득·교육 등 장애인들의 삶은 그야말로 불공정의 정점에 서 있다"는 게 그의 목격담이다. 조 씨는 "산업재해로 인정돼 보상금이 나오거나 사고 합의금을 받지 않는 이상 장애인들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더라"고 덧붙였다.
한상혁(31) 씨는 지방국립대 석사를 졸업한 후 공기업 연구직을 준비 중이다. 그는 1 저자로 5편, 2 저자로 3편의 SCI 논문을 썼다. 국내 유수의 학회에서 포스터 발표 수상 3회의 경력도 있으며 구두 논문발표에서 상도 받았다.
한 씨는 공정에 대해 "조국 딸이 아니더라도 입시와 취업에서 똑같은 선상에 서서 평등한 기회를 받는 것"이라면서 "민생안정과 일자리 창출도 공정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정부의 주요 과제"라고 강조했다.
여성들은 직장과 가정에서 겪은 차별의 경험을 토해내며 우리 사회의 불공정을 지적했다.
회사원 강하나(31) 씨는 "기본적으로는 차별이 없어야 하고 뭔가를 덧씌우지 말아야 한다"며 최근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강 씨는 "'여자는 빼'라는 말을 직접 들었다. 내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1차적으로 기회가 배제됐다"면서 "나라는 인간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역량이 있고와 상관없이 그냥 염색체가 XX라는 이유였다"고 털어놨다.
불공정한 일을 경험했을 때 든 감정은 '분노'였다. "'내가 등신 같았구나. 나름대로 조력하기 위해 자원했는데 그럴 가치가 없는 대상에 목을 맸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하며 자책했다.
대학생 윤슬(22) 씨는 "우리 조부모님은 내가 아닌 남동생의 학비만을 대줬다"고 말했다.
최근 다니던 회사를 관둔 박송이(34) 씨는 "내게 불공정은 숨 쉬듯 흔한 일이었다"면서 "회사에 면바지, 티셔츠 차림으로 출근하는 남자 동료와 다르게 끊임없이 치마와 구두, 화장을 강요받았다. 노출이 필요하다는 등 성희롱은 밥 먹듯이 당했다"고 호소했다.
박 씨는 "프로젝트는 고사하고 가벼운 일거리에서조차 여자라는 이유로 투명인간 취급을 당했다. 남직원들 중심으로 일이 돌아가 무시당하기 일쑤였다"며 "뿐만 아니라 커피 심부름에 대표 식사까지 챙겨야 했다. 사소한 심부름은 여자가, 회사 일은 남자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때려쳤다"고 고백했다.
왜 요즘 젊은이들은 공정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까? 이영일(34) 씨는 '정보의 홍수'를 그 원인으로 꼽았다. 이 씨는 "과거에 A라는 대통령이 우리나라에서 국제적인 행사를 개최하려고 했는데 외국인들이 묶을 호텔이 없어서 B라는 기업인에게 땅을 싸게 줄 테니 호텔을 지으라고 했다. A가 B에게만 준 기회는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이런 정경유착 관계를 옛날 사람들은 몰랐고, 알았더라도 시대가 시대인만큼 '부자들은 그냥 그러고 사는거야'라면서 체념했는데 이런 정보가 스마트폰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 수 있게 돼 공정하지 않은 일들이 다 까발려져 이 문제에 예민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씨는 "회사를 들어갈 때로 예를 들어보면 우리 아버지 시대 때만 해도 복지가 뭐가 있는지도 잘 모르니까 안 따지고 '아이고, 감사합니다'하면서 들어갔는데 요즘엔 블라인드(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앱)를 통해 저 회사는 인센 얼마래, 성과급 몇천만원 받았대 이런 걸 다 알게 되니까 비교가 쉬워지고, 나는 왜 그만큼 안주나 이런 걸 따지게 된다"면서 "옆사람과 내 격차가 눈에 너무 잘 보이니까 윗세대보다 정보에 빠삭한 젊은 사람들이 더 돌아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육군 보병사단에서 근무하는 중사 김승준(28) 씨는 군 생활 8년 차에 한 번도 없었던 특이한 경험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20대 초중반의 많은 청년이 주식과 비트코인 등 위험자산에 투자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7월부터 전군 사병들에게 휴대폰 사용이 허용되면서다. 심지어 불법 스포츠도박이 적발돼 처벌받는 사례도 여럿 봤다고 했다.
많은 병사들과 상담한 그는 공정의 가치가 무너졌기 때문으로 결론 내렸다. 김 중사는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대란과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태 속에서 땀 흘려 일해서 번 돈의 가치가 퇴색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부동산 대란 등 일련의 사태를 거치며 벌어졌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됐고 이는 청년들에게 박탈감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정년까지 군인 월급 평생 모아봤자 서울 전셋집 들어가는 것조차 힘들다. 위험자산 투자나 도박을 해서 한탕 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팽배해졌다"면서 "나도 젊지만 더 어린 20대 초반 친구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 정말 안타깝다"고 하소연했다.
돌취생(입사한 회사에 만족하지 못해 다시 취업시장으로 돌아온 이들을 일컫는 말) 박송이 씨는 사회 통념상 상식으로 여겨지는 것들과 실제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격차가 커서 20~30대가 불공정 문제에 격분한다고 봤다.
박 씨는 "스펙도 대외경험도 부족한 남자 응시자가 대기업에 최종합격하고, 남성 기혼자라는 이유로 성과도 없는데 승진시켜주고 이런 게 단지 이 자가 좋은 회사에 운 좋게 다닌 덕분에 일어난 일이냐"고 반문했다.
복권은 수학 못하는 사람들한테서 걷는 세금이란 말이 있다. 당첨될 확률이 적은데 기대를 걸어 공연히 치르게 된 대가라는 의미에서다. 우리사회가 공정해지길 바라는 것은 로또에 당첨되길 기대하는 일처럼 헛된 망상일까? 젊은이들이 바라는 공정한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20~30대들은 노동의 가치가 높아지는 사회가 공정한 사회라고 했다. 강 씨는 "어머니가 봉제 일을 오래 하셨다. 백화점에서 30만원에 팔리는 넥타이에 라벨을 달았는데 한장에 20원이었다. 많이 벌어봐야 한달에 80만원이었다"면서 "수천만원어치의 넥타이를 팔면 원단 생산자, 디자인 팀, 넥타이 회사, 유통사, 백화점 매장을 내주고 임대 수익을 얻는 사람 등이 이문을 나눠 갖게 된다. 30만원짜리 넥타이를 같이 만드는 시스템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을 해 인간답게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론 분배가 돼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조주연 씨는 "시작과 환경에 차이가 있더라도 그로 인한 차이에 대해선 차별을 하지 않는 사회를 원한다"며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부터 그 차이를 좁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 씨는 "고용 불안과 충격이 가장 큰 소득 하위계층에 대한 소득 보장과 직업훈련, 취업 기회 확대가 필요하다"면서 "사회적 약자에 공감해주고 배려를 아끼지 않고, 20·30대의 아픔을 이해한다면 오늘보다 내일이 조금 더 기대될 것 같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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