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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제약/의료/건강

[다시만난 巨人]한국 의학의 '빛'이 된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볼티모어 의대 졸업 당시 박에스더

그의 삶은 기적이었고, 한 줄기 빛이었다. 33년의 짧은 생이었지만 삶으로도, 죽음으로도 이 땅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사람. 대한민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사진)의 삶이다.

 

그는 선교사들이 만든 여학교 '이화학당'에서 자랐고, 국내 첫 여성병원 '보구녀관'에서 의료를 배웠다. 23세에 미국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며 의사가 됐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연간 5000명이 넘는 여성 환자들을 돌봤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천대받던 시절, 한국 여성 의학의 좁은 문을 열고 많은 조선 여인들을 살린 여의사. 비록 33년의 짧은 생이었지만 그의 인생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에 남은 문헌과 자료 등을 통해 박에스더 전 보구녀관 원장을 다시 만났다.

 

그는 조선 후기, 1877년 가난한 김홍택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이름은 점동이었다. 여성은 교육에서 완전히 소외되던 시절이었지만 점동은 달랐다. 김홍택이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에 고용된 것이 계기가 됐다. 점동이 10살이 되던 해 봄 선교사 스크랜튼의 어머니인 스크랜튼 대부인은 여성 교육 사업을 위해 여성 기숙 학교를 열었다. 고종이 '이화학당'으로 이름을 지은,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이다. 점동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이화학당의 네번째 학생이 됐다. 집을 떠나 스크랜튼 대부인과 함께 살게된 것도 이 때부터다.

 

- 여성으로 서구 교육을 받은 건 이례적인 일이다.

 

"당시 살림은 가난했고 한 식구라도 덜어야했던 아버지는 결혼 적령기가 된 언니와 갓난쟁이 동생 대신 나를 선택했다. 아버지는 선교사들과 함께 일하며 스크랜튼 대부인이 여학교를 설립하는 것과, 학생들의 생활 모습도 모두 지켜봤고, 그들이 선한일을 하기 위해 왔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했다."

 

- 조선시대 외국인 학교가 낯설지 않았나.

 

"당시 서양인이 아이를 잡아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퍼져있었다. 스크랜튼 대부인을 처음 만난 날은 몹시 추웠다. 그가 난로 가까이 앉으라고 불렀을 때, 처음 보는 난로 속으로 나를 넣을 것 같아 무서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친절한 마음을 느꼈고 학교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다. 그들은 절대 한국인들에 외국 문화를 가르치는데 몰두하지 않았다. 소녀들을 가난과 악습으로부터 보호하고 더 나은 한국인으로 자라도록 도왔고, 우리가 긍지를 가진 한국인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스크랜튼 대부인은 학교에 이어 여성을 위한 병원 설립을 추진했다. 남자 의사에 몸을 보일 수 없는 여성들이 아파도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시절이었다.  국내에 처음 파견된 여의사 하워드가 1888년 10월31일부터 이화학당 내 여성 전용 공간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고종은 이 여성병원에 '보구녀관'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여성을 질병으로 부터 보호하고 구원하라'는 뜻이 담겼다.

 

- 의료와의 인연은 언제 시작됐나.

 

"하워드가 2년만에 건강 악화로 본국에 돌아간 후, 로제타 셔우드 홀이 2대 책임자로 오게 됐다. 이 때 나는 그의 통역을 위해 보구녀관에 합류했다. 로제타는 여성 의료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1891년 신학기부터 이화학당 학생들에 생리학과 약리학을 가르치고, 약을 제조하거나 환자들을 돌보는 방법을 모두 가르쳤다."

 

- 처음 접한 의료는 어땠나.

 

"나는 통역은 좋아했지만 수술 보조는 좋아하지 않았다. 수술 과정을 보는 것은 불편하고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환자를 대하는 로제타의 진심을 알았기에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 번은 50킬로 떨어진 시골에서 가마를 타고 열여섯 소녀가 치료를 받으러 온 적이 있었다. 4년 전 입은 화상으로 오른손 세 손가락이 손바닥과 붙어 있던 환자였다. 손가락을 절개하고 분리하면서 피부 이식이 필요했다. 로제타는 환자를 설득했지만 이해시키지 못했고, 결국 자신의 피부 세군데를 떼어내 환자에 이식했다. 이를 본 이화학당 교사들도 피부를 기증하겠다고 나섰고, 결국 환자 본인과 오빠도 자신의 피부를 떼어내는 데 동의했다. 로제타는 30여개 피부 조각을 이식했고, 소녀의 손은 흉하지 않게 회복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기적 같았다."

 

박에스더(왼쪽)와 그의 남편 박여선(오른쪽) 그리고 선교사 로제타 홀(가운데)과 그의 아이들.

로제타와의 만남은 점동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로제타를 통해 기독교와 의료를 접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에스더'로 바꾸고 의료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열네살이었다.

 

- 박에스더라는 이름은 어떻게 받게 됐나.

 

"의학을 배우기 시작하며 신앙심이 깊어졌다. 1891년 세례를 받으며 에스더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에스더는 히브리어로 '별'을 뜻한다. 당시 한국 여성들은 14세가 되면 결혼을 하고 '어디 댁'이나 '누구 엄마'로 불렸다. 나는 에스더라는 이름을 스스로 선택했다. 처음에는 김에스더였지만 나중에 결혼하며 남편 성을 따라 박에스더가 됐다."

 

-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언젠가.

 

"당시 총 4건의 구순구개열 수술을 보조했다. 구순구개열은 간단한 외과 수술이지만, 외모 문제로 소외되던 많은 여성들을 구원했다. 여성들이 수술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보며 의사가 하는 일이 참 아름다운 일임을 깨달았다. 반드시 혼자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유학의 꿈을 키운 것도 그 때부터다."

 

1894년 그는 로제타를 따라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1896년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최연소 학생으로 입학하며, 첫 한국 여성 유학생이 됐다. 4년 후인 1900년, 한국 최초 여의사가 된 그는 미국에 남으라는 제안을 마다하고 다시 보구녀관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23살이었다.

 

- 한국에서 여의사로 사는 삶은 어땠나.

 

"병원에서 치료 뿐 아니라 병원 시설이 없는 곳으로 왕진도 많이 다녔다.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업무 후나 일요일에도 치료를 했고, 휴가 때도 집을 찾는 환자들을 진료했다.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매년 5000명이 넘는 여성 환자들을 돌봤다. 나는 병원들이 더 많이 세워져 '육체 뿐 아니라 영혼의 고통을 구제하는데 도움을 주고 어려운 환자들을 더 많이 치료할 수 있길 바랐다."

 

- 선교 활동을 통해 계몽에 힘썼는데.

 

"세상과 격리되어 있던 한국 여성들은 건강과 위생에 관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많았다. 당시 한국인들은 병에 걸리면 민간 요법이나 무속에 의지했고 무지로 인해 병이 깊어지는 안타까운 사례를 많이 접했다. 나는 그들을 계몽시켜가며 치료해야 했다. 그리고 여자라는 이유로,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삶의 의미를 잃은 여성들에 희망을 주고, 한국인의 생활과 인식 변화를 위해서도 노력했다."

 

이대서울병원 안에 복원된 보구녀관 모습

1910년 4월 박에스더는 33살의 나이로 안타깝게 숨을 거뒀다. 폐결핵이었다. 짧은 생은 끝났지만 그는 죽음을 통해 조선 땅에서 결핵을 몰아내는 계기를 만들었다. 박에스더를 이모라 불렀던 로제타의 아들 셔우드 홀 선교사는 그의 죽음을 계기로 한국에서 결핵을 막는데 온 힘을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의료 선교사로 활약하며 우리나라 최초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했고, 그 판매 기금으로 결핵전문병원을 세웠다.

 

박에스더의 인생은 그녀를 뒤따르는 의료계, 교육계, 선교계 여성들의 삶 자체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보구녀관은 이제 이화의료원으로 성장해 매해 실력있는 여의사들을 배출하고 있다.

 

- 당신이 선택한 이름처럼 당신의 삶은 빛이 됐다.

 

"여성이 관습에 얽매여 자신의 인생을 결정할 수 없는 조선 시대에 여자로 태어난 것도, 이화학당에 들어간 것도 내 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언제나 최선을 다해 살았다. 나중에 내 삶을 선택을 할 수 있었을 때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혼자의 힘으로 외국에 나가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 많은 조선 여성들을 구하기로 한 것도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자부한다."

 

- 당신을 뒤따르는 많은 한국 여성들에 전하고 싶은 말은.

 

"지금의 여성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것을 위해 삶을 헌신한 많은 선각자가 있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역량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세상은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다. 현재를 사는 여성들은 이제 우리의 뒤를 따라올 후배들을 위해 어떤 삶의 모습을 보여줄지를,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어떤 변화를 만들어가야 할지를 꼭 고민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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