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개봉된 풍자 사극 영화 '황산벌'에서 백제 의자왕(오지명 분)은 계백장군(박중훈 분)에게 술을 따르면서 "계백아, 니가 거시기 혀야것다"고 어렵게 말한다. 이 암호 같은 의자왕의 지시를 계백은 잘도 알아듣고 다음 날 부하들에게 명한다. "느그들 나랑 거시기 혀야겄다". 여기서 '거시기'는 '죽을 때까지 싸우라'는 뜻이다. 호남 사투리지만 '거시기'는 어엿한 표준말이다. 맛도 있고 멋도 있는 이 호남 사투리 '거시기' 만큼이나 두루뭉술 애매모호한 말도 없을 것이다.
정부가 자영업자·소상공인 채무를 덜어주는 방안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탕감 방식과 대상을 놓고 정부의 두루뭉술한 '거시기'에 대해 금융권과 지자체가 정확한 입장을 전달해달라고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사실 무슨 뜻인지 알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손해를 면해보겠다는 속내가 보여진다.
아직 세부 조정안은 발표되지 않았지만 '새출발기금'은 정부가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를 통해 원리금 상환이 어려운 '부실 차주'(90일 이상 연체) 및 '부실 우려 차주'(10일 이상 90일 미만 연체)의 부실채권을 사들여 채무를 조정해주는 30조원 규모의 금융지원 제도다. 채무 조정의 핵심은 기존 대출을 장기분할상환 대출로 전환하면서 대출금리를 연 3∼5%로 낮춰주고, 특히 90일 이상 연체한 '부실 차주'의 원금 가운데 60∼90%를 아예 감면해주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2020년 3월 이후 네 차례 상환 연장 조치만 반복했지만 이번에는 상환 능력에 따른 부담 경감·탕감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올해 1월 말 기준으로 금융 지원을 받고 있는 자영업자·소상공인 대출 잔액은 133조 4000억원에 이르고 있다. 현재까지는 연체율이 낮게 나타나고 있지만 만기연장 및 원리금 상환유예가 9월 말 종료되면 부실채권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기 때문에 선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
자영업자들이 코로나 사태라는 초유의 재난으로 극한적 궁지에 몰려 있는 만큼 정부 지원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으로 예금-대출 금리 차가 커져 역대 최대 이익을 낸 은행들도 일정 부분 고통을 공유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도 형성된 분위기다. 하지만 최대 원리금 탕감률 90%와 최대 지원한도 30억원은 화끈한 지원이지만 한도가 지나치게 높거나 크다는 비판도 만만찮다. 채무조정 대상 대출의 목적이 가계대출이었는지 사업자대출이었는지 구별도 하지 않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받기 충분하다.
또 대출 원리금을 제때 갚지 못해 부실화된 채무를 조정하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금융업권별 차주 특성을 무시한채 획일화된 부실 우려 기준을 적용하는 소위 '탁상행정'의 폐해도 우려된다. 은행과 달리 2금융권 차주들은 현금 흐름이 일정하지 않다. 그래서 은행과 달리 90일 이상 연체해야 부실대출로 간주한다. 부실이전 단계를 자산건전성 분류상 '요주의'라고 하는데 2금융권은 차주 특성을 감안하여 30일 이상 연체해야 비로소 부실 우려 단계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10일 이상 연체하면 모두 부실 우려라고 하니 금융권에서 혼란이 일고 있다..
정부의 채무 탕감 방안은 아무리 좋은 취지라도 금융산업의 근간인 신용 질서의 근간을 뒤흔들수 있는 소지가 있다. 연체자라 해도 90%까지 빚을 없애주면 성실히 빚을 갚은 이들과의 형평성 문제와 함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정부는 금융권과 함께 모럴해저드를 최소화할 방안을 정교하게 설계해 시장 신뢰를 높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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