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종근당 본사에서 창업주 고(故) 고촌(高村) 이종근 회장(사진)의 30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그는 제약산업 불모지였던 이 땅에서 국산 의약품의 '국제화'라는 성과를 이뤄낸 불굴의 개척자였다. 직접 개발한 의약품으로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고, 해외 수출을 성사시키며 불가능은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제약인이다. 한국 제약을 향한 세계의 시각을 바꿈과 동시에 국내 제약업계에는 '하면된다'라는 자신감을 심어준 선구자이기도 하다.
종근당 이장한 회장은 "고촌은 '환자의 곁에는 항상 종근당 의약품이 있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국내 제약업계 최초로 중앙연구소를 설립한 참 제약인"이라고 회상하며 "그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인류를 치료할 수 있는 '글로벌 신약'을 반드시 완성하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그의 정신은 깊은 뿌리를 내리고, 세계 6대 강국으로 커나가는 K-제약바이오의 든든한 기반이 되고 있다. 종근당에 남은 자료와 문헌 등을 통해 고촌을다시 만났다.
- 1919년 9월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은 어땠나.
"칡뿌리를 뜯어 팔아 생계를 유지할 만큼 가난한 시절이었다. 나라 잃은 비통함과 가난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컸다. 가족의 생계도 책임 져야했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13살에 처음 서울에 올라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철공소 견습공, 정미소 쌀 배달부 등 생계를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 제약과의 인연은 언제 시작됐나.
"갓 20살, 성인이 되던 1939년 봄이었다. 어머니의 권유로 서울에 있는 한 약방에서 일을 돕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전거를 타고 약을 날랐다. 자전거로 영등포에서 수원을 오가고, 대전에서 개성을 오가는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약품 행상을 하며 '하면 된다'는 신념을 배웠고,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그는 23살이 되던 1941년,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궁본약방(宮本藥房)'을 차렸다. 4평에 불과했던 이 작은 약방은 훗날 연 매출 1조원이 넘는 대형 제약사 '종근당'의 모태가 됐다.
- 궁본약방은 어떻게 열게됐나.
"당시 가진 돈이 15원 뿐이었다. 일수 50원을 빌려 차렸다. 행상을 하며 쌓은 경험, 지식이 도움이 됐다. 장소는 작았지만 우리 국민의 건강을 우리 손으로 지키고 싶다는 꿈을 담은 약방이었다. 2년 후에는 마포와 서대문 지역 약방 경영인들과 서부 약우회를 결성해 점차 기틀을 마련했고 약업인의 길에 본격 들어섰다."
- 위기는 없었나.
"1948년에 물가가 치솟으며 약값도 천정부지로 올랐다. 손해가 커지고 있는 시점에 인상 전 가격으로 공급하겠다는 '활명수'를 덥썩 받아 판 것이 문제였다. 알고보니 가짜 활명수였고, 그 일 때문에 경찰 조사까지 받으며 큰 타격을 입었다. 그 때부터 약을 사서 팔지 말고, 내 손으로 믿을 수 있는 약을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위기는 성장의 발판이 됐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부산에 피난한 이 회장은 가공장을 짓고 '염산에페드린정' '산토닌정' 등의 의약품 생산을 시작했다. 그리고 1956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종근당 제약사'로 회사명을 바꾸고, 해외 선진 제약사로 눈을 돌려 그들의 기술과 전략을 빠르게 흡수했다. 10년여 만인 1965년, 종근당은 아시아 최대 규모의 항생제 원료 합성공장을 세웠다. 국내 첫 성과였다. 1974년에 세운 한국 최대 의약품 원료 발효공장은 당시 11개의 발효조가 모두 가동될 경우 항생제 원료 170톤을 생산할 수 있는 국제적인 수준이었다.
- 항생제에 주목한 이유가 있나.
"1960년대 결핵은 가장 흔하고 치명적인 병이었다. 열악한 환경과 위생, 영양 상태가 결핵을 빠르게 퍼뜨렸다. 6·25 전쟁 직후에는 결핵으로만 하루에 300명씩 죽어나갔다. 수입 약은 있었지만 터무니없이 비싸서 정부도, 병원도 속수무책이었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 전쟁의 폐허 속에 공장을 세웠는데.
"국민의 건강을 수입약이 아닌 직접 만든 약으로 지켜야한다는 신념은 더욱 강해졌다. 송곳은 끝부터 들어간다. 불가능한 환경이었지만 모든 일은 시작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명을 내 이름을 붙인 '종근당'으로 지은 것도 이러한 신념을 끝까지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 일찍부터 세계로 눈을 돌렸는데.
"1961년 외환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제약원료를 수입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97일간 세계 16개국을 돌며 제약사들을 직접 방문하면서, 하루 빨리 제약원료를 자체 생산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됐다. 발효 공장 역시 국내 제약업에 꼭 필요한 숙원사업이었다. 1980년대부터는 외국 선진 제약기업들과 합작해 한국롱프랑제약, 한국로슈, 한국그락소를 세우고 선진화된 제약 기술과 경영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의 노력은 당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성과로 이어졌다. 1968년 고촌이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개발한 항생제 '클로람페니콜'은 국내 처음으로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았다. 그의 가장 독보적인 업적 중 하나로 꼽히는 일이다. 1969년 클로람페니콜은 국내 최초로 일본에 수출됐다. 총 62만 달러로 국내 의약품 총 수출액(110만 달러)의 56%를 차지하는 규모였다. 1970년에는 미국 제약업계 4위인 워너렘버트사에도 수출돼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1980년 자체 기술로 세계 4번째 항결핵제 '리팜피신'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당시 종근당의 수출이 가져온 수입대체 효과는 900만 달러에 달했다.
- FDA 승인은 지금도 쉽지 않은 일인데.
"당시 세계적으로도 FDA의 승인을 얻은 제약회사는 미국 외에 100개 정도에 그쳤다. FDA 승인을 얻으려면 미국의 상위 제약회사에 견줄만한 기술수준을 갖춰야한다는 선행조건이 있었다. 도전조차 무모하게 여기던 시절이었고, 정부 역시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국산 신약도 세계에서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고, 선진국 제약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 1972년 업계 최초로 중앙연구소를 설립한 것도 그 때문인가.
"그동안 터득한 기술을 기초로 우리가 독자적으로 개량도 하고 개발도 해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판단함과 동시에 철석 같은 신념으로 이를 마음 속에 굳혔다. 실제로, 젊은 약학도, 화학도들의 연구는 밤낮 없이 이어졌다. 이들을 뒷받침하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신념의 열매를 거둘 수 있다고 확신했다."
국민을 위해 약을 만든 고촌의 마음은 젊은 인재들에게로 이어졌다. 그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업을 잇지 못하는 불공평한 일은 없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1973년 개인사재를 털어 '고촌재단'을 설립했다. 고촌재단은 지금까지도 대학생들에 장학금과 무상 기숙사를 지원하고 , 학술연구 지원, 해외동포 국내외 연수 등 다양한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고촌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86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했다.
- 사회 환원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기업에서 얻은 많은 이익을 사회와 국가를 위해 유익하게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돈을 벌어 내가 잘 되고 내 집안이 잘 되고 내 이웃이 잘 되고 내 나라가 잘 되게 하려는 목표를 늘 세웠다. 나는 잘 된 셈이고 내 집안도 잘 된 셈이니, 내 이웃이 잘 되어야 할 차례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고촌은 1993년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뜻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2006년 결핵퇴치를 위해 노력했던 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고촌상'이 제정됐다. 고촌상은 고촌재단과 UN 산하 결핵퇴치 국제협력사업단이 제정한 한국 제약사상 최초의 국제적인 상이다. 그가 불모지에 심은 '신약 개발'의 꿈은 지금도 자라나고 있다. 70년대 세운 중앙연구소는 1995년 종합연구소, 2011년 효종연구소로 개편되며 2003년 항암제 신약 '캄토벨'과 2013년 당뇨 신약 '듀비에'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 덕분에 한국의 제약산업은 이만큼이나 발전했다.
"나는 독립운동에 공이 있는 애국자도 아니며 위대한 정치가도 아니다. 그렇다고 국가 경제 신장에 크게 이바지하여 기간산업을 여러 개 거느린 그룹 총수도 아니다. 다만 제약업 하나에 매달려 한 평생 살아가고자 하는 신념이 있었을 뿐이다. 건전한 기업활동과 우수의약품의 개발을 통해 국민건강을 증진하는 것만이 약업보국의 사명을 완수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 신약 개발의 꿈을 이뤄가고 있는 후세를 위한 조언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만든 약이 필요로 하는 사람 곁에 항상 있도록 하는 사명을 지녀야 한다. 제약업은 타종 기업보다 윤리성과 사회성이 더 중시되고 강조되어야 한다. 생명을 다루는 과학인 것이다. '한 알의 약이 한 인간의 생명을 좌우한다'는 엄청난 사명 앞에 어찌 한치라도 경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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