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민심이 심상치 않았다. 평소 정치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에 관심 많은 사람들의 반응이 아니어서 더 심각했다.
이번 연휴에 모처럼 만난 지인과 그 가족들은 이공계 연구 분야에 종사하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의 입에서 정권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올 줄은 몰랐다. 그는 "연구개발 비용이 엄청 삭감돼 사무실이 초상집 같다"며 "연구원들이 마치 '이권 카르텔'의 범죄자 취급을 받아 더 기분 나쁘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과거 문재인 정부 당시, 이전 박근혜 정부의 문제를 '적폐'로 몰았던 것처럼 윤석열 정부도 문재인 정부의 사사건건을 적폐에서 '이권 카르텔'로 프레임만 바꿨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년도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이 어떤지 살펴봤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지난 1991년 이후 33년 만에 R&D 예산이 삭감됐다는 점이었다. IMF 외환위기나 2008년 금융위기, 코로나19 팬데믹 때에도 R&D 예산은 줄이지 않았는데 무려 33년 만에 관련 예산을 줄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가 R&D 예산은 '주요 R&D 예산'과 '일반 R&D' 예산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주요 R&D 예산이 80%를 차지하는데, 내년도 주요 R&D 예산은 올해보다 3조4500억원 가량 줄어든 24조5000억원이 배정될 예정이다. 전체 국가 R&D 예산도 31조1000억원에서 25조9000억원으로 5조2000억원 가량 줄어들게 된다.
한국은행의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이 3.5%인 점을 감안하면, 체감 폭은 더 커질 수 있다.
내년도 국가 예산 가운데 사실상 R&D 예산만 줄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우리나라의 국가 예산은 대략 12가지 분야로 나뉜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전년 대비 예산이 줄어드는 분야는 교육, R&D 그리고 일반·지방행정 등 세 분야다. 일반·지방행정 분야는 0.8% 줄어들어 사실상 제자리다. 교육(-6.9%)과 전체 R&D(-16.6%) 두 분야에서 예산이 대폭 줄었다.
국가 R&D 예산이 줄어든 건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부터 시작됐다. 윤 대통령은 지난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 베이스(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R&D 예산에 대한 재검토를 주문했다. 이후 감사원이 과기부를 비롯한 11개 기관에 감사관을 보내 현장감사를 실시한 뒤 R&D 예산 삭감 분위기가 감지됐다.
여당도 시민단체선진화특별위원회를 만들어 바람몰이를 했다. 박성중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정부에서 R&D 예산이 4년 동안 10조원 이상 증가했다. 전반적인 비효율 등으로 소위 카르텔로 지목될 수 있는 사례들이 많이 나타났다"며 윤 대통령의 발언에 힘을 실어줬다.
졸지에 여러 정부 산하기관이나 연구단체 등에서 연구개발에 매진하는 연구원들이 카르텔의 범죄자 취급을 받게 된 셈이다.
국가 R&D 예산 감축 후폭풍은 당장 나타나고 있다. 예산이 줄어든 교육기관이나 연구기관에서 가장 손쉽게 예산을 깎을 수 있는 인건비부터 줄이고 있다. 그 대상은 고급 연구원들이 아니라 이제 연구원 생활을 시작하는 사회초년병들이다. 과거의 '이권 카르텔'은 이들의 잘못이 아닌데, 구세대의 잘못을 신세대들이 뒤집어쓰게 생겼다.
더군다나 이들은 앞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R&D의 미래'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했는데, 백년은커녕, 당장 연구비가 삭감되고 기본적인 생활도 힘들게 만들고 있으니 대한민국의 앞날이 암울하게 됐다.
정부의 이번 결정이 국민과의 소통이나 공감대 형성 없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군사작전 하듯이 전격적으로 진행됐다는 점도 아쉽다. 과거에는 이런 방식이 통했을지 몰라도 지금 세상에서는 또 다른 '불통'을 낳는다. 그 민심은 언젠가 표심으로 나타날 수 있다. 누군가의 생존을 위협하는 정책일 수 있는데, 보다 현명하고 슬기롭게 처리하는 지혜가 없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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