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후밀 흐라발 지음/이창실 옮김/문학동네
인간은 시간의 힘에 짓눌려 소멸하지만, 고전은 세월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시간의 압력을 견뎌내며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설령 책이 불에 탄다 하더라도 고전은 불사조처럼 재 속에서 부활한다. 검은 잿더미는 거름이 돼 나무에 흡수되고, 이는 다시 고전의 뼈와 살이 될 재료로 쓰인다. 체코의 국민작가로 불리는 보후밀 흐라발이 쓴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고전의 저력을 보여주는 명작이다.
폐지 압축공인 주인공 한탸는 소설의 제목처럼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속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의 동료는 말 없는 기계 한 대. 한탸는 압축기와 함께 매일 머리 위로 쏟아지는 폐지와 씨름한다. 한탸가 압축기로 사형 선고를 내리는 종이 중에는 그가 사랑해 마지 않는 책들이 껴 있다. 겉으론 잔잔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그 누구보다도 시끄럽기에 그의 인생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폐지 압축공으로 일하며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한탸는 자신의 업에 대한 죄의식을 갖게 된다. 그가 숭배하는 대상인 책('파우스트', '돈 카를로스', '히페리온',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을 파괴하는 일로 돈을 벌기 때문이다. 한탸는 고기 싼 종이에 말라붙은 피를 빠는 파리처럼, 책에 얼굴을 파묻고 괴테, 실러, 횔덜린, 니체의 사상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인다. 그는 자신의 직업이 썩 맘에 들진 않지만, 책에 푹 빠져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여행하는 황홀한 경험을 낙으로 근근이 살아간다.
손에 책만 쥐여주면 행복해하는 단순한 인간, 한탸에게도 존재의 위기가 찾아온다. 그의 압축기 20대 분량의 일을 해내는 거대 기계가 등장한 것. 수압 압축기가 있는 작업장을 찾은 한탸는 기계를 보고 금세 겁에 질린다. 그는 저 거대한 압축기가 자신과 같은 늙은 압축공들을 몰아낼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한다.
작업장을 둘러보던 한탸는 노동자들이 손에 낀 장갑을 보고 모욕감을 느낀다. 그는 종이의 감촉을 더 잘 느끼고 두 손 가득 음미하기 위해 절대로 장갑을 끼지 않았는데, 이곳에선 그런 기쁨에, 폐지가 지닌 비길 데 없이 감각적인 매력에 아무도 마음을 두지 않았다.
책 속에서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찾겠다는 열망으로 그가 종이 더미에서 구해낸 장서들과 함께 한탸는 자신의 생이 끝장났음을 깨닫는다. 결국 그는 폐지가 가득한 압축통에 자신의 몸을 넣고 녹색 버튼을 누른다. 압축통 벽에 눌려 다리와 턱이 들러붙고, 책의 단면이 한탸의 늑골을 뚫고 들어온 마지막 순간, 그는 자신이 감탄했던 탈무드의 구절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올리브 열매와 흡사해서, 짓눌리고 쥐어짜인 뒤에야 최상의 자신을 내놓는다." 144쪽. 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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