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력을 제공하고 얻은 임금으로 생활하는 사람을 노동자라 부른다. 법적으로는 자본가와 대등한 입장에서 노동 계약을 맺는 이를, 경제적으로는 생산 수단을 일절 갖지 않고 자기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삼는 이로 규정한다.
예술가도 노동자다. 작품제작을 위해 노동력을 투자하고 그 노동력을 통해 여러 유무형의 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다만 예술가의 노동 가운데 절반은 사유하는 노동이요 추상적 노동이다. 다른 절반은 실질노동자로서의 노동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정의해온 노동과는 달리 노동의 사회적 의미와 역할을 되묻는 노동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의 삶을 예술노동으로 빚는 건 어떤 노동일까. 그것은 노동자로써의 예술가를 수면 위로 표상화 하는 노동이면서, 공동체 속 노동(자)의 현주소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하는 노동이다. 동시에 그 노동 자체로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창조하는 실천적 노동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을 관통하는 작업 중 하나가 고(故) 구본주 작가의 <지나간 세기를 위한 기념비>(2001)이다.
서울시 영등포구 홈플러스 영등포점에 위치한 이 공공미술 작품은 모란미술관이 제정한 제1회 모란미술상(1995)을 받은 <이대리의 백일몽>의 후속 버전으로, 동판을 두드려 인체조각을 만드는 작가 특유의 기법으로 제작된 여러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육중한 철판 같은 현실에 치여 어느 덧 잊힌 꿈의 부재를 묘사한 <배대리의 여백>(1993)이나 희망 없는 소외를 다룬 <파고다 공원에 파랑새는 없다>(1992)와도 맞닿아 있다.
내용은 예술 노동자가 바라본 노동자들의 위태로운 삶이다. 12미터 길이의 곡선형 스테인리스 스틸 구축물 위에 튕겨나가듯 서 있는 이 작품의 주인공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직장인이다. 아슬아슬하게 작은 발판을 디디고 있는 형상과 구도에서 그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오늘을 읽을 수 있다.
이 밖에도 더 있다.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을 계기로 시작된 샐러리맨 연작을 포함해 노동자의 권리와 인간성 해방을 다룬 소품 군상인 <파업>(1990) 시리즈, IMF시기 언제 회사에서 잘릴지 몰라 초조해하며 눈치를 봐야했던 직장인들의 일상을 담은 <눈칫밥 삼십년>(1999) 등이 그렇다. 삶의 애환이 서린 사람들, 소주 한잔을 걸친 채 집으로 향하는 우리네 소시민들의 인생을 녹여낸 작업들이다.
불의에 맞서 죽창을 치켜든 농민을 새긴 <갑오농민전쟁>(1994)도 같은 선상에 있다. 조선 시대 지배계층에 대한 농민 주축의 최대 항쟁으로 기록된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한 이 작품은 노동자를 그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척박하게 살아가는 농민의 삶을 시대사와 엮어 강렬하게 풀어낸 걸작으로 꼽힌다.
이처럼 구본주가 주목한 것은 대체로 우리 역사와 보통사람들의 메마른 삶이었다. 고달프고 가난한 이들, 자본주의의 그늘 아래 힘없이 웅크려 있으나 새날이 오기를 포기하지 않은 나와 너, 운명처럼 살아가고 있는 노동자들과 가장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옮기는 것이 그에겐 중요한 일과였다.
이는 사실 노동자 계급성의 문제이자, 민중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안타까움, 경애에 관한 문제였다. 즉, 예술로서 노동이라는 인간의 존엄한 본성에 족쇄를 채우는 자본의 힘에 맞서며 서민들의 거친 삶과 일상의 주름을 어루만지고자 했던 것이다.
탁월한 예술노동으로 노동예술을 일구며 예술이라는 사회적 비석을 새긴 구본주는 2003년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그때 나이 서른일곱, 너무 빨리 하늘의 별이 됐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의 유작 제목도 <별이 되다>(2003)이다. 형광폴리코트로 떠낸 1000개의 작은 샐러리맨 조각을 천장에 매달아 하늘의 별처럼 우러러보게 만든 설치작품이다. 그렇게 구본주는 작품 속에서처럼 우리 곁을 떠나 진짜 별이 되었고, 그의 예술은 여전히 우리를 올려다보게 한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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