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한별 지음/위고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는 '밀크맨'으로 제14회 유영번역상을 받은 홍한별 작가가 말하는 '번역의 기쁨과 슬픔'을 다룬 책이다. 첫 장에서 작가는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통해 번역이 왜 어려운 일인지를 설명한다. 모비 딕은 에이해브 선장이 자신의 한쪽 발을 앗아간 흰 고래에게 복수하는 간단한 줄거리의 소설이지만, 장장 135장(章)의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에이해브 선장은 책의 4분의 1지점이 돼서야 비로소 고래 뼈로 만들어진 의족을 딛고 등장하고, 모비 딕은 133장까지 가야 흰빛을 번뜩이며 나타난다.
'고래의 흰색'이란 제목이 붙은 책의 42장은 에이해브 선장이 추적하는 고래가 하얗다는 점을 파고든다. 소설의 화자 이슈메일은 흰색이 주는 섬뜩한 공포감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무서운 절멸감으로 우리의 등을 찌르는 것은 그 색깔의 막연한 불확정성이 아닐까? 흰색은 본질적으로 색깔이라기보다 눈에 보이는 색깔이 없는 상태인 동시에 모든 색깔이 응집된 상태가 아닐까? 넓은 설경이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공백이지만 그렇게 의미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까?"
저자는 '흰 고래는 흰색처럼 모든 것을 표상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 공허'라고 말한다. 홍 번역가의 해설을 읽다가 이란의 시인 파리드 우딘 아타르가 쓴 시 '새들의 회의'가 떠올랐다. 작품에서 새들은 자기들이 사는 마을에 새들의 왕 '시무르그'가 떨어뜨린 깃털을 발견하고 전설 속 신성한 새를 찾아 기나긴 여행을 떠난다. 갖가지 고생 끝에 새들은 시무르그가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닫게 된다.
결국 에이해브 선장이 찾던 '흰 고래'와 새들이 찾아 헤맨 '시무르그'의 궁극적 실체는 '무(無)'였던 것일지 모른다. 모비 딕은 얼핏 끝없는 추적의 대상으로 보이지만, 실은 고래를 집요하게 쫓는 에이해브의 광기 속 그 자신이다. 시무르그 역시 여정의 끝에서 새들 자신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흰 고래를 통해 신(神)적 실체에 다가갔던 에이해브는 경이로움과 동시에 허무를 느끼고, 신일합일(신과 하나됨)을 꿈꾸던 새들은 길의 끝에서 '자아의 소멸'을 경험한다. 궁극의 진리를 마주하는 건 존재가 무너지는 체험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두 이야기는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저자는 "번역을 시도한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흰 고래 같은 텍스트를 만나게 된다"며 "잡히지 않는 공허, 포착할 수 없는 의미, 붓질을 더할수록 더럽혀지기만 하는 순백.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번역은 얼마나 투명해져야 하는가"라고 한탄한다. 272쪽.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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