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하면 패가망신"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말이다. 목돈은 은행 예금에 묻어두는 것이 미덕이었고, 은행에만 돈을 맡기는 '예금 바보'라는 말까지 나왔던 나라다. 그랬던 한국 투자자들이 달라지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가계가 보유한 금융자산 가운데 예금·현금 비율이 지난해 43%로 떨어졌다. 이대로면 올해 안에 40%선도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 저축 중심이던 한국 가계의 자산 배분 공식이 바뀌고 있다는 신호다.
디플레이션(물가 하락) 시절엔 현금을 쥐고 있는 게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물가가 오르기 시작하면 계산식이 달라져야 한다. 가만히 두면 돈의 실질 가치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 환경에선 '안전하다'고 믿었던 예금이 사실상 가장 위험한 선택이 된다. 특히 코스피가 8000을 넘어 1만 시대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투자가 미덕'이 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증시, 부의 증식장
'불장'에 증시로 자금이 쏠리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말 시중은행 정기예금 가운데 잔액 1억원 이하 계좌 수는 2162만 9000좌로 6년 반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해당 예금 총액도 299조 7090억원으로 1년 전보다 2.2% 감소했다. 개인 투자자 자금이 예금에서 빠져나와 주식 등 투자로 이동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한은에 따르면 가계 금융자산에서 현금·예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3년 약 45%대 중반에서 2024년 46% 안팎까지 상승하며 정점을 형성했다. 그러나 불장이 시작된 이후인 지난해엔 약 43% 수준으로 내려오며 감소 전환했다. 불과 1년 사이 3% 포인트 이상 낮아진 것으로, 주식·펀드 등 위험자산으로 자금이 이동한 영향으로 풀이된다. 최근에는 40% 붕괴가 시간문제라는 관측까지 나온다.
지난 3월 통화량이 단기 금융상품과 기업 예금을 중심으로 18조원 넘게 늘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3월 평균 광의 통화량(M2 기준·평잔)은 4132조1000억원으로 전월보다 18조5000억원(0.4%) 증가했다. 지난해 11월 이후 5개월 연속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 증시 활황으로 단기 대기성 자금이 불어나며 머니마켓펀드(MMF)가 증가한 영향으로 풀이된다.
이 같은 흐름은 코스피 7000선에 이어 8000선을 넘어서면서 더욱 뚜렷해졌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코스피가 7000선을 기록한 지난 6일 기준으로 주식 대기자금인 투자자 예탁금은 사상 첫 130조원(130조7433억원)을 넘어섰다. 이른바 '빚투'(빚내서 투자)인 신용융자 잔고는 22일 36조3555억원으로 불어났다.
5대 은행의 개인 마이너스통장 잔액도 지난 7일 기준 40조5029억원으로 4월 말보다 7152억원 증가했다.
◆ 예금에서 증시로…시중자금과 빚투가 동시에 몰린다
이번 상승장의 또 다른 축은 시중자금의 이동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상호금융권 수신잔액은 지난해 말보다 15조원 넘게 감소했다. 5대 은행의 정기예금 잔액도 지난해 말보다 2조1029억원 줄었다. 반면 투자자예탁금은 지난 13일 기준 137조1201억원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예금에 머물던 자금이 증시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와 함께 레버리지 투자도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신용거래융자 잔고는 지난 12일 기준 36조2677억원으로 집계됐다. 한 달 전보다 9.2%, 연초 대비 32.3% 급증했다. 신용거래융자는 투자자가 증권사에서 주식 매수 자금을 빌린 뒤 아직 상환하지 않은 금액으로, 개인투자자의 대표적인 '빚투' 지표다. 5대 은행의 개인 마이너스통장 잔액도 지난 7일 기준 40조5029억원으로 4월 말보다 7152억원 증가했다.
이번 '불장'에 주목할 점은 빚투의 중심이 젊은 투자자뿐 아니라 중장년층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김상훈 국민의힘 의원실이 금융감독원에서 받은 상위 10개 증권사의 연령대별 신용융자 잔액 현황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전체 신용융자 잔액 약 27조2000억원 가운데 50대 이상이 차지한 비중은 62.3%에 달했다. 50대 잔액은 8조9762억원(32.9%), 60대 이상은 8조189억원(29.4%)으로 각각 전년보다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은퇴자금과 예금성 자금까지 상승장에 적극적으로 유입되고 있다는 의미다.
강세장에서 시니어 투자자들의 수익률은 높았다. 미래에셋증권에 따르면 100만원 이상 보유 고객 계좌의 올해 수익률은 50대가 36.77%로 가장 높았고, 60대 이상도 36.35%를 기록했다. 하지만 과거 사례를 보면 레버리지가 반드시 높은 수익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자본시장연구원 김민기 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신용거래융자가 급증했던 2020년 3월부터 10월까지 신용융자를 활용한 개인투자자 가운데 수익을 낸 비율은 33.5%에 불과했고, 나머지 66.5%는 오히려 손실을 봤다.
주가가 하락할 경우 반대매매 위험도 커진다. 실제로 지난 3월 초 중동전쟁 여파로 증시가 급락했을 당시 하루 반대매매 금액은 1084억원으로 지난해 일평균 48억원의 22배까지 치솟았다. 금융당국도 투자 쏠림 확대를 주시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이달 말 출시 예정인 삼성전자·SK하이닉스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와 관련해 투자자 교육과 자금 흐름 모니터링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상승장에서는 레버리지가 수익률을 높이지만, 조정장에서는 변동성을 증폭시키는 가장 직접적인 통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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