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안보 부각 속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
LNG·SMR·배터리로 성장축 확대
SK이노베이션이 정유 중심 에너지 기업에서 전기와 가스, 배터리를 아우르는 종합 에너지 기업으로 체질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인공지능(AI)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고 에너지 안보 중요성이 커지면서 석유제품 수출과 정유 수익성에 기대던 기존 사업 구조를 LNG, 소형모듈원전(SMR), 배터리·에너지저장장치(ESS) 등으로 넓히고 있다. 다만 정유 부문에는 유가와 정제마진 변동에 따른 불확실성이 남아 있고 배터리는 아직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전환의 성과를 입증해야 하는 과제도 남아 있다.
◆정유가 벌고 에너지 전환에 투자
SK이노베이션의 올해 1분기 실적은 정유 사업이 이끌었다. SK이노베이션은 1분기 매출 24조2121억원, 영업이익 2조1622억원을 기록했다. 매출은 전 분기보다 4조5408억원 늘었고 영업이익은 1조8669억원 증가했다.
실적 개선에는 정유 사업을 담당하는 SK에너지의 수익성 회복이 크게 작용했다. SK에너지는 1분기 매출 11조9786억원, 영업이익 1조2832억원을 거뒀다. 유가 상승에 따른 재고 관련 이익과 수출 여건 개선이 영업이익 증가로 이어졌다.
울산CLX를 중심으로 대규모 정제·생산 설비를 운영하는 SK이노베이션은 국내 생산기지를 기반으로 해외 수요에도 대응하고 있다. 석유제품 수출은 국내 정유사의 주요 수익원 가운데 하나다. 대한석유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정유 4사의 석유제품 수출액은 원유도입액의 59.5% 수준에 달했다. 호주는 4년 연속 최대 수출국을 차지했고, 미국향 수출은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정유 사업에서 확보한 현금창출력은 LNG와 SMR, 배터리·ESS 등 미래 에너지 사업으로 포트폴리오를 넓히는 기반이 되고 있다. 정제·수출 경쟁력을 바탕으로 단기 실적을 방어하는 동시에 에너지 사업 구조 전환에 필요한 투자 여력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최근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지정학적 긴장이 커지면서 원유 도입과 내수 공급 안정성도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해외 수요에 대응하는 수출 경쟁력뿐 아니라 국내 에너지 공급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유가 변동에 따른 수익성까지 관리해야 하는 부담이 커지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정유 사업은 SK이노베이션 실적을 떠받치는 핵심 축이지만 국제 유가와 지정학적 변수에 민감한 구조를 갖고 있다"며 "수출 확대와 함께 원유 조달 안정성, 내수 공급 대응력, 미래 에너지 투자 재원 확보를 함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LNG·SMR로 넓어지는 에너지 포트폴리오
SK이노베이션의 체질 전환은 LNG에서 먼저 가시화됐다. SK이노베이션 E&S는 호주 바로사 가스전에서 생산한 첫 LNG 물량을 국내에 들여왔다. 바로사 프로젝트를 통해 앞으로 20년간 연 130만t 규모의 LNG를 확보할 예정이다. 이는 국내 연간 LNG 수입량의 약 3%에 해당하는 물량이다.
해외 발전 사업에서도 성과를 올리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베트남 응에안성 뀐랍 지역에서 추진하는 LNG 복합화력발전 및 터미널 개발 사업의 최종 사업자로 선정됐다. 이 프로젝트는 1.5GW급 LNG 복합화력발전소와 LNG 터미널을 건설하는 사업으로, 총투자비는 23억달러(약 3조3000억원) 규모다. 상업운전 목표 시점은 2030년이다. 정유 중심 기업이 LNG 밸류체인을 해외 발전 인프라로 확장하는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SMR 투자도 에너지 사업 구조 전환 과정에서 추진되는 핵심 분야다. SK이노베이션은 SK㈜와 함께 2022년 미국 테라파워에 약 2억5000만달러를 투자해 2대 주주 지위를 확보했다. 테라파워는 빌 게이츠가 설립한 차세대 원전 기업으로 미국 와이오밍주 케머러 지역에서 첨단 원전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테라파워는 올해 3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로부터 케머러 1호기 건설 허가를 받았다. 이번 허가는 미국에서 약 10년 만에 나온 상업용 원전 건설 허가이자 비경수로 상업용 원전 건설 허가로는 40여년 만의 사례로 평가된다. 케머러 1호기는 2031년 완공 및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SMR 투자는 단순한 재무적 투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AI 데이터센터와 첨단 제조시설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구조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전력 공급원 확보는 에너지 기업의 새로운 성장 기반이 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이 정유와 화학에서 확보한 현금창출력을 전력 인프라 영역으로 넓히려는 것도 이런 변화에 대응하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배터리·ESS, 적자 넘어 전력 수요로 연결
배터리는 SK이노베이션의 미래 에너지 전환을 상징하는 사업이다. 배터리 자회사 SK온은 미국, 헝가리, 중국 등에 생산기지를 두고 글로벌 완성차 업체에 배터리를 공급하고 있다. 전기차 수요 둔화와 보조금 불확실성으로 수익성 개선은 더디지만 전력망 안정화와 재생에너지 확대, AI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맞물리면서 ESS가 새로운 성장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SK온은 올해 국내 제2차 중앙계약시장 ESS 입찰에서 전체 565MW 가운데 284MW를 확보하며 50.3%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전기차 배터리 중심의 사업 구조를 ESS로 넓히며 중장기 성장 기반을 다지는 흐름이다.
AI 시대의 핵심은 결국 전기화다. 데이터센터는 전력을 쓰고 전력망은 저장장치를 필요로 하며 안정적인 전원 확보 없이는 AI 인프라도 지속되기 어렵다. SK이노베이션이 LNG와 SMR, 배터리·ESS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는 것도 이 같은 전력 수요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평가된다.
업계 한 관계자는 "AI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빠르게 늘면서 에너지 기업의 경쟁력도 단순한 정유·화학 사업을 넘어 전력 공급과 저장 역량으로 확대되고 있다"며 "SK이노베이션 역시 정유를 기반으로 LNG와 SMR, 배터리·ESS를 연결하는 에너지 포트폴리오를 구축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는 각 사업의 성장성을 안정적인 수익으로 연결할 수 있느냐가 기업가치를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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