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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정부' 통한 성장..예산안 통과, 본격 시동거나

문재인정부의 내년도 예산안이 6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큰 정부'를 통한 성장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리게 될 지 관심이 모아진다. 비록 야당인 자유한국당이 지난 4일 여야3당 원내대표 협상 끝에 도출한 '잠정 합의문' 내용을 부정하며 '반쪽 본회의'를 통해 통과되긴 했지만, 예산안이 통과된 이상 정부의 정책 드라이브에는 탄력이 붙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특히 이번 예산안 협상 과정에서 여야가 핵심 쟁점으로 삼았던 공무원 증원 규모,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일자리안정자금, 법인세 인상 등이 기존 정부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정부의 정책에 무리가 없을 것을 예상되기 때문이다. 우선 공무원 증원 규모를 보면 정부가 제시했던 내년 1만2200명을 증원 규모는 9475명으로 2725명 줄이는 수준에 그쳤다. 이 정도의 증원 규모는 정부의 원안에 담긴 효과보다는 다소 떨어지겠지만, 정부의 경제기조인 '소득주도성장'의 물꼬를 트기에는 충분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로 야당인 국민의당은 예산안 협상과정에서 공무원 증원 규모는 9000명이 적당하다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일자리안정자금의 경우에도 이번 예산안 통과로 인해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 정책을 진행하는데 있어 '저항'을 최소화하고, 다음 단계의 정책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당초 정부가 제시했던 것처럼 일자리자금으로 약 3조 원(2조9707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면서 최저임금 정책에 대한 기업들의 불만을 해소할 수 있게 됐고, 정책 시행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또한 법인세 인상, 소득세 인상, 아동수당 도입, 기초연금 인상 등도 통과되면서, 우리 사회 구조적 차원의 큰 변화가 시작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러한 변화의 핵심은 정부 주도의 성장 즉, '큰 정부'를 통한 성장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대선 과정부터 정부 주도의 소득주도성장 모델을 강조해왔다. 1호 공약인 '공공일자리 81만 개 달성, 임기 내 공무원 증원 17만9000명'도 이 모델의 맥락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보수 진영에서 주장하는 시장 주도형 성장 모델은 현재의 청년 실업, 경제성장, 양극화 등 지표들을 통해 적합한 모델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됐다는 것이 지난 대선 기간 동안 토론회 등을 통해 밝힌 문 대통령의 생각이다. 이미 기형적인 모양을 띄고 있는 시장 상황에서는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으며, 적극적인 정부 개입을 통해서만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밝혀 온 적극적인 정부 개입은 시장 압박, 규제 강화 등 시장 위축을 야기시키는 방법이 아니라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만들고, 더불어 국민 소득을 높여 국가 경제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자는 것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구상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대통령선거가 급작스레 진행됨으로써 지난 몇 달간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보수 진영의 반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새로운 정책 시행에 필요한 예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22일 11조300억 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이 편성되기는 했지만, 새 정부의 정책을 온전히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때문에 이번 예산안 통과는 제대로 된 새 정부 정책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문 대통령의 선거 캐치프레이즈였던 '나라다운 나라' 만들기의 출발점이 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2017-12-06 05:3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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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찐빵

내 눈이 변덕스러운 걸까? 한동안 단풍 풍경에 젖어 있던 내 시선은 얼마 전부터 뜨뜻한 김이 모락거리는 것들에 자꾸 쏠린다. 가을철 내내 눈에 띄지 않던 뜨끈한 어묵과 가락국수에 시선이 오래 머문다. 찬바람이 몹시 불던 날, 색 바랜 낙엽이 펄펄 내리던 가로수 길옆 찐빵 집도 허연 김을 퍼내고 있었다. 계절 대목을 맞아 후끈 달아오른 커다란 양은솥! 입이 함지박만 해진 아주머니가 솥뚜껑을 열어젖히자 뜨거운 김이 확 밀려오는 게 찐빵이 저토록 뽀얗다. 솔직히 찐빵의 맛 차이를 잘 모른다. 부드러운 팥소와 쫄깃한 식감을 내는 비법이 어쩌고 저쩌고 해도 내겐 이 세상 모든 찐빵이 다 맛있다. 어쩌면 추억의 맛으로 먹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추억의 찐빵에는 포만감, 웃음, 친구, 이웃, 이야기 같은 질료들이 버무려져 있다. 아련한 이런 추억이 행여 잊힐세라 그 흔한 찐빵이 늘 허기진 모습으로 다가온다. 뜨거운 김이 풀풀대는 찐빵! 한입 가득 베어 물면 열기가 입안을 훅하고 퍼지며 잠자던 추억이 깨어난다. 예닐곱 살 때였을 것이다. 낙엽이 뒹굴던 신작로 옆 공터에 무슨 잔치가 열렸더랬다.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꽤 많았던 걸 보면 결혼식 피로연 같기도 하다. 복닥거렸다. 가마솥이 대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은 개중 하나에 꽂혔다. 두 개의 돌 위에 걸려 있는 거무죽죽하게 그은 가마솥! 투박한 솥은 마치 기차가 먼 길을 달려와 이제 막 종착역에 도착한 것처럼 숨을 고르며 수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아이들은 솥뚜껑 개봉을 기다리며 침을 꼴딱거렸다. 드디어 솥뚜껑이 열리자 자욱한 김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수년 전 새벽녘 잔잔한 호수 위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물안개를 바라보며 그 김이 오버랩이 됐다가 사라짐을 느꼈다. 김이 모락거리던 찐빵은 아이들 마음만큼 부풀어 있었고, 아이들 수만큼 많았다. 하얗고 둥그스름한 게 어른 손바닥 크기만 했다. 때 묻은 손에 고스란히 전해진 찐빵. 그 뜨거운 찐빵은 식을 때까지 손바닥 위에서 공중제비를 해야 했지만, 호호 불어가며 맛있게 먹던 기억이 아련하다. 꿀맛이었다. 눈빛마다 포만감과 행복감이 그렁거렸다. 그 눈빛들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시절엔 그랬다. 먹을 게 넘쳐나는 요즘 세태는 맛 표현을 입으로 하지만 그 시절엔 눈빛으로 말했더랬다. 누군가 맛있니? 물어오면 아이들은 안달이 난 그 궁금증까지 속으로 삼켰다. 맛있다! 소리만 들어도 덩달아 배부를 것 같은 그 감탄조의 느낌 한마디를 애써 표출하려 들지 않았다. 먹을 게 귀하던 시절엔 그렇게 하는 것이 상대에 대한 배려이고, 미덕이라고 배웠다. 그건 옳은 얘기이기도 했고, 그른 판단이기도 했다. 느낌표가 그렁거리는 그 눈빛이 대놓고 맛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어찌 표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외려 그 느낌표에 담긴 맛을 캐내느라 더욱 꼴딱거려야 했던 시절이었다. 요즘 들어 찐빵 냄새가 그렇게 향수를 자극할 수가 없다. 한입 베어 물 때 풍겨오는 찐빵만이 지닌 독특한 냄새, 어릴 적에 이게 뭐지? 킁킁거렸던 밀가루 익은 냄새다. 찐빵을 먹을 때마다 그 냄새를 더듬곤 한다. 추억을 먹는 것이다. 한갓진 시골길을 걷다가 찐빵 집이 불쑥 나타나면 반갑고 고맙다. 걸음을 떼지 못한다. 김이 모락거리는 낡은 양은솥이 정겹게 다가온다. 동네 아이들이 그곳에서 수런댄다면 왠지 낯설지 않는 이야기가 꽃필 것만 같다. 야! 뜨끈한 찐빵이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배고팠나보구나 한 개 더 줄 테니 뜨뜻할 때 많이 먹어 하는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이어질 것이다. 겨울 무드로 가는 길목에서 만나게 되는 찐빵 집은 언제나 이런 추억의 날개를 펼치게 한다.

2017-11-29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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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눈 내리는 날

첫 눈은 과연 내렸을까? 안 내렸을까? 엊그제 서울지역의 첫 눈이 화제가 됐다. 그 진위를 둘러싸고 청춘 남녀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더랬다. 국지적으로 옮겨 다니며 흩날리다 이내 종적을 감추니 무슨 용빼는 재주로 눈의 신출귀몰을 따라잡을까. 목격담은 무성했고, 궁금증은 증폭됐다. 하얀 눈발이 날리는 날 만남을 약속한 청춘들은 서울기상관측소 분석원의 입을 쳐다봐야 했다. 그곳 송월동에서 관측되는 값이 공식 기록이니 그 판정을 기다려보자는 거였다. 기상청은 눈을 부릅떠야 했고, 맨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첫 눈 강림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지난해 보다 아흐레 빨랐으며 평년 대비 나흘 일찍 내렸다고 공식 발표했다. 논쟁은 곧 마침표를 찍었고, 그 발표 이후 청춘 만남은 얼마나 성사됐는지? 기상청이 이런 궁금증까지 일일이 확인해줄 수야 없지만 논쟁이 뜨거웠던 만큼 부지기수였을 터다. 첫 눈은 비단 청춘들의 낭만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남녀노소 누구든 눈마중에 대한 감정이 비슷하다. 모든 가슴에 내린다. 눈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처음부터 계산에 두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해맑은 얼굴로 불쑥 찾아오는 깜짝 이벤트. 가슴 깊숙한 곳에 조용히 다가와 속삭여줄 것 같은 밀어. 차갑고 아린 곳을 따스하게 덮어주는 어떤 마음. 권위주의적 의식 없이, 가식 없이, 욕심 없이 순백으로 다가오는 어떤 정겨움. 아무리 뒹굴어도 차갑지 않는 뽀송뽀송한 카펫. 팍팍한 우리네 삶을 눈부시도록 환하게 밝혀주는 미소. 그래서 두근거리는 가슴에 감탄사로 꽃피는 느낌표들! 눈이 선사하는 또 하나의 선물은 고갈되지 않는 동심. 내가 눈과 오래전부터 친구가 된 까닭이다. 내 어릴 적 고향에는 눈 구경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눈이 송이송이 하얀 솜으로 내린다는 걸 음악책을 통해 놀랍게 알았고, 세상에 눈밭이 존재한다는 걸 동화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다. 펑펑 내리는 눈을 실컷 맞고 싶은 시절이었다. 그 꿈을 도화지에 실현했더랬다. 상상의 날개를 한껏 펼쳐 그렸다. 눈송이는 무더기무더기로 내렸고, 눈사람은 늘 집채만 했다. 내 어릴 적 친구인 눈의 이미지는 이렇게 별천지였지만 그리움이 배어 있었다. 꿈속에서도 친구를 만나곤 했다. 친구는 마음껏 뒹굴 눈밭을 펼쳐주었다. 그곳에 핀 눈꽃송이를 만지면 푸근하고 따스했다. 친구의 삶은 정중동(靜中動)의 세월이었다. 중학교 때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교훈. 무슨 일이든 묵묵히 성취하라고 강조하셨다. 그러고 보니 눈은 기척을 내는 법이 없다. 생색내듯 요란하게 소리 내지 않는다. 비와 바람에겐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친구는 늘 그랬다. 조용히 소복소복 내려와서는, 경이! 신비! 같은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새로운 세상 풍경을 선사했다. 번잡하고 시끌벅적한 도시를 고즈넉하게, 꼬불꼬불한 산길의 한갓진 마을은 외려 도시의 축제처럼 화사하게 수놓았다. 살면서 한번 쯤 상대방 입장이 되어보라는 가르침의 죽비다. 순백의 눈은 편견이 없다. 최첨단 고층의 마천루든 산동네의 초라한 오막살이집이든 차별 없이 골고루 덮어준다. 이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뜨뜻한 이불일 것이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시절 수북수북 내리는 눈송이를 보면 이상하리 만치 위로가 됐다. 그것은 눈송이에 기쁨, 설렘, 축복 같은 따스한 언어들이 스며있을 거라는 기대가 우리네 가슴 저변에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다. 어쩌면 눈의 마술적 의미에 조마조마한 마음을 대입해 녹이고 싶어 함이었는지도 모른다. 눈은 합격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줄 것만 같은 희망이었고, 갈망이었다. 드디어 내일 수능이다. 고생한 보람이 좋은 결실로 나타나길 기원해본다.

2017-11-22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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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김장철 풍경

벌써 김장시즌인가? 집근처 난전에 벌여놓은 채소가 그렇다고 손짓한다. 보자기 좌판 위에 무청이 줄느런히 포개져 있다. 무청과 촌수가 어슷비슷한 배추 겉대도 후줄근히 늘어져 있다. 그 좌판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무청을 다듬는 할머니의 굼뜬 손길. 이 셋은 묘한 앙상블을 이룬다. 한가롭고, 그러나 안쓰럽게 보이는 그 풍경을 따사롭게 쬐여주는 햇볕이 너무도 반갑고 고맙다. 그 다소곳한 난전에 장보러 나온 아주머니들이 빼꼼히 끼어들면 장터는 복닥거린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는 허허하게 웃고 있었다. 잘 팔리느냐고 여쭙자 돌아오는 대답이 엉뚱하다. 그렁저렁 팔리긴 하는데 사람 보는 게 더 재미있다고 하신다. 그 정겨운 말이 왜 이리 슬프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사람을 만나 말문을 여는 게 즐거울 만큼 정녕 외로웠던 걸까? 그래서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나온 걸까? 누군가 무청으로 요리하는 비책을 물어올 양이면 그렇게 표정이 밝을 수가 없다. 할머니에겐 난전이란 삶의 얘기꽃을 파는 동네 사랑방이었다. 김장대목을 맞은 장터엔 그러나 정작 있어야 할 배추와 무가 없다. 휑하다. 어지간해선 온라인 장터에서 절인 배추를 배달 주문해 김장을 담그는 세태니 당연한 귀결의 풍경일 것이다. 그 공허함이 무색했는지 할머니는 무청과 배추 겉대를 가리키며 이게 요즘 상전 대접을 받는다고 추켜세운다. 어릴 적 장터에선 공짜로 얻곤 했는데 지금은 팔고 있다며 할머니는 멋쩍어하신다. 오랜 세월 무청과 배추 겉대와 함께 했을 할머니의 모습에서 어느 옛 김장 장터를 보았다. 내 어릴 적 김장철엔 장터마다 배추와 무가 산더미같이 쌓였다. 층층이 포개 수북수북했다. 집집마다 김장을 적게는 수십 포기씩, 식솔이 많은 댁네는 백 수십 포기까지 담갔으니 그랬을 것이다. 담벼락 같은 배추더미에 사다리가 걸쳐지면 금세 동났다. 장정들이 배추를 주고받으며 손수레에 실었다. 배추와 무는 하늘을 날아다녔다. 바닥을 드러내면 배추에서 떨어져나간 겉대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다듬고 남은 무청이 나뒹굴었다. 줍는 게 임자였지만 남아돌았다. 사람들은 무청과 배추 겉대를 주웠다는 말끝에 붙이는 수식어엔 슬픔이 스며있었다. 거친 흙바람과 거센 비를 견뎌온 흔적. 푸르죽죽한 무청과 배추 겉대에는 아픔이 보인다. 허연 무와 노란 배추 속살을 보호하려 안간힘을 썼으니 거죽이 성할 날이 없었다. 그래서 무와 배추 속살은 달고 부드러웠지만 겉대들은 늘 쓰고 거칠었다. 사람들은 질기다고 온갖 투정을 부렸지만 막장 메뉴로 식탁을 지켜왔다. 겉대들은 흙바람이었고, 배고픔이었으며, 모진 세월이었다. 김장을 마치고 나오면 늘 천덕꾸러기 처지였던 겉대들. 이제 그 푸석거리고 시들하던 겉대들이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한 웰빙 라이프 메뉴가 되고, 그래서 구하기 힘든 품귀 상품이 되고, 돈이 됐다. TV 화면을 보니 강원도 어느 농가에선 주객이 전도됐다. 무청을 사면 무가 덤으로 얹어진다는 게 이 농가의 마케팅 전략이란다. 무청을 겨우내 말리면 시래기. 누렇게 변신할 즈음 상품의 부가가치가 깡충 뛴단다. 그 농가에선 무청이 상품이고 무가 부속물이다. 그러고 보면 김장 겉대들은 참 겸손하다. 삶이 힘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고, 몸값이 뛰었지만 초심을 잃지 않고 토속적인 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서다. 은근하고 웅숭깊다. 늘 한결같다. 주린 배를 채워주던 구황음식 시절이나, 웰빙식품으로 등극한 지금이나 찬물에 몸을 풀어 따스한 국과 탕이 되어준다. 모나지도 않다. 모든 음식에 어울린다. 된장을 풀면 기막히게 구수한 맛을 낸다. 겉대들은 우리가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걸 이렇게 가르침으로 보여준다.

2017-11-15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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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동심의 세계

그건 단순한 삽화가 아니었다. 파란 하늘을 훨훨 날고 있었다. 강바람이 불자 더 높이 오르려 연실을 팽팽하게 당겼다. 그 연실을 풍성하게 감은 얼레를 풀자 가오리연은 긴 꼬리를 흔들며 춤췄다. 일전에 봤던 한강변의 연날리기 풍경이다. 얼마나 사무치던 한 폭의 삽화이던가. 내 어릴 적 추억의 삽화에도 강변은 등장한다. 길게 뻗은 강둑은 연을 띄우는 활주로였다. 강둑의 동네 아이들은 바람길을 꿰차고 있었다. 전속력으로 달음박질해 연을 하늘 높이 잘도 띄웠다. 그런 내 추억의 삽화 속에는 그러나 얼레가 없다. 둘둘 말은 종이가 그것을 대신했다. 물레방아처럼 돌아가는 나무얼레! 연실을 광폭으로 감고 풀며 연을 띄우는 광경이 무척 부러웠다. 당겨 감으면 연은 솟았고, 상승 기류를 탈 즈음 따르르 풀면 더욱 높이 날았다. 곧 한 점이 됐다. 그 가물거리는 점이 되돌아오면 마치 미지의 세계를 다녀온 것처럼 기특했다. 새들과도 정답게 얘기를 나누었을 거라는 상상도 했다. 얼레를 몹시도 갖고 싶어 했던 예닐곱 살 때의 삽화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지금에 와서 왜 이리 설레고 가슴이 뛰는 걸까. 그것은 어쩌면 내 추억의 삽화 속에 비워뒀던 여백에 얼레를 꼭 그려 넣고 싶었던, 그 잠자는 동심이 불쑥 깨어난 까닭일 것이다. 하늘 속을 자유롭게 떠다니는 연. 왜 사람들은 연을 띄울 때 사연을 실어 보내는지? 그 이유를 그날 절절이 느꼈다. 저물녘에 퍼드덕거리는 소리가 스치듯 들렸다. 비둘기 떼가 자우룩이 스쳐 갔지만, 나는 하늘 높이 날고 있는 저 아득한 연에 넋을 놓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춤추는 가오리연. 시간의 자유란 이런 것일까. 연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얼굴 그대로 시간 밖에서 날고 있었다. 연을 응시하며 상상의 날개를 펼친다. 내 어린 시절 못다 채운 그 사무침을 하늘 도화지에 그려본다. 얼레를 자유자재로 돌리며 연을 날리는 강둑 위의 내 모습을. 연실은 연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풀고도 남을 만큼 넉넉했다. 얼레를 당기자 연은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올랐다. 오랜 숙원이 이제야 이루게 됐다는 듯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연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릴 적 아름다운 추억은 세월이 흘려도 세태가 변해도 결코 새롭게 재해석할 수 없다고. 덧셈과 뺄셈 논리가 난무하는 세상 셈법이 함부로 끼어들 수 없는 맑은 영혼의 영역이기에 그럴 것이다. 시간이 멎은 삽화! 그 시간 속에 웅크리고 잠자는 동심을 언제부터 깨우고 있었던 걸까. 아련함만 켜켜이 쌓여가는 가슴 한 켠을 얼마 동안 애타게 노크하고 있었던 걸까. 동심은 그러나 늘 바쁜 일상에 떼밀려 잃어버린 시간 속을 배회해야 했다. 세월의 뒤안길로 밀려난 동심! 요즘 그 동심의 세계를 찾아 나선 어른들이 많다는 소식이다. 어린이의 전유물이던 장난감과 캐릭터용품을 수집하는가 하면 그림, 피아노, 태권도, 무용을 배우고 더러는 학습지까지 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어른들을 가리켜 키덜트(Kidult)라고 부른다. 어린이(Kid)와 어른(Adult)의 합성어다. 이 신조어는 관련 마케팅이 나올 만큼 고전이 된 지 오래고, 키덜트문화가 신문화의 한 영역으로 자리매김했다니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사람들이 이따금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려는 건 어린 시절의 미완성된 삽화를 완성하려는 자유 영혼의 회귀본능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린 시절에 품었던 꿈과 희망이 꿈틀거리고 있음이다. 그 본능이 살아 약동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부풀 일이다. 팍팍한 일상에 지친 마음을 토닥토닥 어루만져 주는 동심의 향수. 그 동심이 오감을 거쳐 가슴까지 벅차오르면 넉넉하고 따스한 삶의 향기로 변할 것이다. 세상을 열정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삶의 원동력 말이다.

2017-11-08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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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아침에 만나는 원두커피의 설렘

날씨가 꽤 쌀쌀해졌다. 며칠 후면 겨울이 시작됨을 알리는 입동(立冬). 베란다 통유리창 너머로 흩날리는 담갈색 낙엽이 그 색온도를 표현하고 있다. 까치 한 마리가 추위를 체감했는지 잔뜩 목을 움츠린 채 종종걸음을 친다. 나무둥치에 구르는 마른 낙엽 위로 기다랗게 비쳐 드는 아침 햇살이 무척 반갑다. 이런 풍경엔 김이 모락거리는 원두커피가 제격이다. 햇살과 커피는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둘의 공통점은 금방 나온 신선함과 따사로움일 것이다. 출근하기 전 내 즐거운 일과 중 하나가 원두커피를 내리는 일이다. 수동식 핸드밀로 커피콩을 가는 것이 퍽 원시적이어서 좋다. 서걱서걱 맷돌로 가는듯한 소리와 쪼개진 알갱이 속살에서 묻어나는 깊고 은은한 향이 태고의 자연으로 데려가게 한다. 고깔모양의 드리퍼에 꽂은 종이필터. 거기에 분쇄된 커피를 소복이 담고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으면 구워지는 빵처럼 부풀어 오른다. 가슴 설레듯 부푼 커피 알갱이들. 물의 무게로 그것을 내린 게 원두커피의 맛이랬다. 이즈음 온기를 머금은 커피향이 온 집안에 기분 좋게 맴돈다, 맛은 어떨까? 아침마다 이런 기대 섞인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커피를 내리는 수고로움을 즐기는지도 모른다. 하루를 산뜻하게 시작하는 그 첫 실마리를 원두커피가 풀어주는 것이다. 원두커피의 맛은 원두의 품종, 생두의 볶음 정도, 물의 온도, 물 내리는 속도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타난다. 여기에 날씨, 분위기, 기분, 감성까지 더해지면 커피 맛의 범위는 방대해진다. 눈금이 각기 다른 미각은 또 어떤가. 종이필터로 내린 커피는 그래서 매번 첫 느낌의 설렘으로 다가온다. 맛은 크게 쓴맛, 신맛, 단맛. 이 맛 속성이 어쩜 우리네 삶과 많이 닮았을까 싶다. 혹자는 쓴맛이 커피 본연의 맛을 좌우한다고 했더랬다. 커피도 사람처럼 쓴맛을 봐야 감동적인 맛을 낼 수 있다는 얘기로 읽힌다. 내 추억의 커피는 맛만 쓴 게 아니었다. 새내기 기자 시절이었다. 다방커피가 호황을 누리던 시절, 한국계 미국 군의관을 이색 인물로 선정해 인터뷰하러 갔다가 커피로부터 쓴맛을 봤다. 거실의 탁자 위에 대형 머그잔이 올라왔다. 그렇게 큰 찻잔은 처음 봤다. 지금의 대형 테이크아웃 종이컵 정도는 될 것이다. 갈색 빛이 도는 커피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양은 엄청났다. 내 눈엔 한 바가지쯤 돼 보였다. 찔끔 담긴 다방커피 찻잔에 익숙했으니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그가 대뜸 갓 볶아 구수할 거라고 했다. 대관절 뭘 볶았다는 건가? 그 말을 해석하는 그 짧은 순간, 내 눈은 크림과 설탕을 찾아 탁자 위를 헤매고 있었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그때 아메리카노를 처음 맛봤다. 크림을 달라고 하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다 싶다. 모르긴 해도 지금 그 커피를 맛봤더라면 감탄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을 것이다. 생두를 갓 볶아 내린 커피였으니 향과 맛이 얼마나 신선하고 그윽했을까. 그 커피는 생활철학 하나를 가르쳐 주었다. 선입관을 갖지 말라는 것. 다방커피에 길들여진 선입관은 그 신선한 원두커피 앞에서 미각과 후각을 무디게 했던 거다. 선입관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그 추억이 아련하게 밀려와서일까. 커피향의 여운이 오래 남는다. 빡빡한 일상에 여유와 재충전을 얻게 해주는 향기. 눈을 지그시 감으면 마음은 작은 호수가 되고 소담한 숲이 된다. 커피에는 사랑과 위로가 담겨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사람과 자연에 대한 시선이 따스해진 까닭일 것이다. 이런 커피의 고부가가치를 높이는 건 향기와 맛을 어떻게 느끼느냐에 달렸다. 바스락거리는 낙엽과 맑은 햇살, 그리고 향긋한 커피의 앙상블이 아침을 상큼 발랄하게 한다.

2017-11-01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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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눈물겨운 도시락

저녁식사를 할 무렵, TV의 광고 한 장면이 친숙하게 다가온다. 내레이션이 그런다. '밥이 답이다'라고. 쌀소비촉진캠페인 카피인데, 그 말이 아련한 추억 속으로 이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북이 담긴 고봉밥이 등장하니 옛 정취가 묻어난다. 까마득히 잊고 지내다가도 고봉밥이나 도시락 장면이 스치면 불쑥 눈가를 적시게 하는 추억! 그러고 보니 세상이 참 많이도 변했다. 쌀 소비를 위해 피부에 좋다고 어필하는 화면 속 밥과 내 유년시절의 밥 풍속도가 딴판이어서다. 유년시절, 밥은 이 세상 최고의 보약이었다. 추억은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언제부터인가 점심때가 되면 교실 밖을 나가는 친구가 있었다. 도시락을 싸오지 않아서다. 왜 도시락을 싸오지 않느냐고 물으면 돌아오는 답은 늘 '배부르다'였다. 불룩한 배를 보여주기까지 했다. 아이들은 젓가락을 건네기도 했지만 그는 힘없이 손을 가로저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무슨 변고라도 있는 걸까? 먹을 게 없던 시절, 아이들은 그 본질적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 진실을 알려준 건 운동장 한 모퉁이에 설치된 수돗가였다. 아이들이 도시락을 먹는 동안 친구는 고개를 모로 젖힌 채 콸콸거리는 맹물을 마시고 있었다. 아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살기 위해 입을 오물거리며 밥처럼 먹고 있었던 거다. 마디숨을 몰아쉬면서. 아이들은 교실 창밖 너머로 그것을 목도하고 있었다. 친구는 며칠 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아, 어쩌다 그 장면이 떠오르면 우울해지기에 가슴 바닥으로 밀어 넣지만 눈시울에 뜨거움이 배어나오곤 한다. 얼마나 배를 곯았던 걸까. 내가 철이 들었을 땐 수돗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곳이었다. 동네 공원 수돗가에서 손 씻는 아이들을 보면 그 친구가 오버랩 되곤 한다. 그 친구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그 때 그 시절을 되짚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밥은 먹었니? 가 인사였던 그 시절, 물힘으로 한나절을 버텨온 친구. 뛰놀다가 배고프면 수돗물로 힘을 충전하는 건 흔한 풍경이었다지만, 친구의 도시락 허기증은 눈물 나는 역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쌀이 귀하던 시절, 밥 짓는 풍경은 색달랐다. 솥의 맨 아래층에 꽁보리를 앉히고 그 위에 쌀을 얹어 밥을 지었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는 어른 밥과 아이들 밥 색깔이 달랐다. 어른 밥은 고봉으로 꾹꾹 눌러 담은 새하얀 쌀밥이었다. 쌀밥은 부의 상징이었기에 집안의 대표주자인 가장만큼은 그랬는지 모른다. 아이들 밥은 거무스레했다. 쌀밥은 드넓은 꽁보리 밭에 잔설처럼 희끗거렸다. 아이들의 시선은 늘 어른 밥에 꽂혔다. 그렇게 윤기가 자르르 흐를 수가 없었다. 아이들의 입안은 더욱 자르르 윤기나게 침이 괴였다. 어른들은 알아차리고 있었다. 어른들은 늘 밥을 남겼다. 밥상을 물리면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아이들의 그 여분까지 고려했는지 쌀밥은 산더미처럼 높아가는 것만 같았다. 찬도 거의 남아 있었다. 조기며, 고등어며, 갈치며 노릇노릇한 생선구이는 아이들 몫이 됐다. 가시가 잘 발라진 채 고스란히 있곤 했다. 어른들은 헛기침을 밥상너머로 퍼내며, 아이들이 먹는 모습을 보곤 흐뭇해했다.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될 즈음 더러는 한동안 밥을 먹을 때 무심결에 몇 숟가락을 남기곤 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네 어른들의 밥 남김에서 알게 된 깊은 헤아림을, 애틋한 흔적을 그리워함일 것이다. 밥에는 장마와 태풍, 땡볕을 견뎌온 쌀 생성 과정의 인고(忍苦)가 살아 있다. 밥에는 물결치는 세파를 이겨낼 천연 보약이 들어 있는 것이다. 먹을 게 넘쳐나는 요즘이지만 밥은 여전히 몸의 보약이자, 삶에 보약이다. 저녁밥을 먹으며 새삼 밥의 소중함을 느껴본다.

2017-10-25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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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걷는다는 것은

산의 표정이 생기발랄해졌다. 계절 변화에 수줍음을 타던 산들이 설렌 마음을 기어이 색깔로 표출했다. 나보란 듯이 산봉우리마다 울긋불긋 단풍으로 염색했다. 더러는 계곡을 타고 내려와 아래 마을의 길섶까지 단풍 물감을 뿌려놓았다. 서울 도심의 동네 산들도 점점 엷어지는 연초록색 바탕의 큰 화폭에 형형색색 단풍으로 수북수북 수놓을 태세다. 며칠 후면 물색 좋은 색동옷을 차려입고 나와 절정에 오른 자태를 한껏 뽐내며 우리를 깜짝깜짝 놀라게 할 것이다. 먼동이 틀 무렵, 왜 그렇게 그날은 가슴 설렜는지 모르겠다. 그건 아무도 호흡하지 않은 숲 공기를 마시며 거니는 호사를 누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장엄하게, 그러나 조용히 날개를 펴는 가을의 향연을 직접 보고, 맡고, 들을 수 있어서일 것이다. 그날 동네 산속은 단풍의 역사가 이제 막 이뤄지려 하고 있었다. 나무 둥치에 누운 낙엽들은 그 예고편이었다. 얼마나 가을앓이를 한 것일까. 갈색으로 바싹 마른 모습. 낙엽들은 마치 오랜 이야기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여명의 산속은 아늑했다. 바람도 쉬는 것 같았다. 꼬불꼬불 이어지는 흙길. 아득한 것이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파스텔 풍경이다. 나무숲 사이로 고운 색깔이 언뜻언뜻 보인다. 단풍 빛이다. 간밤에 몰래 물들였을 것이다. 숲속에 맑은 햇살이 퍼지자 푸른 잎 가운에 핀 꽃송이처럼 그렇게 화사할 수가 없다. 풀벌레도 감탄했는지 찌륵찌륵 목청을 돋우며 정적을 깬다. 저 멀리에서 가랑잎 구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산중의 쓸쓸함과 정겨움이 동시에 와락 밀려온다. 언제 이런 풍경을 또 볼 수 있을까 싶어, 숲길은 길었지만 아껴가며 걸었다. 따로 정해놓은 목적지가 없으니 걸음이 이렇게 방만할 수가 없다. 발길 닿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걸었다. 걷다가 나도 모르게 낙엽 하나를 줍고 있었다. 마음도 어느덧 정처 없는 낙엽처럼 가을앓이를 한 탓일 게다. 메마른 걸 보니 여름날 그 지독한 장맛비에 잔가지와 함께 산화한 낙엽일 것이다. 마른 입살 안에 힘줄처럼 갈래갈래 뻗은 관다발의 잎맥이 어쩜 숲길을 빼닮았을까 싶다. 한 가운데 잎맥을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수 개의 관다발이 뻗은 숲길 모양. 낙엽은 이런 길의 원리를 어떻게 알았을까? 샛길을 빠졌더라도 종내 한 가운데 길에서 만나는 것을. 사람의 만남이라는 것도 이런 궤적을 그리려는 본능이 꿈틀거린다. 만남 하나하나가 그래서 소중하다. 허투루 할 일이 아니다. 만남의 길에서 사랑이 묻어오고, 사연이 묻어오고, 희로애락이 묻어오고, 추억이 묻어오는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순간들을 만들고, 가꾸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낙엽에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뒤안길만 있는 게 아니다. 희망이라는 언어가 숨 쉰다. 잎을 떨군 그 가지에 따스한 봄날 새싹을 틔울 것이라는 기약이랄까. 낙엽이 앙탈을 부리지 않고 내려오는 까닭일 것이다. 앙상한 가지들이 매서운 추위를 견뎌내는 것도 그런 언덕이 있음이다. 사람들이 사색하며 걷는 것도 따분한 굴레와 번뇌를 떨궈내고 새로운 동력을 찾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울긋불긋한 단풍 길을 걷는 것은 그 변화하는 색감을 느끼고자 함일 것이다. 길은 희한하게도 지루하거나 싫증나지 않는다. 코스모스길이든, 억새풀길이든, 가로수길이든, 숲길이든 계절따라 풍경이 다르거니와 걸을 때마다 매번 다른 생각의 지도를 그리게 하기 때문이다. 걸어온 길만큼 아기자기한 이야기꽃이 피어나는 것이다. 길은 한 번도 내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지만 걷는 의미를 깨우쳐주었다. 소슬한 바람결에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의 숲길. 햇살이 저만치에서 그림자 하나씩을 이끌고 걸어가는 사람들을 따사롭게 덮어주고 있었다.

2017-10-18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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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모래밭의 가을편지

해는 크게 둥글어가고 있었다. 받아 안을 듯 해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았던 때가 또 있었던가. 가을이 깊어가는 해질녘의 고즈넉한 서해안 대천해변. 그 모래밭 한복판에 오도카니 앉아 바다 위에 떠 있는 해를 바라보다가 탄성을 질렀다. 벌거벗은 마음은 벌써 풍덩! 수평선 끝자락에 달려가 있었다. 물결치자 그 이글거리던 황금빛 노을이 해변 가장자리까지 밀려와서는 황홀하게, 아늑하게 가슴을 적신다. 낙조가 왜 위로가 되고 휴식이 되는지를 그제야 깨달았다. 호젓한 가을바다! 그 황혼의 무대에서 동화 속 주인공마냥 모래밭을 거닐다 또 하나의 감탄사를 만났다. 석양빛에 요철이 도드라져 보이는 황금 낙엽들. 잎사귀처럼 생긴 발자국, 알고 보니 갈매기들의 맨발 자국이다. 드넓은 모래밭이 온통 황금 낙엽을 수놓은 카펫 같다. 놀랍다. 언제 그 많은 발자국을 남긴 것인가. 저만치 갈매기 떼가 뒤뚱뒤뚱 낙엽을 연신 찍어내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모래밭과 그 주변의 바다 자연을 지키려는 원초적 몸짓인지도 모른다. 원시의 모래밭. 그곳을 스쳐갔을 발자국들을 떠올려본다.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저 아득한 태고적 해변을 사박사박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를 더듬어본다. 조상들이 남긴 발자국 위로 숱하게 겹쳐졌을 후손들의 발자국들을. 오래된 발자국은 들숨날숨 날름거리는 파도에 의해 지워졌고, 사람들은 그 때마다 새 발자국을 새겼다. 바다는 그 상흔을 고운 모래로 살포시 감싸주기도 했지만, 때론 모래톱을 휩쓸고 갔다. 그랬다. 사람들에겐 바다는 세파의 흔적이었다. 사람들은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팍팍한 마음의 발자국을 지우려 바다로 달려가곤 했다. 청춘들은 그랬다. 하얀 모래 종이에 발자국을 꾹꾹 눌러 편지를 썼고, 파도가 읽고 지웠다. 그럴 때마다 갈매기들이 힐긋 쳐다보곤 했다. 청춘들은 사무치는 그리움을 바다를 통해 흘려보냈다. 더러는 수평선 너머 섬마을에 있을지도 모를 짝에 대한 막연한 설렘으로 바다를 향해 온몸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면 건너 섬마을 누군가의 애끓는 사연이 바다를 통해 밀물져왔다. 청춘남녀가 유독 해변 가장자리 물길을 따라 거니는 건 발자국을 찍고 지우면서 자신의 마음을 투영하고 싶어 함인지도 모른다. 섬마을 청춘들은 저 바다가 육지로 변신하는 신통력을 부려줄 것을 학수고대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더라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이란 노랫말이 공전의 히트를 친 시절이었다. 청춘의 바다는 마음의 바다였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 이후 꿈결 같은 오작교들이 속속 세워졌고, 청춘남녀의 사랑이 꽃폈다. 석양만 감상하겠노라고 바닷가에 앉았지만, 애초에 가슴 밑바닥에는 그런 생각이 없었는지 모른다. 그저 오랫동안 시간 모르게 앉아 있고 싶었다. 바다는 그러나 몸 색깔을 표출해 밤이 깊어 감을 알려주고 있었다. 검푸르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선이 어떤 곳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 하늘이 가깝게 느껴질 뿐이다. 물바람이 코를 스친다. 확 밀려오는 소금냄새를 맡으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달과 별 그리고 자우룩이 나는 갈매기가 추억 한 장을 담아낸다. 물바람에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이다. 기다란 호흡으로 넘실거리는 파도. 밤바다는 잠잠하고 고요했다. 허연 잔물결이 조신하게 다가와 모래를 적신다. 고단한 발자국들을 지운다. 찌든 감정의 찌꺼기들이 조각조각 부서진다. 모래알을 만지작거리는 물결소리가 웅숭깊고 보드랍다. 물결마다 호흡이 묻어 있는 것이다. 시월의 반환점을 향해 달려가는 가을바다는 그렇게 농익어가고 있었다. 가을이 주는 진정한 행복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2017-10-11 08:00:37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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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덤의 행복

동네 전통시장이 벌써부터 달떴다. 추석 대목! 점포들이 다닥다닥 어깨를 맞댄 장터 안이 수런댄다. 매대에 앉은 성수품들은 나 어떠냐고 고개를 드민다. 비좁은 통로를 오가는 손들도 왁자하다. 그 북적거리는 이맘때면 내 오랜 기억의 아래층에 쟁여둔 삽화 한 장을 끄집어내곤 한다. 흥정이 있고, 덤이 풍성하고, 정이 꽃피는 시골장터. 그 따스한 장터의 갈피들이 세태 변화의 와류 속에 혹여 색 바랜 건 아닐까, 시장 한 복판을 지날 즈음 이런 조바심이 일었다. 그러나 콩나물 앞에선 쓸데없는 기우다. 세상 셈법이 냉정하게 다 바뀌어도 콩나물에는 그 때 그 시절의 인심이 물씬 묻어난다. 한 옴큼 집어서 덤으로 얹어주는 할머니의 손마디엔 여전히 그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었던 거다. 차라리 콩나물이 손가락 틈새로 흘러내렸더라면, 그래서 따뜻한 마음만 덤으로 받았더라면 할머니의 손이 저토록 주름져 보이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굴곡진 할머니의 손마디에서 계산속이 빠른 세파에 착하게 맞선 고단한 흔적이 읽힌다. 콩나물의 덤은 거저 조금 더 얹어주는 단순한 인심이 아니다. 고부가가치가 숨쉰다. 살맛나게 하는 이만한 동력이 또 있을까. 콩나물의 덤은 사람과 사람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매개체며, 어릴 적 동화를 들려주는 이야기보따리며, 때론 장바구니 물가의 깊은 시름을 위로해주는 경제교과서다. 콩나물도 마음이 담기면 귀한 보석이 되는 걸까. 초라하지만, 콩나물은 세파에 닳아도 우리네 인심만큼은 든든하게 지켜온 버팀목이었다. 장터는 콩나물이 있어 늘 따스하다. 그러고 보니 콩나물은 타고난 본성이 착하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콩나물시루에 물을 부어도 묵묵히 받아들인다. 그 인고가 갸륵하고, 포용이 기특하기까지 하다. 희망을 품고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해서 필요 이상의 물을 탐하진 않는다. 물욕이 없음일까. 경쟁이 치열한 지구촌의 축소판 같은 콩나물 군락은 언제 보아도 옹기종기 평화롭다. 아, 저 질긴 진통과 세월 속에 평온을 잃지 않는 콩나물이 또 하나의 덤을, 가르침을 얹어주는구나! 콩나물을 파는 할머니는 진정한 덤의 값어치를 간파하고 있었다. 덤을 얹어줌으로써 외려 얻게 되는 행복한 덤을. 손님들의 미소를, 기쁨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베풂의 뿌듯함을. 덤을 주고 덤으로 얻는 행복! 할머니는 그걸 깨닫고 있었다. 콩나물에는 이심전심의 유전자가 흐르고, 행복은 거창한 게 아니라 작고 조촐한 기쁨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다. 정성이라는 덤을 얹힌 음식을 맛있게 먹는 아이를 쳐다보는 엄마의 표정을 보라.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를. 시루 안에서 꼬물거리는 콩나물을 보면 악보의 음표들이 춤을 춘다. 그 음표에는 삶의 애환을 담은 노랫말이 스며있을 것이다. 콩나물의 덤에서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는 까닭이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덤은 화롯불처럼 따스한 온기를 은근히, 오래도록 유지하고 있는 게 그 본질일 것이다. 그러나 거죽만 뜨겁고, 따스함이 마음속까지 전해지지 않는 어설픈 덤은 감동적이지 않다. 왠지 모르게 세상엔 공짜란 없다는 뒤끝이 꿈틀댄다. 범속한 계산이 깔려 있음이다. 내 기억의 한가위 삽화에는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떠 있다. 달이라는 게 참 묘하다. 따스한 가슴으로 바라보면 달빛이 그렇게 온화할 수가 없다. 달빛에 무슨 무게가 있을까 마는, 분위기에 따라 달빛의 무게가 다르게 보인다. 달빛은 마음의 거울인 것이다. 나물의 감초격인 콩나물의 덤이 이번 한가위 달빛을 부드럽고 화사하게 해줄 것이다. 인심이 풋풋한 감동 이야기에 흐뭇해하는 달의 표정이 보이는가? 동산 위에 떠오른 내 기억의 달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2017-09-27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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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창업 37.5도] 창업 1번지, 판교의 스타트업들 (1)온라인에서 최신 IT기술을 배운다 '인프런'

[청년창업 37.5도] 창업 1번지, 판교의 스타트업들 (1)온라인에서 최신 IT기술을 배운다 '인프런' "IT 분야에서는 새로운 기술이 계속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 분야 종사자들이 일하면서 새 기술을 습득할 인프라가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 판교 경기문화창조허브에 입주해 있는 인프랩(InfLab)의 이형주 대표는 '인프런(Inflearn)' 서비스를 내놓게 된 이유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인프런은 IT 분야에 특화된 온라인 지식공유 플랫폼으로 현업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만든 수준 높은 교육 콘텐츠들이 올라와 있다. 현재 6만여 명의 회원들이 비용을 내고 이 콘텐츠들을 이용하고 있다. 대학 시절부터 이 대표는 IT 분야에 뛰어들고 싶었지만 학원 교육비 부담에 4년 전에야 웹 개발자로 일하게 됐다. 꿈은 이뤘지만 다른 사람에 비해 늦은 나이에 출발한 까닭에 자신을 더욱 성장시킬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했다. 자신을 이끌어 줄 선배나 좋은 프로젝트를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미국의 유데미(Udemy)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습득했다. 유데미는 세계적으로 성공한 IT 기술 교육 플랫폼이다. 이 대표는 유데미로 독학하면서 한국에도 비슷한 서비스가 있다면 자신처럼 배움에 목마른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인프런의 목적은 누구나 원하면 IT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을 더욱 성장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이 대표와의 인터뷰를 간추린 것이다. -인프런 서비스란? "IT 기술에 특화된 온라인 지식공유 플랫폼이다. 인공지능, 머신러닝, 웹 제작, 앱 개발, 온라인 마케팅, 3D, 모바일게임 제작 등의 분야에서 실제 현업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 제작한 양질의 교육 콘텐츠를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다. 서비스를 시작한 지 1년 10개월정도가 지났는데, 현재 6만여 명의 회원이 우리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순도가 매우 높은 회원들이다. 실제 비용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이용하는 회원들이 많다는 의미다. 콘텐츠 이용료는 콘텐츠 게시자가 정한다. 무료인 콘텐츠를 비롯해 이용료는 제각각이다." -다른 교육 서비스와의 차이점은? "4차산업혁명시대라는 말이 나오는 상황이라 IT 신기술에 대한 수요는 무척 크다. 현재 우리나라의 IT 직업교육은 오프라인 교육이 대부분인데 사설학원에서 이뤄지는 교육은 한달에 몇백만 원씩이나 해서 비용 부담이 너무 크다. 반대로 수업료가 싼 곳은 수업의 질이 기대하는 수준에 너무 못미친다. 10년전 제가 비용 부담 때문에 IT 직업 교육을 포기한 때랑 나아진 게 없다. 저는 대학 시절, 다른 분야 전공자라 학원에서 배워 IT 분야에 취업하고 싶었는데 대학 등록금 수준의 학원비로 인해 포기했다. 4년전에야 웹개발자로 꿈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우리나라에 온라인 지식공유 플랫폼이 있기는 한데 IT 기술에 특화돼 있지는 않아 이 분야 종사자들의 기대수준에 못미친다." -인프런 서비스를 시작한 계기는? "미국에는 유데미(Udemy)라는 서비스가 있어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다. 저도 여기서 많이 배웠다. 유데미를 통해 배우면서 우리나라에도 이런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말로 된 콘텐츠가 있다면 누구나 성장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1년 10개월 동안 서비스를 한 결과, 우리사회에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분들이 많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지방에 있는 회원 한 분은 '앱 개발을 배우고 싶었는데 지방이라 기회가 없었다. 인프런을 통해 내 꿈을 이룰 수 있었다'며 고마워했다. IT회사 신입사원인 회원 한 분은 '새로운 지식을 얻고 싶어도 제대로 얻을 곳이 없었는데, 인프런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았다. 덕분에 회사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고 했다. 인프런 서비스가 이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경기문화창조허브에 입주한 이유는? "창업을 할 때 장소가 주는 이점이 있다.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게 규칙적으로 일을 진행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특히 허브에 입주하면 사무실 비용 부담이 없다. 여기에 더해 교육 프로그램, 네트워크 프로그램, 피칭행사가 많아서 큰 도움이 된다. 홍보나 사업 노하우 등에 대해 많이 배운다. 이곳에서 피칭행사가 있을 때면 다른 분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서비스나 제품을 홍보하는지 보고, 벤치마킹하기도 한다. 저희 팀원들도 최신기술에 대한 교육프로그램을 자주 이용한다."

2017-09-24 17:07:06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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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들녘에도 흥은 있다

신명이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잔치가 갖는 의미는 각별했다. 이웃 간 얇아진 정(情)을 잔치를 통해 두텁게 일궜고, 동구 밖 마을과의 골 깊은 갈등의 벽도 잔치를 통해 허물었다. 잔치는 들녘을 기름지게 하는 물꼬였으며,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주는 소통의 장이었다. 건너 마을 사람들에겐 새로운 만남과 이벤트를 기약하는 갈망이었다. 삶이 버거울 때 사람들이 잔치마당을 기웃거리는 까닭은 그 질긴 질량을 들끓는 설렘의 용광로에 연소하고 싶음에서다. 먹고, 마시고, 춤추는 잔치! 사람들은 그랬다. 잔치에 자신을 투영해 세속의 더께에 접어뒀던 흥의 날개를 한껏 펼치고자 했다. 흥이란 그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화수분이기에 잔치판이 벌어지는 마을마다 신명이 났다. 사람들은 거기에 스토리를 입혀 기적 같은 전설을 꽃피웠다. 크고 작은 잔치를 통해 마음을 텄고, 길을 텄으며, 장터를 열었던 것이다. 잔치는 사람을 구별하지 않았다. 모두를 껴안고 포용했기에 결집력은 강했고, 흩어졌던 마음들이 하나로 모아졌다. 그 마을잔치가 축제라는 이름으로 흥행하고 있다. 전국의 축제는 줄잡아 2천여 개. 엊그제 사람들은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펼치는 명인의 줄타기 구경에 푹 빠져 있었다. 마을은 축제 분위기에 들떴다. 허공의 외줄 위로 사뿐 올라 아슬아슬 묘기를 부리는 명인의 몸짓. 그는 파란 가을 하늘의 나비였다. 산들바람 한 점이 살랑거렸다. 가느다란 외줄은 흔들거렸다. 그도 흔들거렸다. 모두가 흔들거렸다. 이런 걸 두고 생각과 행동이 하나 되는 혼연일체라고 했더랬다. 축제의 힘이 바로 이런 것일까. 명인은 외줄에서 박차 올라 점프했다.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번엔 양반다리로 앉은 자세에서 펄쩍 앞으로 나아간다. 묘기는 극적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관람객을 들었다 놨다 했다. 줄 위에서 무릎으로 빠르게 걷는 장면에선 함성이 터져 나왔다. 풍물패의 장단에도 흥이 돋아났다. 축제 분위기는 더욱 고조됐다. 줄타기 공연에는 스릴 넘치는 곡예만 있는 게 아니다. 풍자와 유머, 해학도 곁들여진다. 여기저기서 웃음꽃이 만발했다. 외줄을 건너는 명인의 몸짓에서 소통하는 세상을 본다. 허공에서 한 발짝씩 걸음을 뗄 때마다 소통의 눈금이 점점 또렷해지고 촘촘해지는 신기루를 본다. 공자는 일찍이 이렇게 설파했더랬다.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즐거우면 멀리서 사람들이 오게 돼 있다고. 그랬다. 흥이 넘치는 축제마당이라면 전국 방방곡곡 어디든 달려왔다. 여행과 관광, 그리고 이벤트가 믹스된 퓨전축제! 볼거리, 먹거리, 놀거리, 즐길거리 등의 흥행 요소가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는 것이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여서일까. 가을축제의 향연은 저 스스로를 설명하려 나서지 않아도 풍성한 이벤트를 말하고, 넉넉한 마음을 말하고 있다. 풍성하고 넉넉한 곳에는 사람들이 들썩거린다. 정감이 넘실거린다. 가을이라는 간판을 내건 축제가 유난히 많은 까닭일 것이다. 주제와 내용은 저마다 기발하고, 규모와 성격도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마음을 달뜨게 하는 본질은 똑같다. 비록 내용이 허접할지언정 한데 어우러져 흥을 돋우고 교감하려는 태생적 본능이 꿈틀거린다. 사람들은 그 본능적 흥을 발산하려 끊임없이 축제를 갈망하는지도 모른다. 이 축제의 계절, 마음속에 한 폭의 축제 풍경화를 그려본다.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들녘. 화사한 햇살이 날개를 펼친다. 바람이 일렁이자 누렇게 수놓은 그 무대 위에서 벼 이삭들이 춤을 춘다. 그 춤추는 흥을 형형색색으로 입혀본다. 이 가을 이런 풍경화를 그려보는 건 저 신성한 자연의 흥과 호흡하고 싶음이다. 화폭에 큰 창문이 있다면 커튼을 걷어놓고 들녘을 가까이 불러놓겠다.

2017-09-20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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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느린 우체통의 경쟁력

하늘이 푸르게 저렇듯 높아졌다. 구불구불 오르는 길도 정겨워라. 모퉁이 숲을 굽이쳐 돌아 나가는 올망졸망한 길들이 리드미컬 경쾌하다. 서울 도심에 이런 한갓진 드라이브 코스가 있었나 싶다. 북악 스카이웨이. 산그늘이 짙게 내려서일까. 북악산 자락은 가을빛이 또렷했다. 연초록이 엷어져가는 숲마다 소슬하다. 나뭇잎들의 춤사위도 그 뜨겁게 작열하던 여름철 자태가 아니다. 슬로우 스텝으로 너울거리며 반짝거린다. 자동차들도 덩달아 느릿느릿 완보한다. 그렇게 들른 곳이 북악산 팔각정! 전망대에 올라서면 또 한 번 놀란다. 산 아래로 두 판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완만하게 뻗은 산 앞쪽으로는 첨단 파노라마. 회색빛 빌딩과 아파트들이 빼곡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는 넓혀지고 치솟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파른 뒤쪽 아래 마을은 초록색 숲속에 아기자기한 집들이 들어앉은 모자이크 같은 그림이다. 표정은 그래서 극적이다. 앞쪽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리는 반면 뒤쪽은 느릿느릿 걸어가는 모습이다. 번잡하게 돌아가는 거대한 도심과 전형적인 작은 산골. 한 지붕 아래 서울이면서 어쩜 이렇게 풍경이 다를 수가 있을까? 팔각정 전망대에 동그마니 앉아 있는 '느린 우체통'이 속도 만능주의 시대에 느림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해보라고 물음을 던진다. 애틋한 사연을 담은 편지를 행선지까지 느릿느릿 전달해준대서 붙여진 '느린 우체통'. 도착하는데 1년이 걸린다니, 촌각을 앞다퉈달라고 몹시도 보채는 첨단유행 입장에선 이런 미련 곰탱이가 없을 거다. 그 느림보 우체통은 나직이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느리게 산다는 건 빛의 속도로 질주하는 시대에 조바심과 성급함에서 놓칠 수 있는 모자람을 채우는 작업이라고. 열띤 경쟁 속에 앞만 보고 달리느라 허기증을 느꼈을 사람다움 삶을 얼마만큼 가꾸었는지? 그 길게 늘어난 세월의 뒤안길을 한번쯤 되돌아보라고 마음의 창을 노크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피드 시대에 노출되는 모자람은 어쩌면 펜을 꾹꾹 눌러가며 편지를 쓰는 과정에서 절로 채워지는 건 아닐까. 이 스산한 계절, 어딘가 응시하는 듯한 우체통이 처연하다. 젊은 날 각인된 우체통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공연히 마음이 설렜다. 먼 데서 누군가가 보낸 사연을 품고 있을 것만 같았다.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달래려 달을 쳐다보곤 하던 그 시절, 우체통은 마음의 고향 같은 것이었다. 어쩌다 거리의 우체통을 마주치면 막연한 기다림으로 서성거리곤 했다. 초를 다투며 전달되는 디지털 메모지가 없던 그 시절, 사람들은 편지를 쓰며 느림과 기다림의 정서를 배웠다. 속도가 곧 경쟁력으로 통하는 세상. 편지가 느림보라고 해서 구시대 유물이 아니다. 느림이 빚어내는 따스한 감성 가치가 살아 숨 쉰다. 꼭꼭 봉해진 편지를 뜯을 때의 설렘을 생각해보라.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써내려간 손 글씨는 또 어떤가. 글씨체가 비뚤배뚤해도 행간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우표를 붙이고, 마음을 담아 우체통에 넣었을 편지. 단 몇 줄의 내용일지언정 울림은 크다. 굳게 닫힌 마음을 열게도 하고, 고단한 삶을 한 순간에 녹이기도 한다. 동네 우체통도 처연한가 싶어 눈길이 자주 간다. 그런데 뜻밖이다. 우두커니 선 채 빼꼼히 얼굴만 내미는가했더니 매일 편지 물량이 들어온단다. 하루 평균 열댓 통은 된다며 우체국 집배원이 환하게 미소 짓는다. 느림의 가치가 꿈틀거림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온통 빠름이 미덕인 시대에 반짝거리는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노라고 다짐하는 어느 유행가 가사가 굳이 펜을 건네지 않더라도 고즈넉한 가을의 향기를 담은 편지를 꼭 써야겠다.

2017-09-13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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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나를 위로하는 시간

어디 목적지를 정하고 걸은 건 아니었다. 어스름이 내리던 시간, 나는 불빛을 적시며 거리를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친구와의 약속이 미뤄지는 바람에 발길을 돌리려다, 기왕 나선 길이니 무작정 걷기로 작정했던 터다. 모처럼 배회하는 밤거리. 가로수들이 한가로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나도 그랬다. 바람은 차고 스산했다. 그런데 가슴이 설레는 건 왜 일까. 그럴 만도 했다. 학창 시절, 불빛을 그리워하며 정처 없이 떠돌던 거리였기에 가슴 벅찼을 것이다. 문득 어느 한 포장마차가 떠올랐다. 언젠가 한 번 꼭 가보고 싶었던 곳, 때론 글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추억을 담아오자고 생각했던 곳이다. 마음이 허기증을 느끼던 내 젊은 날, 초가을의 삽화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포장마차다. 낱잔으로 팔던 대포 한 잔에 뜨끈뜨끈한 오뎅 하나면 마음이 넉넉해졌다. 어쩌다 국물 속에 큼직한 무 한 토막이 얹어지면 푸짐한 안주가 되곤 했다. 술이 한 순배 돌면 마차 안은 한 가족이 됐다. 나는 그곳에서 추억을 마실 참이었다. 그러나 그 포장마차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카바이드 등(燈)의 흔들리는 불빛을 따라 내 젊은 날의 희로애락이 물결치던 그 흔적은 없었다. 자우룩하게 피어올랐던 그 불빛은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허전해지는 가슴을 감싸주는 체온과도 같았다.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그 따스했던 불빛을 찾을 수가 없다. 대신 길 저편에 실내 주점이 가을바람에도 끄떡없는 형광등 불을 훤히 밝히고 있었다. 그 눈부신 불빛 아래 나는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가 추억을 마셨다. 계절 탓인가. 어째 혼자 술을 마시는 혼술족이 눈에 띄게 많다. 그러고 보니 작은 탁자들이 여럿 있다. 요즘 흔한 풍경이라니 술 문화 패턴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모양이다. 그 당시 어지간해선 혼술하기가 힘들었다. 바라보는 시선이 유난했다. 뜸하게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길손을 보면 무슨 큰 사연이 있는 양 색안경으로 봤다. 모두가 그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데 멀쩡할 수야 없지 않은가. 마치 실연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소주잔을 비우고 또 비웠다. 내 추억의 포장마차는 혼술족의 아지트였다. 거기엔 외로움을 받아줄 정감이 넘실거렸다. 술보다 낭만을 마셨다. 지금은 그런 포근한 포장마차는 없다. 그래서일까. 홀로 기울이는 술잔마다 쓸쓸함이 묻어난다. 출렁거리는 술에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누군가 잔을 비우면서 저 세렝게티 초원의 한복판에 홀로 서서 치열한 삶을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들려줄 사람도, 받아줄 사람도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혼술이다. 혼술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온 자신을 다독거리고, 사투와 인내의 흔적이 보이는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며 어루만져 주는 것이다. 더러는 허공을 응시하면서. 술잔에는 오늘과 어제만 있는 게 아니다. 차분히 내일을 설계하는 시간표도 담겨 있다. 미래의 시간표에는 마음껏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다. 설령 공상할지언정 이 번잡한 일상에서 그런 시간을 어디서 덜어줄까 싶다. 나를 위로 하는 시간! 그랬다. 나는 어제와 오늘, 내일을 넘나들며 나를 위로하고 있었던 거다. 번민을 지우고, 아린 가슴을 달래고, 삶의 의미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며 지혜를 하나하나 일군 시간들. 그래서 일상의 갈피마다 인내하고 최선을 다하도록 북돋운 거름의 시간들. 저 아련한 추억의 포장마차가 그리워지는 건 현재를 있게 한 그때의 시간들을 쓰다듬으며 포옹하고 싶음에서일 것이다. 나는 그 보석 같은 시간들을 되새기며 불빛 적신 거리를 걷고 있었다.

2017-09-06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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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지하철의 가을 풍경화

벌써부터 가을을 타는 걸까.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면 까닭모를 공허함이 밀려든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바통 터치가 한창이던 저물녘, 나는 그 환절기를 피해 지하철에 몸을 싣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지하철도 그 공허함을 겪고 있는 게 아닌가. 무성격(無性格) 계절이라는 환절기! 여름인지, 가을인지 헷갈린다. 당장 천장의 에어컨이 힘들 게 생겼다. 여름과 가을,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그 착한온도를 추적하며 연신 내뱉는 에어컨 바람이 허탈하다. 그 황금비 찾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거니와 같은 사람이라도 하루 일과를 연소하는 부피에 따라 그때그때 체감온도가 다른 것을. 오락가락하는 환절기의 몸짓. 차창 너머로 스치는 실루엣을 바라보며 이런 삽화를 그려본다. 지하철 속에는 사계절의 사연들이 다 있을 거라는, 그래서 맑고, 흐리고, 개고, 때론 비바람이 불고, 그 뒤에 찾아오는 화창한 삶의 무늬들이 그려진 삽화. 지하철에는 다양한 삶의 기상도(氣象圖)가 파노라마처럼 흐른다. 그래서다. 지하철에 오르면 삶이 실감난다. 저마다 짊어진 삶의 밀도가 앉아 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거나, 스마트폰에 열중하거나, 책을 읽거나, 신문을 들여다보거나, 차창으로 보이는 자신을 응시하며 행선지를 향해 달려간다. 그 모습 이면에는 나름의 꿈과 희망이 배어 있다. 종점을 향해 내닫는 지하철의 모습은 삶의 궤적에 다름 아니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긴 사이 지하철은 서너 역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듬성듬성 자리가 비어졌다. 왁자지껄도 잠잠해졌다. 침묵은 잠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천장의 스피커가 돌연 정적을 깨고 위안의 말을 건네는 것이다. 오늘 하루도 힘들지 않았느냐며 가라앉은 기류를 환기시키더니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시겠단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비행기 기장의 말투! 순간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뻔 했다. 사람들은 신기하다는 듯 귀를 쫑긋거렸고, 더러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짧고 명료한 멘트였기에 여운은 길었다. 고단한 사람들에겐 따스함이 밀물져 왔을 것이다. 정말 뜻밖인 것은 이런 깜짝 친절들이 널렸는데도, 우리는 그 고마움을 모르고 지낸다는 점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범속한 일상에 묻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고마운 친절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호젓한 갈림길에서 만나는 안내 표지판, 대형마트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카트를 잡아주는 아르바이트생, 보도 위의 껌을 떼어내는 환경미화원, 문을 열어주고, 닫히려는 문 잡아주기 등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 수고로움의 가치를 부여할 틈조차 없이 부지불식간 스치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그래서 묻게 된다. 서비스를 받는 것에 너무 중독된 탓에, 혹여 친절에 대한 가치판단이 무뎌진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하면 복원할 수 있을까? 혹자는 말한다. 친절을 베푸는 법부터 배우라고. 그 출발은 베풀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그 사람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포착하는 것에 있다고 일러준다. 그런 눈과 가슴을 가지라는 것인데 안내 표지판으로 서 보고, 커트를 잡아주고, 껌을 떼는 마음이 되어 보라는 얘기일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친절이란 외투를 입으면 세상에 참 곱고 아름다운 시간이 찾아오리라 생각했다. 사랑이 담긴 친절들은 그런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지하철역을 나와 동네로 들어가는 초입. 공원의 넓은 빈터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또 하나의 친절이 여름 봉사활동을 막 끝내고 철수하고 있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나절엔 그늘막이 돼주었고, 장마 땐 비가림막 역할을 해줬던 천막. 그 고마운 천막이 석양빛을 모로 받으며 하염없이 걷히고 있었다.

2017-08-30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