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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옥수수가 삶을 말하다

그 많은 여름철 먹거리 중에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름을 올리는 게 있다. 갓 쪄낸 옥수수! 탱글탱글한 누런 알맹이들이 쫄깃쫄깃 차진 식감이 여간 아니다.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배어난다. 먹는 방식도 변한 게 없다. 우두둑 뜯는가 하면, 한 알 한 알 톡톡 떼어 알알이 감칠맛을 느끼기도 하고, 더러는 알맹이들을 손바닥에 모아 한입 가득 털어 넣곤 한다. 찐 옥수수 하나로 이렇게 입맛 당기는 대로 원초적 별미를 즐길 수 있는 먹거리가 또 있을까 싶다. 계절은 벌써 입추(立秋)를 지나 초가을을 노크하고 있음일까. 여름 장마가 못다 한 열정을 쏟아 붓고 있다. 비에 씻긴 산들바람이 스산하다. 이런 계절의 변주곡이 번지던 엊그제, 왜 옥수수가 그토록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장맛비 내리던 어느 여름날이었을 것이다. 처마 밑에서 뜨끈뜨끈한 옥수수를 후후 불어가며 먹던 추억이 자꾸 겹치니 말이다. 비 오는 여름 끝자락에서 맛보는 농익은 옥수수에는 이런 향수와 아쉬움이 묻어난다. 이렇게 해서 아내와 함께 서성거린 곳이 동네 전통시장. 찰옥수수는 솥단지 위 쟁반에 앉아 허연 김을 모락거리며 추억의 냄새를 저만치서부터 풀고 있었다. 노릇노릇한 게 침이 절로 괴었다. 하지만 정작 손에 들린 것은 찐 옥수수가 아니라 껍질이 달린 생 옥수수였다. 그것도 한 자루씩이나 사게 된 건 좌판 위에 수북한 자루 더미의 일각을 처리해주고픈 동정심 때문만은 아니다. 껍질을 까서 솥에 쪄내는 수고로움을 들여 옛 향수를 온전히 맛보기 위해서였다. 잘 익은 옥수수. 베란다 통유리 밖 빗줄기를 바라보며 뜯는 건 또 다른 별미다. 빗방울 구르는 처마 밑이었다면 더욱 낭만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추억의 옥수수는 늘 한 정물화로 남아 있다. 소쿠리에 담긴 옥수수! 이런 풍경을 담은 옥수수를 만나면 잊고 지내던 예전의 시간들이 그리움으로 밀려온다. 이런 시절이 있었다. 학교 급식으로 옥수수 빵이 나온 시절이 있었다. 누런 옥수수 가루가 씹힐 정도로 식감은 거칠었지만 얼마나 고소하고 맛이 있었던지. 모양과 크기는 요즘의 식빵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다섯 개의 빵 덩어리가 붙은 구조였다. 그게 문제였다. 급식 시간 때마다 빵 한 줄에 다섯 명이 매달렸다. 교실은 들썩거렸다. 덩어리째 손대중으로 쪼개다보니 모양과 크기가 제멋대로 나왔다. 옆쪽 빵 귀퉁이가 딸려오는가 하면, 반대로 뜯겨나가기도 했다. 담임선생님이 쪼개주기도 했지만 희비가 엇갈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청소 당번을 서면 하나가 더 얹어졌다. 교실 바닥은 마루였지만 늘 청결했다. 번쩍거렸다. 옥수수 빵이 그리워지는 건 그 거칠고 투박했던 추억의 맛도 맛이거니와, 오순도순 나눠먹던 정감어린 장면이 일렁거려서다. 빵이 많이 묻어 간 쪽에서 덜 간 쪽에 떼어주는 나눔! 7080세대의 시골 초등학교에선 옥수수 빵을 통해 나눔을, 아니 도덕을 배웠다. 나눔이 던져주는 부피는 컸다. 빵 한 조각엔 천상의 맛을 품고 있었다. 몇몇 친구들에겐 눈물 젖은 빵이었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도 하지만, 가슴 저변에 애잔함이 물결친다. 사람들은 그래서 맛있는 게 생기면 누구에게 주면 얼마나 행복해할까, 생각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이따금 몇몇 이웃과 간식거리를 서로 나눠 먹곤 한다. 시장에서 사온 옥수수며, 부침개며, 제철 채소가 대표 메뉴다. 일전에 이웃의 따스한 정이 가득 담긴 찐빵이 향수를 자극하며 삶의 무게와 속도를 잠시 내려놓게 해주었다. 소쿠리에 담긴 누런 옥수수는 살맛나는 삶을 향유하는 방법이 뜻밖에도 이렇게 단순하고 가까운 데 있다는 걸 말하고 있었다.

2017-08-23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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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종이지도가 말을 걸어오는 까닭은?

길을 잘 못 들어서자 내비게이션이 냉큼 경로를 재탐색하겠다고 목청을 돋운다. 길을 나설 때마다 듣는 이런 잔소리도 이젠 이골이 나서 그러려니 하지만 때론 핀잔으로 들리곤 한다. 그 상냥하고 친절한 길 안내를 핀잔으로 느낀다는 건 어쩌면 편리함에 길들여진 내 의식에 가하는 죽비소리를 듣고 있음일 것이다. 생소한 그 어떤 낯선 곳도 용케 길목을 짚는 영리한 내비게이션도 늘 길 공부를 해야 한다. 새로 생긴 길들을 업그레이드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일전에 그랬다. 내비게이션이 그토록 추천하던 길을 가다 헤맨 적이 있다. 뜬금없이 어느 으슥한 골목 안으로 재촉하기에 지름길을 안내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웬걸 막다른 골목. 내비게이션도 헷갈릴 때가 있구나 싶어 되돌아 나오니, 세 갈래의 선택지가 답을 기다리고 있다. 이중 어디로 갈까? 애타게 묻고 있었지만 내비게이션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통밥 굴러 알아서 가라는 얘긴가. 개중 민틋한 길을 선택해 들어서는데 그제야 경로를 재탐색하겠단다. 이번엔 우회전하란다. 뭔가 큰 길이 있나 싶었는데, 꾸불꾸불 이어지는 논길이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뒤를 돌아보니 초입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그 많던 집들도 저만치 아득하게 가물거린다. 그야말로 안개 속이다. 이 와중에 내비게이션은 구겨진 체면을 바로 세우겠다는 건지? 한 길만 고집한다. 번번이 엉뚱한 시뮬레이션 길 안내를 띄워놓고선 골목을 돌고 또 돌게 한다. 뒤늦게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을 가동하려니, 한나절 진땀을 뺀 배터리가 잠자고 있다. 논두렁 할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지의 미로에 갇혔을 것이다. 꾸부정한 할아버지는 망망대해에서 깜빡거리는 키 작은 등대 같았다. 너무 반가웠다. 종이에 비뚤비뚤 길을 그려주셨다. 그 복잡다단한 고차원 방정식의 미로를 이해하기 쉽도록 간명한 길로 풀어놓은 종이지도! 감사의 절을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석양에 타는 황홀한 저녁놀과 들녘, 바람 따라 물결치는 숲, 주름진 얼굴로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한 폭의 풍경화를 담아낸다. 할아버지의 손때 묻은 종이지도가 그토록 고마웠던 건 길 안내 때문만은 아니다. 종이지도는 우리의 일상생활이 첨단기기의 흐름에 내맡긴 채 흘러가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라고 이런 물음을 던져서다. 굽이굽이 삶의 길목에서 길을 잃고 배회할 때 인생좌표를 밝혀줄 내비게이션 하나씩을 갖고 있는가? 희망을 품고 달리는 인생행로에 올바른 이정표를 안내하고, 조언하는 내비게이션 말이다. 그 인생좌표 내비게이션은 부모가, 스승이, 지혜로운 책이 될 수 있다. 종이지도는 또 묻는다. 편리한 타성에 젖어 혹여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는 도전적 야성이 퇴화되고 있지 않는가? 내비게이션이 없었던 시절, 낯선 여행길에 나설 땐 모험심과 호기심으로 가슴 설렜다. 오지에선 도로지도책은 나침반이었다. 너덜거리는 지도책 한 권으로 보물찾기하듯 시골길을 누비는 재미가 여간 아니었다. 때론 물어물어 지도에 없는 새로운 길과 먹거리, 볼거리를 개척하곤 했다.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나름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길이 있었던 거다. 인생행로는 결국 방향이다. 그 기로에서 후회 없는 삶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더러는 착오를 줄일 때까지 길을 개척하는 이른바 시행착오를 겪기도 한다. 그것은 저만의 가치를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가치를 발견하고도 갈고 닦는 업그레이드를 하지 않는다면 골목길을 배회하며 경로 재탐색 타령만 하는 인생좌표에 다름 아니다. 인생좌표란 변화무쌍한 세상 삶에 설정돼 있기에 표류하지 않도록 열정을 다해 굳게 지켜야 하는 것이다.

2017-08-16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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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바다에서 갓 건져 올린 소금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녘, 동해안 해변은 고즈넉했다. 새벽 바다라고 해서 잠자는 건 아니다. 짙푸른 파도가 허연 거품을 물고 줄줄이 밀려온다. 하늘과 맞닿은 저 수평선 끄트머리에서 숨 가쁘게 달려왔을 파도. 그곳에서 무슨 기별이라도 갖고 온 걸까? 부서지는 파도가 찰랑찰랑 해변에 오래 머뭇거린다. 싸악 쓸고 지나간 모래밭엔 발자국 하나 없다. 얼마나 오랜만에 맨발로 거닐어보는 새벽 해변인가. 바닷물을 흠뻑 머금은 모래알들이 발을 감싸며 사박거린다. 일상을 훨훨 털어버리고 훌쩍 떠나온 여행! 아무도 밟지 않은 해변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다. 빈 백지의 모래 카펫에 발자국 잉크를 찍으면 속삭임이 되고, 시어(詩語)가 된다. 시선이 머문 곳은 하늘과 맞닿은 바다. 마중할 겨를도 없이, 찰나에 바다가 해를 불쑥 밀어 올린다. 이글거리는 해. 모래벌판이 해살 가득 저렇듯 반짝거린다. 바람이 살랑거린다. 그 한복판에 서서 공기를 들이켜 본다. 바다에서 갓 건져 올린 소금 내음이 신선하고 상쾌하다. 동해안 아침 해변은 언제 보아도 한 폭의 풍경화다. 해변 끝자락에 걸터앉아 갸웃거리는 고기잡이배며, 그 위로 춤추는 갈매기며, 해변을 거니는 다정스런 연인이며, 연초록 그늘이 아늑한 솔숲이며, 햇빛에 반짝거리는 희디흰 모래밭이며, 그 모래 언덕 너머 캠핑장에 똬리를 튼 올망졸망한 텐트들이 낭만적인 그림을 담아낸다. 푸른 바다 위로는 보트들이 물살을 가른다. 물보라가 시원하다. 이런 호사스런 풍경을 그냥 지나치는 건 바다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여행에서 남는 건 역시 사진! 여행이란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랬다. 그러나 그냥 오는 게 아니다. 추억을 싣고 온다. 그 기록물이 사진이다. 순간순간 흘러가는 시간들을 찰칵! 멎게 한 장면들이다. 과거의 시간에 머물러 있다지만, 그것은 단순한 피사체가 아니다. 거기엔 애정, 그리움, 정겨움 같은 다양한 사연들이 담겨 있다. 스토리가 살아 꿈틀거리는 것이다. 여행의 시간들이 꿈결 같은 것도, 그 조각조각의 추억을 엮은 사진이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일상이 팍팍할 땐 사진첩을 펼쳐 추억을 반추하곤 한다. 정지된 장면 속에는 무수한 언어들이 시간 밖으로 넘나든다. 낱장마다 의미가 있고, 소중하다. 그 낱장의 필름들을 연결하면 한 편의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여행 사진은 묘하다. 볼거리 없이 괜히 생고생을 했다며 후회했던 여행지가 세월 지나고 보면 보석처럼 빛난다. 리얼리티, 그러니까 고단했던 현장감이 사진 속에 배어 있는 까닭일 것이다. 여행 끝엔 피곤함이 기다린다지만 그만큼의 생생추억을 남긴다. 사진에도 복고풍이 불고 있다는 소식이다.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 많아야 30장 밖에 못 찍고, 그것도 인화지에 사진을 띄울 때까지 며칠을 기다려야 한다. 이런 단점에 매료된 소비자층이 향수에 기댄 장년층이 아니라, 뜻밖에도 유행을 좇는 청춘남녀들이라니 관련 업계가 놀랄 지경이다. 디지털처럼 무한정으로 찍을 수 없으니 한 장 한 장 정성을 쏟아야 하고,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궁금해서 설렌다는 게 복고의 배경이다. 필름에는 정성과 설렘이 있는 것이다. 카메라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넘나들며 영역다툼을 할지언정, 사진은 변하지 않는 모습 그대로다. 바래지 않는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진 겉 표면은 색 바래도, 그것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늘 현재형으로 숨 쉬는 것이다. 물리는 법이 없다. 저 활짝 핀 꽃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이 매번 색다르게 와 닿듯, 사진은 늘 새로운 읽을거리를 선사한다. 미소를 머금게도 하고, 울컥 복받치게도 한다. 해변의 일출 풍경을 담은 사진이 훗날 이야기꽃을 피워낼 것이다.

2017-08-09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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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한나절의 얼쑤! 드라마

찜통더위에 묻어난 땀이 한나절 내내 잘박거리며 기분을 엉클어놓는다. 번잡한 일상의 무게를 견뎌내려면 이런저런 매듭들을 풀어내야 한다는 삶의 법칙쯤은 잘 알면서도, 그깟 땀 몇 방울에 죽 끓듯 하는 변덕이 왠지 궁상맞다. 다행히 마음 끝자락이 생각을 곧추 잡는다. 무람없이 불쑥 튀어나온 그런 푸념을 다독거리며 밀어 넣는 걸 보니 조금은 기특하다. 그도 그럴 것이 거리를 걷는데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판소리 한 가락이 엉클어진 매듭을 산뜻하게 풀어놓는다. 얼씨구! 북을 치며 장단을 짚는 고수(鼓手)의 추임새다. 그 실마리를 뽑아내는 곳이 어딘가? 하고 소리를 따라가니 생선 가게에서 틀어놓은 라디오다. 추임새를 듣는 순간, 오래전 접어뒀던 기억이 불을 밝힌다. 무대는 시골의 어느 허름한 중고 음반가게. 안을 들여다보았을 땐 장면은 갈등으로 치닫고 있었다. 전축 턴테이블 위에 얹혀 돌아가는 빛바랜 음반에선 소리꾼이 목청을 돋웠고, 백발의 주인과 머리카락을 노랗게 물들인 청년이 흥정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가게 안 풍경은 드라마틱했다. 고목처럼 꼬장꼬장해 보이는 노인, 랩과 힙합에 열광할 것 같은 앳된 청년, 소리꾼의 애잔한 판소리! 이 보기 드문 조합이 앙상블을 이룬 스케치가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것이다. 흥정을 부추기는 건 추임새였다. 주인은 그 판소리를 꿰차고 있는 것 같았다. 가락을 절묘하게 잘 탔다. 주인이 가격을 내지를 때마다 음반은 기다렸다는 듯이 얼씨구! 화답했다. 흥정이 끝날 즈음 추임새는 절정으로 달리고 있었다. 얼쑤! 좋다! 그렇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 했다. 이렇듯 추임새는 '한나절의 얼쑤!' 드라마를 극적으로 몰고 간 음향효과였다. 흥미진진했다. 흥정에 곱살끼어 분위기를 띄운 건 기본이고, 주인이 청년의 눈치를 살피며 연신 주판알을 튕길 때마다 추임새를 넣어 흥정을 도왔다. 고개를 가로젓는 청년의 마음을 되돌려놓은 것도 추임새다. 간간이 뜨악해지는 침묵의 공간을 메워주고, 서먹함을 화기애애하게 녹여주고, 그래서 엇박자로 가던 흥정에 접점을 이끌어낸 게 추임새였던 거다. 우리네 소리꾼들은 일찍이 추임새의 에너지를 간파하고 있었다.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어깨를 들썩이게 하고, 중구난방을 하나로 모았다. 전통 놀이마당에서 소리꾼과 관객이 신명나게 한데 어우러지는 까닭일 것이다. 이는 우리 가슴 밑바닥에 '흥'이라는 추임새 유전자가 꿈틀거리고 있음이다. 조금만 격려해줘도 흥이 일렁거리는 우리네 국민성이다. 스포츠에도 그 고부가가치가 빛을 발했다. 월드컵경기 응원전 때마다 너나없이 하나가 되는 에너지가 물결쳤다. 이런 우리 내면의 가락을 추억의 서랍 속에 보관했다가 한마당 잔치나 스포츠 이벤트 때만 끄집어내는 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일상의 뜰에 초대해 마음껏 뛰놀게 해야 한다. 얼쑤! 좋다! 그렇지! 하면서 서로 추켜 주고 격려해야 한다. 저 혼자 짊어진 삶의 무게와 부피를 버텨내기에도 버거워 그런 여력이 있겠냐마는, 그래도 조금은 덜 한 쪽에서 위로의 추임새를 건네는 건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위로가 꽃피는 동산에는 아귀다툼이 기웃거리지 않는다. 얼쑤! 추임새의 에너지는 역설적이게도 상대의 말을 잘 듣는 데서 나온다. 추임새는 태생적으로 장단을 놓치지 않기 위해 소리꾼의 가락에 귀 기울여야 하니 그럴 것이다. 그 정성에는 배려의 마음이 꿈틀거린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면서, 위로와 격려를 사이사이 스며들게 해 상처를 치유해주는 모습이다. 그 추임새에 감동해 희망과 용기를 얻고 눈물 흘리는 광경이 이따금 목도된다. 한나절 건넨 추임새를 저울에 달아보면 무게가 얼마나 될까?

2017-08-02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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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마중물의 전설

하! 후텁지근하다. 그 시원한 살랑바람은 다 어디로 간 걸까. 기껏 불어오는 굼뜬 바람도 진땀을 뺐는지 끈적끈적하다. 열대 우림에 덮인 느낌이다. 이런 찜통더위를 어디 한두 번 겪는가마는, 매번 낯 설은 여름 대하듯 호들갑을 떤다. 계절의 진통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아우성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산과 강, 들녘을 때맞춰 새 옷으로 입혀주는 그 고마운 계절을 무관심속에, 그저 오면 오는가보다 가면 가는가보다 싶게 살아왔다. 여름의 열정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피서 대열에 오르는 길. 차창 너머로 헉헉대는 사람들을 보면서 미처 몰랐던 계절에 대한 상념들이 불쑥 떠오른다. 계절은 늘 조신했다. 밤낮 모르게 조용히 저 먼저 달려와 계절의 길목에 살포시 앉아 있었다. 아지랑이를 피어 올릴 때도 그랬고, 꽃봉오리를 맺을 때도 그랬고, 싹을 틔울 땐 산고가 있었지만 결코 소리 내지 않았다. 꽃피울 땐 더 조신했다. 한 잎 한 잎 숨죽이듯 펼치더니, 무더기무더기 꽃 사태로 깜짝 놀라게 했다. 몇몇 꽃들은 제 날인줄 알고 때 이르게 나와 겸연쩍어하곤 했지만, 그 착각을 불러일으킨 땡볕바람은 여름의 길목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연초록 옷으로 갈아입은 나무숲은 산그늘 아래에서 땀을 들이며 그토록 찜통더위를 경고했건만 생각이 거기까진 닿진 못했다. 무덤덤했다. 계곡도 쉬어가라 했지만 그냥 스쳐지나갔다. 물결치는 푸른 들녘이 손짓했지만 눈길 한 번 주지 못했다. 스산한 바람이 옷깃 사이로 스며들고서야 깊어가는 황금빛 가을이 왔음을 알았다. 울긋불긋한 단풍에 흠뻑 빠졌다가, 겨울이 온 줄도 몰랐다. 낙엽 구르는 소리조차 나지 않음을 느끼고서야 알았다. 전날 밤 조용히 흩뿌려 놓은 논배미의 싸락눈을, 산정의 첫 눈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이제 겨울인가 싶었다. 사계절은 그렇게 슬그머니 찾아와 시나브로 저들의 색을 입힌다. 볕을, 풀을, 꽃을, 단풍을, 눈송이를, 바람을, 안개를, 비를, 아지랑이를 데려와 풍경을 만들고 숨을 불어넣는 그 계절의 장엄한 신비를 그냥 스치듯 하나의 온도로만 느꼈다. 기억 한 장이 날개를 펼친다. 고향 마을의 한 장소는 유난히 사람들이 많았다. 물 펌프가 있는 곳이다. 펌프질해 땅속의 물을 퍼 올리는 수동형 수도였다. 무더운 여름날 손잡이를 쑥쑥 눌러 길어 올린 얼음물이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곤 했다. 펌프는 묘했다. 저 갈증부터 풀어주지 않으면 물 한 방울도 주지 않았다. 한 바가지 물을 부어줘야 땅속에서 잠자는 물을 콸콸 불러냈던 것이다.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펌프질에 동력을 실어줄 물이 필요했던 거다. 그 물을 마중물이라고 부른다. 물이 물을 길어 올리는 광경! 그것은 귀한 손님을 마중하는 자세이며, 식수가 되어달라고 설득하는 모습이다. 펌프는 마중물 한 바가지를 부어주면 엄청난 물로 보답해주었다. 펌프는 이런 식으로 매번 마중의 지혜를 가르쳐줬지만, 그땐 몰랐다. 펌프는 늘 속을 비워두고 있었지만, 그 속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그렇다. 지금 날씨가 무덥고 짜증스런 것은 여름을 헤아리고 받아들일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없는 탓인지도 모른다. 찜통더위가, 맹추위가 닥쳐서야 겨우 계절을 눈치 채고 아우성치는 일상이다. 차안 라디오에서 누가 '무더위에 지친 몸들 힘내시라'고 던지는 말 한마디가 청렬(淸冽)한 마중물처럼 들린다. 지친 마음에 긍정의 힘을 실어주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마법의 법칙이 있다면 마중물만한 게 있을까 싶다. 한 바가지 마중물이 많은 양의 식수를 끌어올리듯, 한 마디의 마중감동이 더 큰 감동을 끌어낸다. 이 여름, 마중감동 하나씩을 마련하는 건 어떨까.

2017-07-26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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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어느 여름날의 춤추는 수채화

울창한 가로수의 잎들 사이로 여우볕이 들었다. 햇빛에 찰랑대는 잎 물결이 눈부시다. 현란하게 춤추는 것 같다. 바람 부는 가락에 따라 춤추는 수채화! 이 여름날, 시골의 가로수는 이렇게 리드미컬한 풍경을 담아내며 길손들을 맞는다. 꼬불꼬불 굽이치는 그 춤추는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정겹다. 풋풋한 풀내음이며, 상큼한 꽃내음이며, 풀풀거리는 흙내음은 덤이다. 그러나 도심의 가로수들은 이런 풍경이 아니다. 찌든 공해를 털어내려 몸부림치듯 춤추고 있다. 만약 사람에게 음악과 춤이 없다면 어찌 되었을까? 문득 이런 물음표를 달게 되는 건 비단 찌든 스트레스를 털어내는 도심 가로수의 춤 때문만은 아니다. 한 인기드라마에 작열하는 신혼부부의 춤이 그랬다. 그들은 스트레스를 푸는 해법이 막춤에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있었던 거다. 댓바람부터 날아든 스트레스! 그들은 신나는 음악을 틀더니,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막춤을 추는 장면은 신선하다. 그들의 입가엔 어느새 미소가 걸렸고, 출근길 발걸음은 경쾌했다. 축 처진 입 꼬리를 올려놓는 음악과 춤. 이런 흥겨움이 없었더라면 세상 풍경은 과연 어땠을까? 음악과 춤이 있어도 이토록 메마른데, 그런 상상만으로도 가슴 밑바닥은 바싹 마른다. 세상은 각박하고, 으르렁대는 군상들이 득실거릴 거다. 음악과 춤으로 다스려온 울화는 길을 헤매며 배회할 거다. 넓게는 지구촌 언어들이 하나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감대가 사라지고 만다. 그러고 보니 형언할 수 없는 운율과 율동의 표현들이 삶을 따스하게, 넉넉하게 해주었구나. 번잡한 도심 거리에서, 전동차 안에서, 버스 안에서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젊은이들을 보라. 더러는 가락에 맞춰 발장단을 친다. 때론 어깨를 들썩이곤 한다. 공공장소에서 저 정도면 마음은 땀을 흘리며 정열적으로 흔들어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원색적 체면을 덜어주기 위해 등장한 게 나이트클럽과 노래방일 것이다. 신나는 음악을 들으면 왜 춤을 추게 되는 걸까? 아니, 사람들은 그 흥겨움을 춤으로 표출하지 않으면 왜 가슴이 답답해진다는 걸까? 이런 우문에 인체과학자들이 어떤 해석을 내놓든 분명한 경험칙은 있다. 음악을 듣고, 벅차오르는 그 흥을 춤이라는 언어로 표출하다보면 일상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다는 것. 기쁘면 웃고, 슬프면 눈물을 흘리듯이, 쌓인 스트레스가 손으로, 다리로, 엉덩이를 통해 밖으로 배출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삶의 애환과 한을 속에 담아 두지 않았다. 휘영청 달 밝은 밤에 거문고를 타며 덩실덩실 춤을 췄다. 살풀이 굿판을 벌여서라도 스트레스를 풀었다. 춤은 왜 하필이면 상대방이 다 알아보도록 몸짓으로 표출되는 걸까?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생리적 감정 표현으로 봐야 하는 걸까? 분명한 건 춤에는 자신의 기분을 알아달라는 본능이 꿈틀거린다는 사실이다. 사랑, 기쁨, 슬픔, 즐거움, 우울함, 스트레스 등을 커튼으로 가린 언어들이 춤춘다. 가슴 한 켠에서 혼자 웅크린 채 콩닥콩닥 그치기엔 너무 답답한 것이다. 그 표현이 정제되지 않고 분출되는 게 막춤이다. 그래서 혹자는 가장 솔직한 춤이 막춤이라고 했더랬다. 요즘 우리네 어른들은 이런 춤의 감정 표현을 억누르고 산다. 가슴 뛰는 감성을 체통이라는 단단한 프레임에 욱여넣어 스스로 무디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 밭에서 신선한 젊음을 싹 틔운다는 건 어렵다. 춤이라고 해서 유별난 동작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팔다리를 움직이는 모든 동작은 춤이다. 기지개를 켜고, 크게 활보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이다. 소소한 것에도 경이로움을 느끼고, 그 감흥을 노래하고 어깨춤이라도 덩실덩실 춰보자.

2017-07-19 09:03:28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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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시간은 늘 청춘이다

우리는 시간에 너무 쫓겨 산다. 온몸으로 울려대는 자명종 소리, 씻으랴 밥 먹으랴 옷 입으랴 부산한 아침, 북적거리는 지하철역, 길을 재촉하는 버스안내전광판, 카운트다운을 세며 깜박거리는 신호등, 보채듯 빵빵대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 소실점을 향해 질주하는 기차, 길게 늘어선 계산대 앞, 줄기차게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즉석 단위로 날름거리는 전자레인지, 촌각을 다투듯 쏟아내는 뉴스들, 여기저기서 터지는 스마트폰 벨소리. 분주한 사람들로 넘실대는 거리. 그렇다. 우리네 도심 주변에 흘러 다니는 시간은 성마른 표정들이다. 시간이 사람을 가만두지 않으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시간은 우리를 데리고 과거를 지나 그 끝을 알 수 없는 행선지를 향해 달려간다. 늘 사람과 함께 호흡한다. 그런데 같은 공기를 마시면서도 사람은 늙어가지만, 시간은 늘 청춘이다. 쫓기듯 데려가더니 웬 세월의 더께란 말이냐. 그 야속한 시간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으면 어느 대중가요는 '세월아 너는 어찌 돌아도 보지 않느냐'고 슬퍼했을까. 일전에 시내 한 미술관에 들려 감상한 기원전 고대미술 작품들이 이런 잿빛 시간들을 지워주었다. 수천 년의 시간이 박제된 작품들! 거기엔 깊고 넓은 부피와 무거운 질량의 시간이 감돈다. 그래서다. 그 앞에 서 있노라면 거대한 시간의 파도가 머리 위로 아른거리는 영화 속 주인공이 된다. 태고의 시간들이 층층이 응축된 가파른 파도일 것이다. 작품은 우리에게 말한다. 높다랗게 느껴지는 현재의 파도는 그 시간 앞에선 그저 사소한 잔물결과 점에 불과하다고. 그토록 쫓기듯 집착하던 시간이 왠지 부질없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세월을 담아낸 작품들은 매번 이렇게 시간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고 가슴 치게 하는 것이다. 우린 씨줄과 날줄로 엮은 거미줄 시간에 갇혀 얼마나 조바심 내며 발버둥을 쳤던가. 얼마나 몸살을 앓아왔던 걸까. 반짝거리는 작품들은 도시생활에 찌든 내 무채색의 시간에 큰 너비로, 두께로, 무게로 걸어온다. 그 큰 너비는 넉넉한 여백을, 두께는 등을 기댈 기둥을, 무게는 겸손을 선물해준다. 이따금 기웃거리는 박물관에는 신비로운 시간이 흐른다. 그곳 풍물을 이해하려면 시차의 강을 건너야 한다. 문화와 종교, 민족, 인종이 파도치는 강을 광폭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겹겹이 쌓아온 시간들을 풍물들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니 몰이해할지라도 어렴풋하게나마 그 시간의 맥박을, 냄새를, 사연을 느끼고 들을 수 있다. 시간은 살아 숨 쉬는 생명체이기에 그럴 것이다. 그 시간의 너른 강을 휘적휘적 누비는 것만으로도 내겐 벅차다. 고대 미술품을 보면 고색창연한 시간의 물감을 풀어놓았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 때가 있다. 기막힌 풍경들을 만들어주고 사라진 시간들의 흔적이다. 그러나 죽은 시간은 아니다. 그 때 그 청춘의 시간이 여전히 발효하면서 부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저 오랜 세월을 머금고 있는 작품을 보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는지도 모른다. 잠시나마 시간 밖 뜰에서 뛰놀게 하는 순간이랄까.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났기에, 그 시간만큼은 천천히 마디게 흐른다. 이런 시간들을 가끔 꺼내볼 수 있다면 좋겠다. 있긴 있다. 마음속의 박물관! 시간 속에 떠다니는 삶들을 담아 내 박물관의 밭에 심어 한 폭의 삽화를 만들고 싶다. 그래서 아등바등 시간에 쫓길 때마다 그 박물관을 노크하련다. 허물어진 시간들을 성찰하고, 다듬어 바로 세우고 싶다. 유난하게 야단스럽고 변덕스런 시간들을 보듬어주고 싶다. 내 박물관 출입문에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시간의 주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시간에 끌려 다닐 것인가.

2017-07-12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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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눌은밥의 힘

내 하루의 파이팅은 눌은밥에서 나온다. 노르스름한 밥 알갱이들이 숭늉 안에서 보글거리는 눌은밥! 먹음직스런 색감도 그러거니와 그 눋는 냄새의 구수함에 오감(五感)이 먼저 알고 깨어난다.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샘솟는 게 파이팅을 외치는 것 같다. 아침마다 그 호사로움에 한 그릇은 뚝딱이다. 영양성분에 대해선 잘 모른다. 그러나 내 생활 영역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활력에 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단조롭고 후줄근한 삶에 의욕이라는 불을 댕긴다. 사전에서는 눌은밥을 '솥 바닥에 눌어붙은 밥에 물을 부어 불려서 긁은 밥'이라고 풀이한다. 쉽게 말해서 솥 바닥에 눌어붙은 밥이 누룽지이고, 거기에 물을 부어 불려서 긁은 밥이 눌은밥이다. 그러나 내 일상에서 느끼는 개념은 그 사전 밖에 있다. 눌은밥에는 김이 모락거리는 숭늉과 노릇노릇한 밥 알갱이들만 담겨 있는 게 아니다. 삶의 무게를 풀어주는 따스함과 넉넉함, 위안, 정성, 감동, 고향 같은 상념들이 한데 어우러져 눌은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눌은밥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개념 그 이상이다. 호호 불어가며 한 술 뜨면 훈훈해지는 것이 마음마저 따스해진다. 어이쿠 시원하다! 눈꺼풀은 여전히 무거운데 입에선 이런 감탄사가 터지곤 한다. 눌은밥을 먹는 시간은 적어도 내겐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시간이며, 오늘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의 시간이다. 하루를 개시하는 팡파르다. 눌은밥의 힘이라는 게 이런 걸까. 하루를 활기차게 살아낼 실마리를 눌은밥이 따스하게 풀어준다고 생각할 때가 더러 있다. 그게 한 끼 식사가 되겠냐고 누가 물음을 해오면 주저 없이 그렇다고 대답을 한다. 눌은밥에는 식욕의 끄트머리에서 서성거리는 허전함까지 채워줘야 마음이 놓이는 애틋함이 배어 있다. 말하자면 맨 마지막까지 남아서 한 끼 식사를 끝마무리해야만 부엌문을 닫는 우리네 밥상문화 본연의 유전자가 거기에 흐르는 것이다. 먹은 거 같지도 않게 먹었는데도 포만감을 느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걸쭉한 것이 포만감을 완성하면서도 속이 편한 게 눌은밥의 본질이다. 우리 집 눌은밥은 양은냄비로 만들어낸다. 깜짝 놀랄만한 특별한 레시피는 없다. 그저 냄비 바닥에 얇게 눌린 밥을 약불로 5분만 눋게 하면 맛난 누룽지가 만들어진다. 여기에 물을 자작하게 넣어 끓이면 숭늉과 함께 눌은밥이 완성된다. 가마솥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꼬들꼬들한 식감도 별미이지만 입맛을 당기게 하는 건 구수한 냄새와 노르스름한 빛깔이다. 그렇다 해서 센불에 오래 태우면 그 황금 비율의 빛깔과 구수함이 나오지 않는다. 이게 레시피의 비책이다. 눌은밥은 계절을 따지지 않는다. 굳이 계절에 맞서지 않아도 땡볕 여름에는 오히려 속을 시원하게 해주고, 얼음 겨울에는 속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맛은 사계절 내내 한결같다. 식으면 식은 대로 그 나름의 식감이 있다. 유별난 반찬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김치를 곁들이면 칼칼한 맛으로, 비릿한 생선은 고소한 맛으로 재탄생시킨다. 나물이며, 풋고추며 어떤 찬이든 맛있게 받아들이고 소화해낸다. 간장 한 종지를 만나도 아침을 개운하게 하는 신통력을 부린다. 나는 눌은밥을 먹으면서 지혜를 배운다. 어떤 것이든 받아들일 줄 아는 배려와 포용력을. 세월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어도 그 변함없는 맛에서, 큰 바람과 큰 풍랑을 견뎌내는 한결같은 뚝심을 배운다. 인스턴트가 세상에 쏟아져 나와도 눌은밥은 늘 그 자리에 있기에 마음의 고향 같은 음식인 것이다. 오늘 아침 눌은밥을 먹으며 이만한 고부가가치 음식이 있나 싶다. 포만감에, 활력과 지혜의 가치들이 보태져 약동하는 것을.

2017-07-05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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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나 어때?

오랜 가뭄 끝에 엊그제 단비가 내렸더랬다. 비에 씻긴 바람이 시원하다. 텁텁하고 후덥지근하기만 하던 땡볕 바람이 아니다. 파릇파릇해진 풀냄새까지 묻어나 상큼하다. 나는 그 풀바람을 맡으며, 저 아득한 곳에서 달려왔을 바람의 숨결을 느껴본다. 직립보행의 원시림 산을 넘어 청동기와 철기시대를 굽이치고, 폭풍 근대의 강을 건너 이제 첨단 빌딩숲에서 나부끼는 바람을. 나는 그 긴 세월을 몰고 온 바람의 끝자락에서 덩실덩실 춤추는 신세대의 신기루를 본다. 나는 그 춤추는 바람을 신세대 바람, 신바람이라고 부른다. 신바람은 일신(日新)하고 우일신(又日新)하는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며 인류 문화의 기류를 산뜻하게 바꿔 놓았다. 두껍게 형성된 구태 문화권의 집착을 깨워 번쩍 눈뜨게 한 것이다. 신바람이 휘몰아칠 때마다 시들해진 문화에 생기가 확 돌았고, 세상은 약동했다. 문화의 얼굴은 재기발랄하게 빛났으며, 표정은 밝았다. 내 부모 신세대 때도 그랬고, 7080 내 신세대도 그런 환류 속에 신문화를 꽃피웠다. 신바람의 풍향은 세대별로 달랐다. 존재감의 표출 방식을 보면 그 풍향의 눈금이 보인다. 내 부모 세대의 존재감은 아름드리 느티나무에서 발견된다. 색 바랜 흑백 필름에 그런 장면이 스치곤 한다. 한 청춘녀가 "날 잡아봐" 하곤 머리카락 휘날리며 저만치 뛰어가 느티나무 뒤에 숨으면, 청춘남은 짐짓 놀란 척 이름을 부르며 슬로모션으로 뒤쫓는 장면을 말이다. 일상도 늘 그런 풍경이었다. 뒤꼍에 꼭꼭 숨어 마른 헛기침을 연신 해대며 존재감을 표출했던 거다. 그 헛기침에는 권위주의, 체통, 타령, 눈물, 한이 묻어 있다. 내 부모 세대의 존재감 표출 방식은 '날 보러 와요'이다. 지극히 수동적인 자세다. 상대방이 나에게 다가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것이다. 다들 속내는 달떴지만 내숭떨기가 여간 아니었다. 속이 타들어갔을 것이다. 청춘남녀 모두가 그런 자세이니 오작교를 놓아줄 중매쟁이가 필요했던 거다. 얼굴사진과 신상명세서를 과감히 들이밀며 짝을 찾는 지금의 지상 중매시장과는 그 자세부터가 다른 것이다. 부모세대가 '날 보러 와요' 바람이 불었다면, 7080 세대는 '나 어떡해'의 맞바람으로 머리카락이 나부낀다.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주제곡명이기도 하다. 이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치며 청춘 거리를 누볐다. 세태의 풍경은 느티나무 뒤에서 얼굴을 드러내는 모습이다. 얼굴을 내밀긴 했는데, 그러나 여전히 '나 어떡해'다. 쑥스럽고 어색한 민낯이 읽힌다. 이런 어정쩡을 가려주고, 해갈해준 건 음악다방이었다. 당시 미팅이 꽃피고, 음악다방이 성업을 이룬 이유다. 더러는 소리로 자신의 존재감을 표출하곤 했다. 내 부모 세대가 뒤꼍에서 헛기침을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면, 7080 청춘은 통기타를 들고 나와 스펙을 과시했다. 지금 부는 신바람은 '나 어때?'이다. 그 물음 속에는 톡톡 튀는 개성이 꿈틀거린다. 당돌하지만 나만의 끼, 나만의 색깔, 나다움! 그것이다. 아류가 아닌 본류를 찾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정이 읽힌다. 그게 진정한 존재감일 것이다. 그래서다. 요즘 신바람은 예전보다 훨씬 당차고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다. 어느 세대든 가장 새 것과 색 바랜 꼰대의 맞바람 속에서 문화의 꽃은 지고 피었다. 지금의 신바람에는 디지털 첨단기술이 소용돌이치지만 그 폭풍의 와류 속에는 아날로그 감성이 흐른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신문화가 좋은 풍향으로 진화하는 까닭일 것이다. 그렇다. 신문화는 내 눈을 번쩍 뜨게 하고, 안이해지려는 내 일상을 깨우쳐준다. 시대와 호흡하려면 어쩌겠나.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신문화의 눈금을 빨리 읽어야 하는 것을.

2017-06-28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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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눈물겨운 기다림

문득 하늘을 쳐다볼 때가 있다. 그런 날이 있었다. 호젓한 산길을 거닐 때였다. 덤불숲 사이로 나리꽃 한 줄기가 여름을 향해 발돋움하고 있었다. 주홍빛 불꽃이 너무도 화사하고 눈부셔, 그 튕겨내는 빛을 따라가다 보면 고개를 들고 눈을 비비게 되는 것이다. 바람 한 자락에 하늘거리는 가녀린 꽃. 그 몸짓이 반갑고 애틋한 것은 아름다워서만은 아니다. 그 꽃을 피우기 위해 약육강식의 덤불숲 그늘에서 고난을 얼마나 참아왔던 걸까. 또 얼마나 몸부림쳤던 것일까. 그렇게 꽃피우기까지 모진 삶을 겪어왔을 나리꽃. 꽃잎에 대롱거리는 이슬이 눈물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그 나리꽃을 바라보며 나는 기다림을 생각한다. 치열한 땅을 짚고 혼자 힘으로 꽃피운 생명의 신비! 그 기적의 힘은 필시 기다림에서 나왔을 거라는 것. 고통스럽기에 기다림은 길었지만 참고 견디면 저 눈부시도록 찬란한 꽃을 활짝 피울 수 있다는 것. 삶이란 어쩌면 어떤 기다림을 위해 고통을 겪으며 피어나는 나리꽃인지도 모르겠다. 삶이라는 게 이런 걸까. 사람들은 기가 막힌 일을 당했을 때 하늘을 응시한다. 원망의 눈길이다. 더러는 절망하고 좌절하고 주저앉는다. 나리꽃은 그러나 비바람이 불든, 천둥 번개가 치든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다. 참고 견디며 기다렸기에 그 기막힌 일을 당하고도 기어이 활짝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가만히 침묵하면서 기다린 건 아니다. 폭풍이 몰아치면 쓰려지지 않으려 그 연약한 뿌리로 땅을 움켜잡아야 했으며, 햇빛을 받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줄기의 몸을 일으켜 세워야 했다. 나리꽃은 그런 시련 속에서도 결코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정중동(靜中動)! 조용하고 고요한 가운데 움직였다. 잠잠하다고 해서 움직임이 더디고 굼뜬 것은 아니었다. 뿌리와 줄기는 때론 메마른 땅에서 이슬 한 모금을 축이려 밤새 사투를 벌여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꽃피웠기에 불꽃같은 저 주홍빛 꽃잎을 바라보고 있으면, 불타오르는 용광로에서 금을 뽑아내는 연금술사를 연상하게 한다. 그 정중동의 의식 밑 심층에 용광로 같은 들끓는 기다림의 물결이 흐른다. 얼마나 값지고 당당하고 아름다운 자태인가. 나리꽃의 기다림은 준비하고 노력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기다림을 노력의 과정이라고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목표 없는 노력은 없고, 참고 견디며 그토록 기다리는 것은 눈부신 꽃이라는 행선지가 있는 까닭일 것이다. 노력 없이 단순히 기다리면서 꽃피우겠다는 건 나리꽃에겐 웃긴 얘기다. 그건 방황이다. 정처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것과 같다. 희망의 꽃은 노력 없이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기다림은 새로운 도약을 위해 뜸을 들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마냥 침묵하는 건 아니다. 밥 짓는 광경을 보라. 재래식 가마솥이든 압력밥솥이든 첨단 전기밥솥이든 뜸들임이 없다면 밥은 설어버릴 것이다. 밥알들이 이리저리 뒤집히고 요동친 다음에, 기다림이라는 김이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며 밥을 차지고 맛있게 익게 하는 이치다. 같은 쌀이라도 뜸들임 정도에 따라 밥맛이 천차만별인 까닭이다. 보석의 가치를 결정하는 세공사의 다듬기 과정과도 같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바람에 나부끼는 나리꽃을 바라보면서 이런 물음을 던지게 된다. 인생이란 원래 험난하다. 편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바람과 물결이다. 목적지를 향해 순항하기도 하고, 맞바람을 만나면 표류하기도 한다. 때론 풍랑 속을 헤쳐 나가야 하는 게 인생좌표의 숙명이다. 나리꽃이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다. 내일의 기다림이 있기에, 그리고 오늘 그것을 하나하나 성취해나가기에 세상 살맛이 나는 것이라고.

2017-06-21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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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마당에서 비움과 채움을 배운다

일전에 사진 한 컷이 번잡한 마음을 내려놓게 해주었다. 어느 시골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 안에는 고색창연한 한옥 풍물이 담겨 있다. 그런데 정작 마음을 쉬어가게 해주는 곳은 한옥이 아니라 산그늘이 내린 숲속의 빈터, 그 집의 마당이다. 아늑하고 널찍한 것이 그 때 느꼈던 감성에 젖어들면 절로 평온해진다. 남는 게 사진이라고 했던가. 그냥 무심코 스치듯 찰칵 박은 사진 한 장이 도심생활의 메마른 내 마음을 오아시스로 적실 줄은 미처 몰랐다. 우리네 집 마당은 희로애락의 가족사가 흐른다. 그 흔적을 읽으려 사진 속으로 들어가 본다. 마당 한가운데에 서서 서성거리면 낯설지 않은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마당에 널어놓은 고추 멍석에, 한가득 눈부신 햇살이 내리쬔다. 멍석 위로 휙 훑고 지나가는 바람 한 자락이 시원하고 불타게 맵다. 마당은 다용도로 오버랩 된다. 아이들이 뛰놀면 동네 놀이터가 됐고, 장대를 세우면 마당은 빨래 건조대가 되어주었다. 때론 결혼식장으로, 잔치마당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사진 속의 마당은 내게 많은 걸 선사한다. 여백의 여유를 가져보게 하고, 풍경을 그려보게 하고, 마당을 거닐게도 한다. 왁자지껄하고 북적거렸을 마당. 지금은 고요하고 텅 비어 있다. 그 마당이 내 눈을 더욱 반짝거리게 하는 건 삶의 큰 지혜를 가르쳐주어서다. 한바탕 흥을 치르고 난 뒤엔 마당을 비워둬야 또 다른 뭔가를 채울 수 있다는 것을. 비울수록 풍부해지고, 새로움이 샘솟는다는 비움의 미학! 그것은 신선한 삶을 노크하는 물결이고, 동력이며, 바람이다. 텅 빈 마당은 먼지만 풀풀거리는 공터가 아니었던 것이다. 빈 마당의 정적은 다음에 펼쳐질 더 큰 이벤트를 준비하는 폭풍의 전야다. 옛 조상들은 그것을 알아차렸다. 마당을 늘 비워두었다. 비워두었기에 사람들이 모였고, 다양한 생각들이 나왔고, 흩어진 마음들이 하나로 모였다. 마당에 평상을 얹어 놓으면 달빛 아래에서 이야기꽃이 수북수북 피어났다. 케케묵어 식상한 얘기들은 흘러나가고, 신작 스토리들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사진 속 마당도 그랬을 것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공원이나 길거리를 걷다가 문득 참신한 아이디어가 번득일 때가 있다. 이끼 낀 생각의 노폐물들을 털어내고 그 빈자리에 새로운 생각의 꽃이 피어난 까닭일 것이다. 귓구멍 속의 귀지 덩어리가 무심결에 떨어져나가 귀가 밝아지듯 뇌력이 총명해지는 순간이다. 그 생각의 꽃은 언젠가 생활의 지혜로 만개할 것이다. 더러는 과학이 되고, 전설이 된다. 비움이란 뺄셈하듯 매번 마음만 먹으면 무념무상의 경지에 쉽게 이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채움에 급급한 덧셈 시대에 비움이 어디 쉬운가. 더 많은 돈을 벌고, 입고, 먹고, 듣고, 보고, 많이 갖고자 하는 덧셈의 욕망이 끝이 없는 것을. 일상들이 덧셈의 덫에 갇힌 형국이다. 버리는데 익숙하지 못해 장롱에 수년째 옷이 쟁여지고, 창고에는 필요 없는 물건들이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채로 골동품마냥 박혀있는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이런 욕망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해 번뇌하고, 발버둥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비움의 마당을 그리워하면서. 나는 되풀이되는 일상의 번잡함을 비우기 위해 여행을 떠나곤 한다. 연초록빛 물감을 뿌려놓은 산과 에메랄드빛으로 너울거리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삶의 시간이 길게 늘어나고 세상이 넓어진다. 영혼이 자유롭게 뛰놀 비움의 여백을 안겨주는 것이다. 가까운 강가에 나가 졸졸거리는 시냇물 음악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청렬해지고 비워진다. 행복이란 비울 줄도 알고 채울 줄도 아는데서 싹트는 게 아닐까.

2017-06-14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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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단 한 장의 청춘 티켓

바람 부는 날 소나무를 만나면 문득 상념에 젖곤 한다. 저 싱그러운 푸른 잎을 어떻게 지켜온 것인가? 세찬 비바람과 얼음 추위에 시달리며 생을 이어왔을 이파리들. 그 모진 수난을 어떻게 견뎌온 것인가? 사태진 누런 황토를 뿌리로 움켜잡은 소나무. 이파리를 나부끼며 산 아래를 굽어보는 그 자세는 삶에 대한 끈질긴 애착이며, 강한 집념의 표출이다. 돌처럼 단단히 여문 저 굴곡진 나뭇가지마다 인고의 상흔이 남아 있건만 오히려 당당한 척 하기에 눈물겹다. 그런 소나무에서 청춘(靑春)을 발견한다. 늘 푸른 이파리의 생기발랄함이, 사방으로 뻗은 나뭇가지의 자유분방함이 청춘의 어감이 자아내는 원초적 본능과 닮아 있다. 산등성이에 홀로 선 채 태양을 바라보는 늠름한 기상은 원대한 이상(理想)을 꿈꾸는 모습에 다름 아니다. 파도처럼 굽이치는 자태에서 질풍노도의 숨결이 물씬 묻어난다. 닮은 게 어디 타고난 소나무의 형상뿐이랴. 코를 톡 쏘는 짙은 솔향기에는 벅차오르는 설렘이 묻어 있다. 바람 불면 운율을 탄다. 청춘의 사전적 의미는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 또는 그런 시절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사전이 일러주는 청춘은 길어봐야 십년 남짓.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그 청춘은 짧았다. 불꽃처럼 반짝거렸던 청춘이었다. 이 유월에 메뚜기 한철 같은 청춘. 산천 구경을 만끽하며 완보하리라는 그런 청춘 열차는 아니었다. 눈 깜짝할 새 스쳐 지나간 구간. 그 짧고 금쪽같은 청춘 구간에서 대체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 인생의 열차는 행선지가 있다. 아, 이제야 깨닫는구나. 인생의 행선지는 그 황금시간대를 지나면서 아로새겨졌다는 것을. 단 한 장의 청춘 티켓! 꿈과 이상, 희망을 싣고 어디론가 데려다줄 백지 티켓. 청춘 구간에서 미래의 인생 로드맵이 시나브로 그려졌을 거라는 생각을 할 때면 전율이 인다. 과연 열정을 다해 청춘을 꾸려왔던가? 배회하며 허송세월한 건 아닐까? 귀한 젊은 시간들을 허공에 날린 건 아닐까? 이 물음을 곱씹을 때마다 후회한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청춘은 천재지변에도 봄이 오듯 찾아온다. 어느 누구든, 어디에 있든 기어이 오고야 만다. 흙수저든, 헐벗었든, 주린 배를 움켜쥐었든 찾아온다. 청춘은 이런 공평한 내력을 지니고 있기에 고맙다. 문제는 어떻게 쓰느냐다. 그건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그 길에는 늘 설렘만 있는 게 아니다. 때론 좌절과 절망, 불안, 아픈 마음의 파도를 이겨내야 한다. 구름이 잠시 해를 가려 마음이 어두워지더라도 인내할 수 있는 큰 그릇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청춘의 본질이다. 청춘의 계절은 봄이다. 소나무의 청춘은 계절을 탓하지 않는다. 늘 푸른 잎을 지켜오기에 사계절 내내 청춘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사람들은 흔히들 청춘을 '보내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어느 대중가요의 '청춘을 돌려다오' 노랫말이 중장년층의 마음을 달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흐르는 세월을 탓할 일만은 아니다. 청춘을 누가 빼앗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다. 청춘은 내가 받아들이고 간직하면 되는 것이다. 이상을 꿈꾸는 것도, 젊게 사는 것도 내 몫이다. 청춘은 과거를 말하지 않는다. 왕년이란 단어는 없다. 미래만 있을 뿐이다. 미래를 준비하는 자, 그들에게는 희망찬 설계도만 있을 뿐이다. 청춘의 뜰에 왕성한 추진력의 샘물이 솟구치는 까닭이다. 그런 뜨거운 열정으로 인생을 배우고 갈고닦아 청춘을 꽃피우는 것이다. 가슴에 청춘이 박동하지 않는다면 인생이 얼마나 쓸쓸할까. 세상이 고단하고 번잡할지언정, 그래도 태양이 힘차게 떠오르는 건 청춘 때문이 아니겠는가.

2017-06-07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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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 '치매 국가책임제' 이행 강조...재원 마련 문제없나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자신의 대표 복지공약인 '치매 국가책임제' 이행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재원 마련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2일 국민건강보험 서울요양원을 방문해 치매 환자와 그 가족, 간호 종사자 등을 만난 자리에서 " 치매 관련 본인 건강보험 부담률을 10% 이내로 확 낮추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 "이제는 치매환자를 본인과 가족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국가와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한다"며 "복지부에서 6월 말까지 치매국가책임제의 구체적인 방안을 강구해서 보고해주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의 치매 국가책임제 공약은 크게 치매관련 시설 확대 및 치매 치료비 본인 부담 완화로 요약된다. 먼저 지역사회 치매지원센터 설치를 확대해 치매검진 및 조기 발견, 의료·복지·돌봄·요양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또 전국적으로 치매책임병원을 지정해 진단 및 치료서비스를 제공할 방침이다. 치료비 부담을 위해서는 치매 의료비 90%가 건강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노인장기요양보험 본인부담 상한제를 도입할 계획이다. 이날 문 대통령은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이 치매지원센터를 대폭 확대하는 것"이라며 "치매지원센터가 현재 47개밖에 되지 않는데 그것도 40개 정도는 서울에 있다. 이를 250개 정도로 대폭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치매 국가책임제의 본격적인 시행 시점을 내년으로 보고 있다. 이를 위해 올해 추경에 우선적으로 관련 예산 2000억원을 반영해 올 하반기부터 첫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하지만 정부의 이같은 재원 마련 대책에 우려를 나타내는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자유한국당과 국민의당, 바른정당 등 야 3당이 정부의 일자리 추경안에 대해 강경 모드로 돌아서면서 추경 예산 통과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 정우택 원내대표는 지난 1일 기자간담회를 열어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10조원 남짓의 추경안 취지는 공공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것으로 듣고 있는데 일시적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국가재정법에 규정돼 있는 추경안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바른정당 주호영 원내대표도 같은 날 의원전체회의에서 "국가재정법 89조는 추경 편성 요건을 전쟁이나 대규모 재해가 발생한 경우, 경기침체·대량실업 등 대내·외 여건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한 경우로 규정했다"며 "이번 추경이 이런 요건들에 과연 해당되는지 의문이 든다"고 강조했다.

2017-06-04 15:08:33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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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욕망의 사용설명서

인공지능(AI) 알파고는 발칙했다. 알파고와 커제 9단과의 바둑 대결. "너 이거 알아?" 알파고는 일찍이 보지 못했던 묘수를 던졌다. 알고리즘 전술은 가히 변화무쌍했다. 예기치 않은 파격수가 바둑판에 착착 꽂혔다. 인간계 최고수는 그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땀을 뺐다. "그렇게 밖에 못 두겠니"라고 속삭이는 거 같았다는 게임. 결과는 삼세판 모두 알파고의 승. 커제는 참았던 눈물을 떨궈야 했고, 알파고는 인간계 바둑의 천하를 평정하며 기세등등했다. 천하무적의 돌을 휘둘렀던 알파고는 그러나 돌연 바둑판에서 손 떼겠다고 선언했다. 인간들은 '바둑의 신' 강림을 연호하며 부여잡았지만 알파고는 냉정하게 뿌리쳤다. 은퇴의 변이 섬뜩하다. 인간이 굳이 가르쳐 들지 않아도 스스로 새로운 논리와 지식을 깨우칠 수 있다는 저 불꽃 스치는 예고가. 그것은 5천년을 갈고닦은 인간 바둑판에선 더 이상 배울 게 없다는 비아냥거림으로 들렸고, 바둑 평정은 시작에 불과하고 곧 인간 세계를 지배할 거라는 선전포고였다. 물론 공학도에겐 장밋빛 청사진으로 들렸을 것이다. 더러는 새로운 문명의 지평을 여는 세기적 대사건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을 거다. 그런데 그 역습에 대한 출구전략은 여태 들어본 적이 없다. 구글의 딥마인드 측은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느냐를 정하는 것은 사람'이라고 경계했다. 문제는 그 가이드라인을 점지한다는 사람들의 품성. 모두가 성인군자일 수도 없거니와, 진화에 질주 본능을 드러내는 인공지능이 자칫 이성을 잃으면 어디로 튈지 아무도 장담 못한다. 그래서다. 이런 물음을 달게 된다. 그 욕망의 끝은? 가늠조차 안 된다. 어렴풋하게나마 그 끝은 감정과 자아를 지닌 그 무엇에 닿는다. 마음의 씨를 이식한 그 무엇. 그것도 창의력을 갖고 스스로 학습하고 진화하는 능력을 갖춘다면? 과학자들은 그런 초인공지능(ASI)을 가진 인간 아바타가 30년 내 출현할 걸로 보고 있다. 만물의 이치를 통달한 척척박사 빅 데이터 칩이 불티나는 풍경도 그려진다. 그 칩을 인간 뇌에 끼운 '증강지능 인간(AHI)'의 등장을 말이다. 알파고는 그런 밑그림까지 그리며 욕망의 입을 벌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당장 돈이 되는 쪽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의학이다. 수천만 건에 달하는 진단. 이 방대한 예시들을 자율학습해 환자의 증상에 따라 병명을 속전속결로 진단하는 의사로 변신할 것이다. 다음 욕망은 한 치의 오차를 허용치 않는 정교한 '시술의 신'이다. 신약 개발은 그야말로 돈밭이다. 고급 인력들이 머리를 맞대고 수년씩 걸리던 특효약을 혼자서 수 주 내에 개발할 거다. 그렇다면 그 욕망의 끝은? 하나같이 척척박사 뇌 칩으로 무장된 영재들! 손만 스쳤다하면 완치되는 시술! 만병을 통치하는 불로초 개발! 과연 이런 게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그런 상황을 '인류의 종말'로 봤다.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는 '악마의 소환'이라고 경고했다. 나는 그들의 말을 믿는다. 만일 상품화된 칩에 오류의 알고리즘 바이러스가 창의적으로 증식한다면? 오판에, 오진에, 오작동에 세상은 출구 없는 대혼란에 빠질 거다. 인공지능이 좇는 욕망의 끝은 신의 영역일 거라는 생각이 전율처럼 스친다. 인공지능이 제아무리 날뛰어도 인간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조물주의 절대 명제. 스포츠 경기에 심판 없이 비디오판독기가 승부를 판정하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숨 쉬지 않고 번민하지 않는 기계 의사에게 생명을 맡긴다고 그려보라. 그건 인류 종말의 축소판이다. 어쩌면 신이 인간의 뜨거운 가슴 속에 욕망의 사용설명서를 넣어줬는지도 모른다. 그 사용설명서가 궁금하다.

2017-05-31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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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냄새의 미학

황토 담을 따라 꾸불꾸불 이어진 고샅길. 밥 짓는 연기를 피어 올리는 키 작은 굴뚝. 여기에 홍조 띤 저녁노을이 산 아래로 나지막이 내려와 동네 어귀를 덧칠하면 한 폭의 풍경화가 따로 없다. 이 목가적 풍경을 떠올리는 건 눈의 호사 때문만은 아니다. 저 황토 담장 너머로 솔솔 전해져오던 된장찌개 내음이 그리워서다. 어찌나 구수하게 진동했던지. 우리 집 된장찌개 냄새인가? 동네 아이들은 술래잡기에 푹 빠졌다가도 침을 꼴딱거리며 집으로 줄달음을 놓았다. 투박한 뚝배기에 보글거리는 토종 된장찌개! 입맛이 영 시들할 땐 저 풍경 속의 냄새를 떠올리면 구미가 샘솟는다. 이 글을 쓰면서도 군침이 절로 괴는 것을 어쩌랴. 이따금 그 냄새의 흔적을 찾아 내로라하는 맛 집을 들르곤 한다. 그러나 매번 고개를 가로 젓는다. 전가의 보도처럼 수십 년 간 바통을 이어오는 전통 된장집이 없어서가 아니다. 세월 따라 맛 따라 출렁거리는 변덕스러운 입맛 탓도 아니다. 풍경 속의 냄새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구수했던 된장찌개 냄새는 왜 보이지 않는 걸까. 그것은 풍경 속의 된장찌개에 또 다른 냄새가 시나브로 스며들어 있어서다. 밥 짓는 연기 냄새, 물바람에 묻어온 흙냄새, 울긋불긋 피어난 꽃들의 향이 파도처럼 물결쳤을 것이다. 눈과 귀로 맡을 수 있는 풍경의 냄새도 아른거렸을 것이다. 황토 담장, 툇마루, 아늑한 저녁노을, 졸졸거리는 개울물, 춤추는 나무숲, 풀밭에서 뛰노는 아이들, 산 중턱에 걸린 달. 이런 감성의 냄새들이 된장찌개에 배어있었던 거다. 마음 밑바닥 어딘가에 묻어둔 냄새의 편린들! 아, 이제야 가슴을 친다. 그 풍물 냄새들이 한데 어우러져야 비로소 내 추억의 된장찌개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구나. 그 때 그 시절의 향취와 체취를 버무려 맛을 낸 냄새랄까. 오랜 세월 기다림으로, 그리움으로 절여진 그 냄새. 어쩌다 옛 고향 풍경과 엇비슷한 마을길을 거닐다 된장찌개 내음이 스치면 왜 기시감을 느끼게 되는지, 군침 도는 된장찌개를 먹고도 왜 까닭모를 허기증을 느끼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설령 고향을 무대로 똑같은 풍경과 소품들을 끌어다가 찌개를 끓인다 해도 그 된장 냄새를 재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공기 좋고 물 맑은 자연의 풍물이 존재하지 않거니와 장맛도, 손끝 맛도 다르다. 분위기는 또 어떤가. 세월에 따라, 시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냄새는 그 풍경 속에서 날개를 펼쳐 배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냄새를 더듬거리면 툇마루에 동그마니 올라앉아 달을 쳐다보는 단란한 가족이 보이고, 오순도순 옛 이야기가 들려온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두고두고 맛보는 된장찌개. 추억은 보글보글 된장 알갱이를 튕겨 내는 뚝배기에 닿는다. 보는 것만으로도 입안에 군침이 돈다. 그래서다. 된장찌개는 꼭 뚝배기에 끓여 먹는다. 왠지 뚝배기가 어릴 적 맛보았던 된장찌개 맛을 끄집어내줄 것만 같아서다. 뚝배기를 보면 인간적인 여백이 보인다. 투박하지만 후한 인심, 은근히 오래가는 따스한 정, 가식이 없는 소박함, 좀 부족하지만 진솔한 향기가 뚝배기에서 묻어난다. 사람과 닮은꼴이다. 뚝배기 같은 사람! 그런 사람에게는 인간미가 묻어난다. 사람냄새다. 삶이 팍팍할수록 사람냄새가 그리운 법이다. 향기 나는 사람이랄까. 자신을 낮추고 배려하는 그런 사람들은 주변에 많다. 더러는 고단한 사람들이 마음껏 뛰놀게 해줄 넉넉한 마음의 뜰을 가진 사람도 있다. 인간적인 여백이다. 풋풋하고, 순박하고, 토속적인 사람. 내 추억의 된장찌개 맛이 그리운 건 어쩌면 그 때 그 시절의 투박한 사람냄새를 그리워하고 있는 건 아닐까?

2017-05-24 09:07:28 메트로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