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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눈물 젖은 자장면

한 폭의 삽화가 추억의 날개를 펼치려하는 걸 보니 설날이 다가왔나 보다. 어떤 그리움이 성큼 달려와 노크하는 육감이랄까. 설맞이 할 즈음이면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세월은 흘려갔어도 여전히 가슴에 남아 심쿵거리는 게 있다. 복조리 아르바이트! 복조리는 1980년대 초 대학생 아르바이트 히트 상품이었다. 디지털시대에 이 색 바랜 추억이 외려 곧추 세워지는 건 동네방네 메아리치던 복조리 장수 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아쉬움 때문일 게다. 요즘처럼 시급 아르바이트를 한 건 아니었다. 짚으로 엮은 그 까칠한 조리를 도매상에서 직접 떼와 구색 갖춘 완제품으로 만들어 거리에 나선 아르바이트. 떼 온 조리 물량은 자그마치 2000여개. 언덕 같은 수량이었다. 우리는 동네 가게에서 빌린 손수레가 비척거릴 정도로 실어 날라야 했다. 누가 보면 무슨 큰 사업하느냐고 했을 거다. 무슨 돈으로 그 많은 조리를? 우린 땡전 한 푼 없었다. 그렇다고 부모가 한 밑천 대준 것도 아니었다. 그 많은 조리가 손수레에 실리기까지 곡절은 기막히다. 무일푼 선물거래! 이 제안에 도매상 주인아저씨는 아서라 손사래를 쳤다. 급기야 아저씨는 팔짱을 꼈고, 말똥거리는 학생들의 눈을 한참이나 바라봐야 했다. 이 당돌한 계약이 성사됐을 땐 물건 값을 꼭 갚겠다는 우리의 간곡하고도 애절한 모습이 이슬 맺힌 주인의 동공에 맺혀 있었다. 학생증이 유일한 보증서였고, 저당권이었다. 세상물정 모르던 대학생 셋이 벌인 설날 이벤트는 그렇게 이뤄졌다. 복조리는 낱개의 조리를 한 쌍으로 묶어야 완제품. 섣달 그믐날 한 명은 조리 두 개를 철사로 묶었고, 또 한 명은 붓 펜으로 복(福)자를 써넣은 노란 리본을 달았다. 나머지 한 명은 상품에 하자가 있는지 검품을 했다. 그렇게 만든 복조리가 1000여쌍. 세 대의 손수레는 얼음바람을 씽씽 가르며 동네를 누볐다. 손수레가 바닥을 드러내기까지 꼬박 이틀 걸렸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걸 어떻게 다 팔았을까 싶다. 남은 복조리는 허름한 집에 무료로 넣었다. 설날 복조리 아르바이트는 '친구 구하기' 이벤트였다. 급작스럽게 형편이 어려워진 친구의 학비 조달을 위해서였다. 아르바이트를 결산하던 날 자장면을 먹으면서 눈물을 훔치던 그 친구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모두가 손발은 얼어붙어 있었고, 눈물은 눈물을 낳았다. 혹여 친구가 눈치 챌세라 밑으로 억눌렸던 눈물은 가슴을 적시더니 끝내 눈가로 밀려왔다. 너도나도 울었다. 눈물 젖은 자장면을 먹으면서. 요즘 자장면을 먹다가도 그 친구 비슷한 사람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왜 하필이면 맛나는 자장면이냐 말이다. 그 친구는 지금 정형의과 의사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그다. 습관처럼 됐다. 지금도 셋 친구가 모이면 추억의 복조리만으로도 이야기꽃이 한껏 만발한다. 1000여 집 가까이 돌았으니 1000여 송이의 꽃이 핀다. 그 집집마다 각각의 표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 허물어져가는 집에도 행복하게 미소 짓는 걸 봤다. 복조리 아르바이트가 소중한 교훈을 가르쳐줬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건 어른이 된 후였다. 내 마음 속에 걸어둘 복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행복은 그 복조리에 무엇을 담느냐에 달렸다는 것을 일깨워줬다. 일찍이 옛 선인들은 복이란 선한 일을 했을 때 찾아오는 경사라고도 했다. 복조리를 벽에 건다고 해서 복이 오는 건 아니다. 이 겨울 마음의 대문에 '희망'을 담은 복조리를 걸어보자.

2017-01-25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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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헌책방의 겨울이야기

옷깃을 세우는 겨울날 헌책방을 만나게 되면 까닭모를 허허로움이 사무친다. 낱장마다 누렇게 바랜 헌책들을 보라. 층층이 부둥켜 움켜잡고 나달나달 떨고 있는 자태가 처연하다. 그 자태에서 아픈 세월을 본다. 무서운 속도로 엄습해오는 첨단 디지털의 와류에 부대끼고, 또 싸워온 흔적이다. 쇠락하는 시간의 공간과 기억의 창고를 사수하려니 그랬을 것이다. 촌각을 다투며 얄팍한 지식만 사냥하는 변덕스런 사람들에 대한 서운함도 짙게 배어 있다. 동네 헌책방은 좁다란 골목길 안 으슥한 곳에 들어앉아 있다. 초대형 서점과 초스피드 인터넷 책방에 주눅 들어서일까. 쭈뼛거린다. 남세스러웠는지 간판조차 없다. 간판이랬자 골목 밖까지 등 떼밀려나와 켜켜이 키를 세운 덩치 큰 대백과사전이 대신하고 있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서성거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호객꾼이다. 추억의 헌책방이 겨우 숨 붙이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손짓한다. 불현 듯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골목 안쪽을 기웃거리게 된다. 누구든 헌책방 책시렁 앞에 서면 그 재촉하던 걸음이 이상하리만치 느림보가 된다. 보물찾기라도 하듯 설렘도 생긴다. 헌책방의 묘한 마력이다. 숨결을 느끼려 더듬거려본다. 겨울날의 책들은 그러나 잔뜩 굳어 있다. 풀풀거리던 해묵은 먼지도 얼어붙었다. 그 꽁꽁 얼어붙은 책갈피에서 절규를 듣는다. 제발 구시대의 고물로 평가하지 말라! 아우성친다. 시대가 첨단화될수록 유물에 내제된 고부가가치의 지혜가 언젠가 빛을 발할 거라면서. 헌책방엔 없는 책이 없다. 참고서며, 교양도서며, 전집류며 눈 밝은 사람들은 반짝거리는 보물을 캔다. 줄을 서서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풍경은 사라졌어도 수많은 활자들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살가운 체온도 느껴진다. 다들 베스트셀러를 꿈꿨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구절구절 그 고통의 흔적이 읽힌다. 저마다 사연이 있고, 모진 삶이 묻어난다. 혹자는 왜 헌책방에 들려면 인간적이 된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헌책방이라 해서 과거만 있는 게 아니다. 현재, 미래가 호흡한다. 그 격변의 세월과 공존하고, 공명하는 것이다. 때론 성찰의 시간을 갖게도 한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을 붙드는 헌책방의 끈질긴 생명력이다. 책방 주인아저씨는 우리 동네 도서관 관장이다. 널브러진 헌책 더미 속에 어떤 보물이 꼭꼭 숨어 있는지 꿰차고 있어서다. 손님들이 찾는 책을 귀신같이 단방에 뽑아내 먼지를 툴툴 털어낸다. 손때 묻은 책은 늘 체온이 느껴진다. 그 누군가의 체온이다. 책을 읽다 밑줄을 그은 대목에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와 나의 삶이 겹쳐지는 것이다. 이심전심이랄까. 책에는 마음이 담겨 있다. 연인들은 그런 마음을 전하려 책을 선물하는 것이다. 응축된 시집이 연인 선물 1호가 된 까닭이다. 시구절을 통해 사무치는 사랑을 투영하고, 그 간절한 사연을 연인과 어깨를 맞대고 울음을 삼키고 싶은 것이다. 책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끈이다. 그런 책을 쌓아둔 책방은 그래서 만남의 명소가 됐다. 교보서적이 그 명소이고, 한 때 종로서적이 그랬다. 그 종로서적이 종로타워에서 부활했다니 감회가 새롭다. 동네 헌책방에도 만남은 있다. 동서고금 많은 사람들을 불러낼 수 있다. 몸을 움츠리게 하는 이 겨울 헌책방에 들려 책시렁에 잠자고 있는 위인들을 깨워 겨울이야기를 나눠보는 건 어떨까.

2017-01-18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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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달걀뎐

그의 이름은 세 번씩이나 바뀌었다. 처음에 '닭의 알'로 불리다가 인간의 세 치 혀에 익숙해지도록 까다로운 문법 절차를 밟아야 했다. 소유격 조사의 '의'가 단모음화로 '이'가 되면서 '닭이알'이 됐고, 이것이 오늘날의 '달걀'로 압축 진화됐다. 낱소리마다 톡톡 튄다. 보름달처럼 달뜨게 하는 '달'은 탱글탱글한 샛노란 노른자위를 연상케 하고, '걀'은 굴러다니는 음색이 샹송풍의 뉘앙스를 풍긴다. 그는 인간들이 주로 불러주는 계란(鷄卵)이란 호도 갖고 있다. 호든 이름이든 알집을 풀면 그냥 '닭이 낳은 알'에 불과하다. 그로서는 '알' 딱지를 떼어준 것만으로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다른 가금류 알들의 호칭을 보라. 칠면조알, 메추리알, 오리알 … . 떡하니 '알'만 곁다리로 갖다 붙인 꼴이다. 그들이 이런 개념 없는 홀대를 진작에 눈치챘더라면 침을 튀기며 이빨을 드러낼 일이다. "왜 우리는 '칠면쟐', '메추랼', '오랼'이라고 품격 있게 불러주지 않느냐"면서. 달걀은 호칭에서부터 여느 알과는 격이 다른 것이다. 그는 '알'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생명을 낳는다'는 신비의 상징이었고, 부활의 주력을 지닌 신성물이었다. 말하자면 영혼의 용기(容器)로 대접받았다. 부활절과 풍년제 때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까닭이다. 우리네 명절 차례상에 올라오는 필수 품목이다. 그의 조상묘도 있다. 경주시 황남동 155호 고분. 고대 신라시대의 흔적이 담긴 그곳 유물함 토기에서 그들 조상이 발굴돼서다. 스무여 알의 껍데기. 전혀 부패되지 않았으니 인간들은 그 신묘함에 감탄사를 발했다. 그런 그의 화려한 운명을 기구하게 만든 건 인공부화! 1840년대 중국과 이집트에서 발원된 부화술은 세계 축산 농가들을 덮쳤다. 국내에도 상륙해 노크했지만 처음엔 시큰둥했다. 부화술은 그 신통력을 부리지 못한 채 닭장 뒷간에서 한 세기 넘게 숨 고르기만 했다. 그러다 압축 성장으로 헐떡거리던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양계산업도 숨 가쁘게 돌아갔다. 그는 알까기에 매진했고, 씨암탉은 그 수량과 스피드에 놀란 듯 눈을 깜박이며 '판박이 알'을 마구 찍어냈다. 대량 산란의 산실이 된 닭장. 당시 도심의 나이트클럽이 닭장으로 불린 건 우연이 아니다. 닭장도 북적거렸고, 클럽도 북적댔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인간과의 함수에 도리가 있음을 깨달았다. 과유불급! 닭장 알받이에 그들이 차고 넘치면 계란판 신세가 된다는 것을. 요즘 그 차고 넘치던 달걀이 품귀다. 조류인플루엔자(AI)가 닭장을 초토화해서다. 살처분된 가금류만도 3000만 마리. 이 가운데 알받이 산란계 2300만 마리가 영문도 모른 채 죽어 나갔다. 그의 종족은 가파르게 급감했다. 인간들은 '달걀 절벽'이라 불렀다. 속수무책인 그들은 탄식한다. 전남 해남에서 처음 AI가 발원됐을 때 촘촘한 방역망을 쳤더라면 이토록 씨가 마르진 않았을 거라고. 현실은 참담했지만 그의 몸값은 갑절 이상 뜀박질했다. 식당가와 반찬가게에는 달걀 반찬이 사라졌고, 제과업계는 일부 품목을 중단했다. 그것은 그동안 싼값에 날로 먹은 인간들의 탐식에 대한 경고였고, 만만한 게 달걀이 아니라는 아우성이었다. 인간들의 장바구니 물가가 들썩거린다. 갑자기 올랐으니 그 체감도 클 것이다. 급기야 미국에서 164만 개의 달걀을 공수해와 투하하기로 했다. 국내 달걀사에 용병달걀이 등장한 거다. 할당관세를 없앴다지만 국내산 값과 엇비슷하다. 엄마 품에 한 번도 안기지 못하고 인간에게 강제로 헌납했던 그들은 말한다. 부화술이 아니라, AI를 막아낼 중장기적인 방비술을 빨리 개발해달라고.

2017-01-11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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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때문에' VS '덕분에'

새해가 밝았다. 마중 나갈 겨를도 없이 '대한민국 2017' 개봉작은 커튼부터 올렸다. 총 365부작의 대하드라마! 어쩌면 점입가경으로 전개될지도 모를 그 실화 장면을 미리 들여다볼 수 있는 건 신의 영역이거니와 그나마 대강의 시놉시스가 가물거리는 건 이월된 전년도의 극적인 소재가 지천에 널려서일 것이다. 하루하루가 행복한 삶이 되게 해달라고 축원할 뿐, 오천만 국민 관람객은 새해벽두부터 그 예측불허의 각본 없는 스릴러에 한껏 노출됐다. 그랬다. 히트를 예감한 정객들은 흥행에 불을 댕겼고, 개봉작은 초장부터 클라이맥스를 향한 질주 본능을 드러냈다. 새해는 그렇게 불쑥 찾아왔다. 재깍거리며 달려오는 새해 개벽의 시간은 설렘과 낯설음이 교차하기에 얼떨떨하다. '대한민국 2017' 개봉작의 전반부 장면은? 정국 혼란과 경제침체 속에 헐떡거리는 모습이 아른거린다. 다들 꿈을 찾아 행장을 꾸려 길을 나섰지만, 갈 길이 먼 노정이다. 새해 첫 날 새벽녘. 동네 산에 오르는 길은 구불구불 굽이친다. 하지만 어느 길을 택하든 큰 길로 이어져 늘 반갑다.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호젓한 오솔길을 걸으면 상상 한 점이 날개를 펼친다. 저 아득한 옛날 사람들은 이 길을 통해 길벗이 되고, 산 너머 마을 소식도 이 길을 타고 전해졌을 거라는 상상. 왜 이런 풍경이 불현듯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첩첩산중에서의 길이 행여 다툼과 증오와 마주하는 길이 될까 노파심이 일어 그랬을 것이다. 산 정상에 부서진 첫 햇빛은 찬란했다. 불그스레한 앳된 얼굴의 해는 산 아래 빌딩숲 사이로 비쳐들며 잠을 깨운다. 밤새 뒤척였는지 빌딩숲은 칙칙한 표정으로 거리거리에 누워 있다. 새해는 그러나 그 뒤척이는 시간과 관계없이 찾아왔다. 있는 힘을 다해 올라오는 해를 바라본다. 새해 첫 해를 보고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되는 건 희망이라는 두 글자를 찾고자 함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막연히 산을 오르는지도 모르겠다. 공기를 한껏 들이켜 본다. 새해 첫 날 막 나온 것이기에 산뜻하다. 산소 알갱이마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다. 첫 해를 바라보며 희망을 노래했으니 산 밑으로 내려가는 해맞이 길손들의 걸음걸음이가 한결 가볍다. 그런데 해묵은 넋두리가 메아리친다. 살기가 팍팍하다, 사업하기가 힘들다, 집값이 너무 올랐다, 물가는 더 올랐다는 볼멘소리가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그 종착역은 늘 '~ 때문에'라는 남 탓으로 귀결되는 게 문제다. 지청구를 쏟아낸다. 새해벽두부터. '때문에'의 속성은 마이너스적이다. 그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돌려세울 수는 없을까? 호주 멜버른의 한 샌드위치 가게가 그 일을 해냈다. 가게는 7층. 테이크아웃치곤 높다. 목돈이 없어 임대료가 값싼 곳을 고르다 보니 그렇게 됐다. 사람들은 곧 폐점할 거라고 했다. "그래도 가게는 구했잖아" 가게 주인은 감사해 하며 마이너스 요소를 플러스로 생각을 바꾸었다. 샌드위치를 낙하산에 매달아 고객에게 공수하는 반전을 꾀했다. 공전의 빅 히트를 쳤다. 도처에 걸림돌이 왜 없겠나. 걸림돌마다 '때문에'로 핑계 삼는다면, 마음의 곳간에 희망이 채워지겠는가. '때문에'는 좌절과 절망이 숨어 있다. 새해에는 '때문에'가 아니라 '덕분에'로 바꿔보자. 부정적 마음이 아니라 긍정적 마음.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적 마인드. "새해의 복 많이 받으세요" 덕담으로 주고받는 그 복은 매사에 감사하는 '덕분에' 마음을 가진 자의 것이다. 행복지수를 높이는 것도, 스트레스지수를 높이는 것도 자기 자신이니까.

2017-01-04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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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세밑의 명(名)장면

'2016년호' 열차도 소실점을 그리고 있다. 산 아래 휘돌아나가는 기찻길의 낭만 열차였더라면 저토록 처연한 삽화로 가물거리지 않았을 거다. 여느 세밑인들 쓸쓸한 여운을 남기지 않겠냐마는 올해가 더욱 유난한 것은 불투명한 정치상황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 때문일 게다. 추위까지 스며들었기에 세상 풍경은 어수선하고 스산하다. 잔뜩 웅크린 마음들은 칙칙한 옷차림으로 표출됐고, 그 위축 심리는 기어이 소비 경기를 바닥으로 침몰시켰다. 세월을 뿌리치듯 떠나는 '2016년호'에 왜 아쉬움이 없겠나. 현란한 점등 아래에 번지는 애잔한 발라드 가사에 귀를 모으게 되고, 거리를 배회하는 군상들의 표정에 시선이 오래 머무는 것을. 세밑이란 그런 것인가. 찬바람이 깊은 새벽녘 책상 서랍에 오래 묵혀 너덜거리는 주소록을 뒤척이며 친구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기억해낸다. 십 수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친구도 맞닥뜨린다. 그 흑백 필름을 돌리다보면 입 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세밑이 공허한 건 내세울만한 일 없이 또 한 살을 더 먹는다는 것일 게다. 한 해의 궤적을 복기해보면 하루하루가 소중했다. 열정적인 청춘의 시간들이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그 금쪽같은 시간을 혹여 허투루 쓴 게 아닌지 반추하게 된다. 벅찬 새해를 맞을 때만 해도 순간순간을 정성들여 살겠노라고 다짐했건만 그게 그리 쉬운가. 세밑은 그래서 태생적으로 가슴 적시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한 해를 되돌아보게 되는 작업이 여간 씁쓸한 게 아니다. 세밑 풍경 하나가 작은 울림으로 가슴 때린다. 서울 한복판 명동 어느 중국음식점. 삐거덕 출입문이 열리자 모든 시선은 한 곳으로 집중됐다. 남루한 옷차림에 퀴퀴한 냄새를 동반한 손님. 노숙인이었다. 그의 눈은 모퉁이쪽 딱 하나 남은 빈 테이블에 꽂혀 있었다. 거동이 불편한 듯 발걸음을 뗄 때마다 뒤뚱거렸다. 사람들은 소마소마했다. 다들 본능적으로 엉덩이가 들썩거리는데, 여종업원이 달려가 부축하며 예의 안내하는 것이었다. 천만다행이었다. 흐뭇했다. 유니폼 차림의 여종업원과 꺼무죽죽한 노숙인의 앙상블. 내가 꼽은 훈훈한 세밑 명장면이다. 여종업원의 표정은 시종 밝았고, 얼어붙은 노숙인의 얼굴은 따스하게 펴져 있었다. 그는 짬뽕 곱빼기를 주문했다. 문제는 다음 장면이었다. 그의 응어리진 마음 밑바닥을 미리 헤아리기라도 했다면 사람들은 저 괴괴한 편견을 갖진 않았을 거다. 그는 냉큼 밥값부터 선불로 냈다. "걱정들 마시라!" 속으로 얼마나 외쳤을까. 왜 그래야만 하는 걸까? 가슴 쳤을 것이다. 그랬다. 밥값은 그의 막장 자존심처럼 보였다. 자신을 내팽개친 불신 사회와 단절한 그이기에 그럴 것이다. 불신 세상에 대한 저항의 몸부림이랄까. 그는 그러나 운명처럼 다가오는 냉정한 사회적 불신을 선불로써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왜 그가 가슴 죄며 그 무거운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다. 세밑 무렵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왜 '배려'인지를 일깨운다. 사람 사이에 배려가 스며들면 신뢰가 싹튼다는 평범한 진리를 말이다. 배려가 비단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다. 자신을 향한 배려도 있다. 자신을 배려하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배려한다는 건 모순. 우리는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한 삶을 재촉했다. 자신(self)에게 선물(gift)을 주고 싶다는 이른바 '셀프트(selft)족'이 등장한 이유가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가물거리는 이 세밑. 자신에게 따뜻한 '격려'를 선물하며 다독여주자. 고단한 긴 그림자를 이끌고 왔을 자신에게.

2016-12-28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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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떡볶이와 고등어

강퍅하게 번성한 아파트 군락에서 홀로 핀 전통시장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억척스럽긴 해도 그나마 사람 사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침이 튈지언정 오가는 흥정 속에 넉넉한 인심이 묻어나는 건 여전하다. 대형 마트들은 이 전통시장의 전매특허에 노다지가 숨어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흥정은 '1+1 덤', 인심은 '고객만족서비스'로 대체하고, 느긋한 저잣거리를 성급한 에스컬레이터 길로 포장하면 돈방석에 앉을 수 있다는 것을. 대형마트는 그러나 용도변경을 하지 못한 게 하나 있다. 오랜 세월 전통시장에 더께로 내재된 정감! 어릴 적 향수가 기시감으로 와락 밀려드는 그 유전자 말이다. 답답할 때 시장 바람을 쐬면 까닭 모르게 복받쳐 오르는 설렘이랄까. 그 옛날 접어뒀던 시장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그 곳과 오버랩 되면서 미소를 머금게 하곤 한다. 예나 지금이나 볼거리가 많은 한 폭의 풍물화에 다름 아니다. 그 시장을 품고 있는 아파트에 십 수년째 눌러 앉은 까닭이다. 장보는 재미가 여간 아니다. 시장 초입부터 반기는 좌판들. 부추, 양파, 대파, 양배추, 감자, 고구마가 널브러져 있다. 어느 할머니의 호객 구호가 이색적이다. "이런거 저런거!" 이 많은 채소를 줄줄이 알사탕으로 읊으려니 버거웠을 것이다. 그걸 뭉뚱그렸을 터인데 기막힌 표현이다. 그런데 묶음마다 크기가 들쭉날쭉이다. 그러니 고객도 '이런거 저런거'를 고르게 된다. 그러다 할머니의 주름진 손등에 시선이 얹히면 가격을 묻지 않게 된다. 부르는 대로 지불한다. 시장 속을 들여다보면 흥미진진하다. 몇 달 전 떡볶이 장터에 큰 지각변동이 일었다. 한산했던 한 떡볶이 집이 방송을 탔다. 전국의 내로라는 떡볶이 마니아들을 흥분시켰다. 방영된 장면은 사진에 담겨져 간판으로 내걸렸고, 고객은 줄을 이었다. 그 옆 꽈배기 집과 김밥 집은 때아닌 대목을 만나 손놀림이 바빠졌고, 시장 안은 덩달아 북적댔다. 떡볶이가 미끼 상품이 되면서 시장 집객력이 높아진 거다. 시장 사람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모두가 반긴 건 아니다. 그동안 불티나던 그 안쪽 떡볶이 집 주인은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맛에 대해선 사람들은 그게 그 맛이라고 했다. 하루아침에 대박과 쪽박의 기로에 선 두 집. 대박 집은 여세를 몰아 점포를 확장했고, 아르바이트생도 고용했다. 쪽박집도 이에 질세라 의자를 새 단장하고 인심을 강화하는 전략으로 단골들을 돌려세웠다. 지금은? 예전 상황으로 돌아갔다. 고객수가 엇비슷해지더니 언제부터인가 대박 집 아르바이트생이 사라졌다. 생선가게는 춘추전국시대를 맞았다. 여섯 군데나 되니 경쟁이 치열하다. 가장 많이 팔리는 국민생선 고등어가 승부처다. 한 가게는 댓바람부터 휘늘어진 뽕짝을 튼다. 아침 손님은 그 집 차지다. 부부가 운영하는 가게는 하루 분량만 매대에 올린다. 일찌감치 동나니 안달이 나는 쪽은 고객이다. 얼마나 맛있길래? 손님이 끓이질 않는다. 재고가 없으니 싱싱한 편이다. 가격 대비 맛도 있어 일명 '가맛비'도 좋다. 한계효용의 희소가치를 간파한 실속파 부부다. 또 다른 한 가게는 수북하게 진열한다. 회전율이 낮아 며칠째 묵는 구조다. 발길이 휑하다. 고객몰이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시장이 공사에 들어가면서 그 집만 개점한 적이 있다. 손님이 쏠리는 풍선효과를 보긴 했는데, 이때다 싶어 묵은 재고품을 처리한 게 문제였다. 고등어의 신선도는 구워보면 드러난다. 고객을 창출할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소비위축이 7년 만에 최고라는 소식이다. 소비진작의 타이밍이 절실한 때다.

2016-12-21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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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픽미(Pick Me)족'의 족보

수박이 청춘남녀의 인연을 맺어주던 시절이 있었다. 계곡 저편에 수박을 띄워 짝을 유혹하는 청춘사업! 그 뻔한 술수를 누군들 모르겠냐마는 짐짓 모르는 척, '날 잡아봐!' 수박을 터치해 랑데부하곤 했다. 남녀유별의 울화가 여전했던 7080. 그 흑백 필름의 시절에도 왜 들끓는 신세대가 없었겠나. 색 바랜 청바지, 흥청대던 생맥주 시음장, 가슴으로 뜯던 통기타의 젊음이 가슴마다 내재했다. 다들 내숭을 떨긴 했어도 수박을 매개로 조각조각 마음이 달떴다. 낭만풍의 랑데부 삽화! 사람들은 삽화 속 청춘남녀들을 '수박족'이라 불렀다. 신세대 족보의 시조가 태동한 배경이다. 그 이후 참외족, 사과족이 종횡무진 활약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족보엔 없다. 정작 문중에 이름을 올린 건 '오렌지족'. 명품으로 치장하고 외제차를 굴리며 유흥을 즐기던 해외유학파들이다. 한창 수입산 오렌지가 국내에 상륙하던 때였으니 그 과일로 문패를 내걸었다. 오렌지족의 등장은 우리네 소비패턴에 변화를 몰고 왔다. 족보의 시조 수박족은 쪽도 못쓰고 사라졌다. 오렌지족의 아류도 등장했다. '낑깡족'. 맹목적으로 따라하려는 사회적 병폐가 탄생시킨 별종이다. 그들은 오렌지족의 동작뿐 아니라 정신세계도 닮으려 했다. 흉내 내는 것까진 좋았으나 소비 형태를 닮으려 한 게 문제였다. 경제적 체력이 약한 뱁새가 황새의 광폭 씀씀이를 무슨 수로 따라잡으랴. 유흥가에선 '노는 물이 달라'라는 유행어도 그 때 파다하게 돌았다. 낑깡족은 곧 소멸됐다. 정작 신세대 데이트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건 '야타족'이었다. 명령조의 '야! 타!'를 붙여 급조된 신조어.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길거리 헌팅에 나선 족속들이다. 오렌지족과는 사촌지간. 주 무대는 서울의 압구정동과 홍대 입구. 안하무인에 이기적인 사고가 배어 있었지만 뭇 여성들은 그 오만한 입심에 외려 매혹에 빠졌다. 와중에 튼튼한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 다니며 데이트를 하겠다는 순정파 '뚜벅이족'도 거리를 누볐다. 세월을 뒷장으로 막 넘기려는 2016년 끄트머리. 신개념의 족속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디지털 시대가 낳은 '픽미(Pick Me)족'. 말하자면 스펙을 갖췄지만 선택받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하는 고단한 세대의 한 부류. 그래서 그들은 아우성친다. '나를 뽑아줘!'라고. 그들의 사전엔 과시성 소비란 없다. 오렌지족의 펑펑 소비 형태와는 거리가 멀다. 오로지 나와 현실에 가치를 부여하는 합리적인 소비를 추구하는 실속파다. 예나 지금이나 신세대는 소비와 유행의 주역이다. 그래서다. 내년 소비트렌드가 벌써부터 나왔다. '욜로(YOLO)' 트렌드다. '한 번 사는 인생(You Only Live Once)'의 약어다. 불투명한 미래를 두려워하기보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려는 2030세대의 실리적인 가치관이 숨어 있다. 트렌드는 디지털에 편승해 무서운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눈 깜짝할 새다. 제품이 세상에 나오기가 무섭게 평가가 쏟아진다. 보는 눈이 촘촘하고 기민하니 어지간해선 퇴물 되기 십상이다. 까딱 한 눈 팔다간 이방인이 되는 오늘날이다. 사회발전 단계설을 연구했던 스펜스도 이렇게까지 사회가 진화하리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사이버 신인류가 확대 재생산하는 입소문의 쓰나미를 상상이나 했겠나. 표심에 민감한 정치인들은 그들의 트렌드를 읽고 있을까?

2016-12-14 08:00:0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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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중산층의 밥

뭘 먹을까요? 귀 익어 딱지가 앉은 이런 물음도 없을 거다. 이젠 끼니때를 일러주는 자명종에 다름 아니다. 설렘과 고민이 교차하는 점심시간. 식성 좋은 식도락가들은 벌써부터 괸 침을 꼴딱거리며 맛집에 달려가 있다. TV에 소개됐다는 둥 별미 찬사에 조미료를 친다. 삼삼오오 입소문에 이끌리다 보면 후미진 골목까지 파고든다. 나름 이름났다는 음식점은 들썩거린다. 야단스럽게 보글거리는 별미 한 점 맛보려면 어쩌겠나. 까치발을 딛고 기웃거리다 결국 줄을 선다. 서민풍의 맛집은 왁자지껄하다. 삑삑대는 잡음만 있는 게 아니다. 생생한 잡담 통신들이 밥상머리 주변을 떠다닌다. 귀동냥하면 삶의 지혜와 반짝거리는 경험칙을 낚아챌 수 있다. 그래서 혹자는 점심을 '황금알을 캐는 자리'라고 했던가. 평소 그 무관심했던 '점심(點心)'의 한자어에 주목하게 된다. 찬찬히 뜯어보니 뜻풀이가 예사롭지 않다. '마음에 방점을 찍는' 모양새다. 점심 약속을 허투루 할 일이 아니다. 소찬에도 정성을 들여야 마음이 동하는 법이다. 친구가 내게 묻는다. 직장인의 한 끼 점심 비용은? 직종별, 직급별 메뉴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 평균치를 물어본 것일 터. 뜬금없고 기습적인 그의 물음에 궁금증이 발동한 쪽은 오히려 나였다. 그날 이후 점심때마다 풀어야 할 숙제로 맴돌던 차에 엊그제 한 연구소가 그 답을 내놨다. 고소득층 6500원, 중산층 6200원, 빈곤층 5700원. 설문조사한 것이라는데 한 끼 입에 들어가는 것도 저토록 가치가 달라야 하나 싶다. 5700~6500원. 그런데 그 박스권의 값이라는 게 어째 한 카테고리에 꽂힌다? 국민대표 음식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다. 그 옛날 네댓 점의 고기를 오물거리며 곯은 배를 채웠던 설렁탕은? 어지간해선 7000원을 웃돈다. 고소득층 평균치보다 비싸다. 국민 보양식 곰탕과 삼계탕은 또 얼만가. 1만 원을 우습게 훌쩍 넘긴다.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서민들의 씀씀이를 여간 옥죄는 게 아니다. 그 체감을 수치로도 환산할 수 없으니 통계 또한 공허하긴 마찬가지다. 대학에 출강하는 그 친구는 스스로를 빈곤층이라고 했다. 외국 명문대 출신에 콧대 높은 그 아닌가. 그의 이상이 현실의 벽 앞에서 수없이 좌절됐기에 그럴 만도 할 것이다. 허탈했을 것이다. 그는 그러나 빈곤층이 아니다. 번듯한 중형 아파트 한 채 있고, 결코 사소하지 않은 자가용에, 뜸하지 않은 해외여행에, 여윳돈까지 굴리는 그는 누가 봐도 중산층이다. 그런데 중산층 10명 중 6명은 스스로를 빈곤층으로 생각한다니 친구의 넋두리가 엄살로 들리지 않는다. 무엇이 그들을 상실감에 빠지게 했을까? 적이 궁금하다. 한국 축구가 월드컵 4강에 올랐던 2002년 국민 10명 중 8명은 자신이 중산층에 속한다고 큰 소리쳤다. 그토록 희망에 부풀었던 그들은 다 어디로 증발한 걸까?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 2만 7931달러.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더라도 1만 2100달러였던 2002년 그때 보다 못 사는 것은 아니다. 소득이 두 배 이상 올랐다고 해서 덩달아 자장면 값이 두 배 이상 고개를 든 것도 아니다. '중산층의 밥'을 먹는 그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불안한 미래, 100세 시대의 어설픈 노후대책, 일자리부족, 어수선한 정국 …. 성장이 더딘 한국 경제는 지금 초조하고 찌든 모습이다. 경제의 중추인 중산층이 웅크리고 있다. 그렇다. 우리나라 중산층은 지금 극심한 '정신적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힐링해줄 경제적 감동 드라마는 없는 것인가?

2016-12-07 08:00:10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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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떼탕의 행복지수

그곳은 희부연 입김으로 자욱했다. 손바닥만 했으니 물안개 속이었다. 솜구름이 켜켜이 흐르는 몽환적인 풍속도랄까. 화폭에 담았더라면 희미하게 어슬렁거리는 안쪽 세계가 궁금해 솜구름을 지웠을 것이다. 그곳에 모처럼 대목을 맞았다. 아슬아슬 찰랑대던 욕탕 물은 동네 아저씨가 엉덩이를 들이밀자 경계수위를 기어코 넘고야 말았다. 사람들도 그렇게 넘쳐났다. 평소 찔끔거리기만 하던 굴뚝도 덩달아 신이나 불을 뿜어댔다. 70년대 초 목욕탕 풍경이다. 설날 전날이었을 것이다. 진풍경이 목도된 건 비좁은 탈의실에 막 들어섰을 때였다. 엉거주춤 어줍은 몸짓들! 하나같이 수건으로 앞면을 모자이크 처리하고 있었다. 웬 가림? 그런데 어쩌랴. 예외가 없는 것을. 나도 그 암묵적 체면치례에 따라 가리고 또 가렸다. 사람들은 왜 그래야만 했을까? 대중목욕탕에 익숙지 않은 그 시절 겸연쩍은 탓일 게다. 사람들은 목욕탕을 '떼탕'이라 불렀다. 추석이나 설날 전날만 되면 떼로 몰려온다고 해서 붙여졌다. 그 시절 떼탕 주인을 부를 땐 박수를 쳤다. 환영의 박수갈채가 아니다. 짧고도 강한 단 한 번의 박수. 줄어든 욕탕 물을 채워달라는 신호였다. 명절 전날에는 박수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 때마다 주인은 황급히 달려와 잠금을 풀고 뜨끈뜨끈한 물을 채워주었다. 샤워 부스가 따로 없었으니 바가지가 샤워기였다. 바가지로 공용 욕탕 물을 떠서 세수하고 몸도 헹궜다. 그러니 온전한 새 물을 만나려면 이른 새벽부터 눈을 비비며 집을 나서야 했다. 그래도 신났다. 동네 떼탕의 건물 배치도는 묘했다. 한 울타리 안에 남탕과 여탕이 들어앉은 구조. 한 복판에 담장을 세워 탕을 구분했다. 그런데 담장 위 부분은 뻥 뚫려 있다. 소통하기 딱 좋은 창구다. 목욕이 끝날 즈음이면 어서 나와라는 아우성이 이편저편에서 터진다. 욕탕은 늘 이야기꽃이 피었다. 별의별 얘기가 담장 너머로 물안개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어쩌다 애정 스토리가 절정에 달할 양이면 설전이 담장을 넘나들었다. 국민소득 300달러도 채 안 되던 그 시절. 열악한 시설에 물줄기도 시원찮았던 떼탕엔 사람 사는 냄새가 묻어났다. 가슴 설렌 사람들이 모였다. 먹고 살기 힘들었어도 목욕 한 번이면 날아갈 듯이 기분 좋았다. 그 삶의 질을 수치화할 순 없을까? 떼탕의 행복지수! 무척 궁금했는데 엊그제 그걸 수치화하겠다는 소식이다. 투자와 소비 위주의 경제적 지표에 사회적, 심리적, 환경적, 가족적 요소들을 반영하겠다니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이다. 3만 달러를 바라보는 오늘의 떼탕 풍경은? 재개발에 밀려난 떼탕은 최신식 불가마 찜질방과 사우나로 대체됐고 그나마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떼탕은 그 때 그 시절의 때탕이 아니다. 20~30대 젊은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할아버지들이 대부분이다. 벽과 마주한 채 혼자 목욕하는 이른바 '혼탕'의 새 풍속도다. 등 밀어주고 머리 감겨주는 그런 풍경은 지워진 지 오래다. 탕의 모락거림도 시들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더 나은 삶 지수'에서 한국은 조사대상 38개국 중 하위권인 28위. 2013년 25위 보다 3계단이나 밀려났다. 물질은 풍요하지만 삶의 질은 오히려 뒷걸음질 친 오늘날이다. 떼탕은 추억의 뒷장으로 넘길 태고의 성역으로 남아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투박하지만 떼탕의 삶을 복원할 때다.

2016-11-30 07:30:46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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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마음의 방'

세상 공기가 흐리멍덩하다. 미세먼지 농도가 높다고 핏대를 세우는 TV의 일기예보는 안 그래도 어수선한 마음을 더욱 헝클어놓는다. 나라 안팎으로 야단법석이니 그럴 것이다. 먹고 살기에도 바쁜데 말이다. 이럴 땐 세상을 환기시켜줄 굿 뉴스에 갈증을 느낀다. 시선은 어느새 멍 때리듯 모로 향한다.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TV 화면에 얼굴을 채운 한 미니멀리스트의 한마디가 귀를 쫑긋 세운다.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지 물건들이 노는 곳이 아니다! 집안 물건들을 최소한으로 줄여 생활하는 이른바 '미니엄 라이프'. 물건들의 속박에서 벗어난 그의 삶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르겠다. 모으고 쟁여놓고, 그래서 세월의 더께가 앉은 물건 틈에 갇혀 허우적거렸으니. 사용하지도 않는 물건에 집착한 나머지 버리지 못해 보관하고 관리하는 데 시간과 공간을 너무 허비했다. 하지만 단방에 털어내기가 그리 쉬운가. 쌈짓돈을 만지작거리며 요모조모 저울질해 어렵사리 집안에 들여놓은 것을. 내 지인의 말이 걸작이다. 그는 동네 인근 대형 마트가 자신의 창고란다.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보관해주고 꼼꼼하게 관리해준다는 거다. 편의점은 24시간 개방해둔 창고라나. 잡다한 짐들을 마트에 맡겼으니 그의 집은 사람이 숨 쉬는 쉼터다. 비움으로써 외려 삶의 여유와 행복이 더 웅숭깊어진다는 비움의 역설. 수년째 잠자고 있는 장롱 속 옷들이며 계륵 같은 애물단지들을 한가득 털어냈다. 끈질기게 늘어지는 집착증을 뿌리치면서. 그런데 물음표 하나가 퍼뜩 스친다. 집안의 방은 그렇다고 치고 우리네 '마음의 방'은? 뒤숭숭하고 갑갑하다. 각종 루머(rumor)들이 어슬렁거린다. 절망감과 각종 의혹으로 사회가 달뜬 듯 불안정하니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희노애락이 공존하던 이런저런 추억의 조각들을 마음 한 켠으로 밀어내고 똬리를 튼 지 오래다. 루머는 집안의 물건처럼 내 의지로 털어낼 수도, 망각 속에 욱여넣을 수도 없다. 에리히 프롬은 일찍이 이런 루머를 감정전염의 하나로 봤다. 사람들의 감정선을 자극하며 변화무쌍하게 전개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확대 재생산되고 한번 불붙으면 걷잡을 수 없는 게 루머의 속성. 광폭 첨단 미디어인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축지법을 쓰니 루머의 전파력은 가히 빛의 속도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속담이 무색할 지경이다. 그 옛날 우물가와 빨래터에서 이러쿵저러쿵 하던 입방아 루머가 아니다. 심리학자들의 입을 빌리면 루머는 의혹이 클수록 덩치는 커지고 속도도 빨라진다. 가파른 비탈길을 구르는 눈덩이와 같은 이치다. 일단 한번 돌면 잠재우기 어렵고 해명하려 들면 더욱 증폭되는 게 루머의 고질병이다. 여기에다 각종 국내외 경제지표들은 불확실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고, 장기실업자는 늘었고 이중 청년층(15~29세)의 비중이 44%로 가장 높다니 이 겨울 국민들 마음의 방은 더욱 꽁꽁 얼어붙고 있다. 유쾌한 루머는 없는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다. 나비넥타이. 레드 카펫에서 포즈를 취한 한 연예인이 매고 있던 나비넥타이가 유난했다. 나비넥타이를 매면 행운이 뒤따른다는 루머가 맴돌아서다. 2016년 끝자락에서 서성거리는 대한민국은 지금 국민들 마음의 방을 다독여줄 행운의 나비넥타이가 절실하다.

2016-11-23 14:02:07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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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수능별곡

집 근처 산 풍경이 무척 수척해졌다. 추위가 성급하게 찾아와서인가. 약수터로 가는 오솔길. 색 바랜 낙엽들이 처연히 누워 있다. 정권말기적 게이트증후군이 도지지 않았더라면 산 풍경은 그렇게 스산하게 엄습해오지 않았을 것이다. 산안개가 가물거려서인가. 오가는 객들의 표정이 왠지 우중충하다. 내 표정도 저런가, 입 꼬리를 애써 올려보지만 버겁다. 그래서일까. 언뜻언뜻 얼굴을 도닥여 주는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정겹다. 초겨울의 약수터는 입김을 연신 뿜어낸다. 초입에 직립한 식수적합 푯말이 믿음직하다. 필자는 그 판정을 신뢰한다. 그렇게 마시니 약수는 보약이 된다. 약수터에는 물만 있는 게 아니다. 민심도 샘솟는다. 정객들이 불쑥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이유다. 한 아낙네의 볼멘소리가 정적을 깬다. 나라가 시끄러운데 정신 사나워서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제대로 집중할 수 있을까 걱정이란다. 수험생 자식이 혹여 한 치의 실수라도 할세라 노파심에 내뱉은 넋두리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면 수능시험. 순간 신사임당이 왜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훌륭한 어머니의 표상, 아니 그 표상의 끝이 7명의 자녀를 영재로 길러낸 그녀의 맞춤식 교육법에 닿았기 때문일 게다. 자녀 중 율곡 이이의 경우 시쳇말로 '공부의 달인'이었다. 문과 급제의 필수 코스였던 9단계 시험에서 모두 수석에 이름을 올렸다. 그가 '9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가히 수험생의 스타다. 수험생 율곡과 학부모 신사임당. 두 모자가 오늘의 세상 속으로 환생한다면? 그래서 입시지옥과 맞닥뜨리면? 역사책 갈피에 칩거하는 두 모자를 불러내 저 치열한 입시 전투에 투입시킨다는 건 가혹하기 짝이 없긴 해도 말이다. 470년의 세월을 성큼 뛰어넘어 합류한 입시대열. 당장은 도처에 널린 신사임당 아바타에 눈을 희번덕거릴 거다. 신사임당 자신도 '매니저 엄마'였으니 고개를 끄덕일 만도 하다. 필승전략을 세우는 것도 다를 게 없다. 그러나 선행학습을 하지 않고서는 명문대학을 가기 힘든 입시구조 대목에선 갸우뚱할 거다. 학원?과목별 스승이 많게는 십수명. 초등학교 입학 이전부터 그렇게 해왔다니 스승이라곤 어머니가 전부였던 율곡이 이런 과부하 수능레이스를 따라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율곡은 수험생활 틈틈이 감성을 키우기 위해 거문고를 뜯고, 피리를 불고, 그림도 그렸다. 이런 감성 예술이 가계 부채를 늘리는 수시전략 주요 스펙으로 변질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다. '돈도 실력'이라는 궤변은 단 한 푼의 사교육비를 들인 적이 없는 학부모 신사임당의 폐부를 후빌 거다. 입학 특혜 논란 속에 수능을 치르는 율곡은 좌절감에 빠질 것이다. 도덕과 곧은 품성을 금과옥조로 여겨온 율곡으로서는 일탈할 지도 모를 일이다.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인재를 뽑기 위해 도입한 과거제와는 영 딴 판이라면서. 상상해보라. 저 총명한 공부의 달인 율곡이 오늘의 입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웅크린 모습을 말이다. 신사임당의 속은 얼마나 타들어갈까. 이게 아닌데. 신사임당은 아들을 일으켜 세워 등을 도닥거려 줄 것이다. 그 험하고 먼 수능레이스를 완주하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면서. 그리고 이렇게 훈도할 것이다. 출발선이 달라도, 학습이 늦어도 꿈은 꿈꾸는 자에게 있다고.

2016-11-16 07:08:12 메트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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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가습기살균제 제조업체 손해배상 하라"

법원 "가습기살균제 제조업체 손해배상 하라" 가습기 살균제를 이용해 폐 질환 등으로 사망하거나 다친 피해자들에게 제조업체가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법원의 첫 판단이 나왔다. 그러나 국가의 배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15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0부(이은희 부장판사)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유족들이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살균제 제조업체 세퓨가 피해자 또는 유족 모두 10명에게 1인당 1000만∼1억원씩 모두 5억4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가습기 살균제와 피해자들의 사망 또는 상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여 세퓨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며 "원고들이 위자료만을 청구했는 데 청구한 금액을 모두 인용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세퓨는 법정에서 가습기 살균제 사용과 피해자들의 폐 손상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는 취지의 답변서만 1차례 제출했으며 법원에 출석해 적극적으로 다투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국가에 대한 청구에 대해)피해자들이 국가에 관리 감독상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언론 기사와 보도자료만 증거로 제출한 상태"라며 "증거가 부족해 청구를 기각한다"고 전했다. 또한 "피해자 측이 일단 1심 판결을 받은 뒤 항소심 재판 중 국가 조사가 이뤄지면 이를 증거로 판결을 받겠다는 입장을 냈다"며 "항소심에서 추가적인 판단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법원은 지난해 1월에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국가 주의의무 위반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며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바 있다. 애초 피해자와 유족 등 모두 13명이 옥시, 한빛화학, 용마산업, 롯데쇼핑 등을 상대로도 소송을 냈지만, 지난해 10월 세퓨를 제외한 모든 업체가 피해자들과 조정에 합의했다.

2016-11-15 16:13:10 메트로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