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깊은 人터뷰]박민경 수의사, OIE 유일한 한국인에서 최연소 국장까지
3년 동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는 박쥐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코로나19 전에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은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와 사스도 낙타와 사향고향이가 매개체로 꼽힌다. 동물의 몸에 살던 바이러스가 변형되며 인간을 숙주로 삼게 된 '인수공통감염병'은 점차 다양하고 치명적인 방식으로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코로나19 이후 세계보건기구(WHO) 만큼이나 주목을 받고 있는 단체가 있다. 바로 세계동물보건기구(OIE)다. OIE는 수의사가 주축이 된 국제기관으로 동물 질병과 예방을 연구하고 국제 위생 규칙 정보를 회원국에 제공한다. 가축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신속하게 대응해 국가간 전염병의 확산 방지에도 큰 역할을 한다. 올해 초 OIE에서 한국인 여성 국장이 나왔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지난 2013년 OIE에 입사한 첫 한국인이며, 정직원으로는 유일한 한국인인 박민경 국장(사진)이다. 그는 입사 10년만인 지난 1월17일 OIE 최연소 국장 자리에 올랐다. 박 국장은 현재 회원국들에 질병과 관련된 지위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특정 질병에 대한 '청정국' '위험국'과 같은 지위는 한 국가의 무역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지표다. 프랑스 파리에 거주 중인 박 국장을 화상으로 만나봤다. - OIE는 어떤 곳인가. "가축의 질병과 그 예방에 대해 연구하고 국제적 위생규칙에 대한 정보를 회원국에게 제공해 무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국제기관이다. 1924년 프랑스에 설립돼 UN산하기관인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보다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OIE 회원국은 총 182개국으로, 한국은 1953년 11월에 OIE에 가입했다. 북한도 2001년부터 회원국이 됐다." - OIE에서 어떤 일을 맡고 있나. "지난 달 17일에 지위평가부서 국장이 됐다. 무역에 밀접한 관계를 주는 질병에 대한 회원국들의 지위를 평가하는 부서다. 구제역, 우폐역, 돼지열병, 아프리카 광우병과 같이 OIE 인증을 받는 7가지 주요 질병으로부터 청정, 위험에 대한 지위를 평가해 증서를 수여한다. 미청정국은 이 질병을 없애기 위해 방역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그 프로그램과 관련한 인증도 한다. 향후 5년 안에 어느 국가가 어떤 질병을 없애기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는 인증만 해도 무역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소고기, 돼지고기를 많이 수출하는 국가들에는 OIE가 인증하는 지위가 굉장히 중요하다." 박 국장은 수의사다. 워싱턴주립대학(WSU)에서 신경과학과 동물학을 복수전공하고, WSU 수의과대학으로 다시 진학해 수의사가 됐다. 그는 뒤늦게 수의사가 되기로 결심한데는 아버지 영향이 컸다고 했다. 박 국장의 아버지는 UN 산하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 항생제내성특별위원회에서 4년간 의장을 지낸 박용호 서울대학교 수의학과 교수다. 박 교수는 현재 대한수의사회 국가수의자문회의 의장을 맡고 있다. - 원래 수의사가 꿈이었나. "수의사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건 대학교 3학년이 돼서였다. 어린 시절, 미국 WSU에서 수의학 박사과정을 하는 아빠를 따라 학교에 가끔 놀러가곤 했다. 그때 아빠가 학교 자판기에서 아이스크림 샌드위치를 뽑아주시곤 했는데, 그 맛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WSU를 '맛있는 아이스크림 자판기가 있는 곳'으로만 여겼던 4살 꼬마가 20년이 지나 WSU에서 수의과대학생이 된 것이다. 어릴 때 아빠를 따라 국제 컨퍼런스를 다니다보면 나도 언젠가 무대에서 근사하게 발표하는 날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꿈을 꾸기도 했다. 그때 품었던 꿈이 뒤늦게 드러난 게 아닐까 생각한다." - OIE에 들어가게 된 계기는? "수의대 졸업을 앞두고 잠시 휴가차 들어간 한국에서 OIE 광견병 국제회의가 열렸다. 우연한 기회로 그 회의에서 자원봉사를 하게 되었고 회의에 초청된 많은 전문가들과 소통을 하면서 자연스레 OIE에 관심이 생겼다. 그 계기로 OIE에서 6개월 인턴을 하게 됐고, 박사 지원 결정을 일주일 남기고 OIE에서 정직원으로 채용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처음엔 6개월만 경험해보자 생각으로 짐도 다 두고 (프랑스에) 왔는데, 10년 가까이 있게 될 줄은 몰랐다." -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매력은 뭔가. "전 세계 여러나라 사람들을 동료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매년 5월 마지막 주에는 OIE 총회가 열린다. OIE에서 진행하는 가장 크고 중요한 회의로 180개 회원국 800여명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여기선 OIE 회원국들의 지위에 따른 증서를 수여한다. 청정국 증서를 받는 여러 나라 수의사들의 흐뭇한 표정을 보면 뿌듯하고 경건한 마음이 든다. 동물과 사람의 안전을 위한 일에 동참하고 전세계 방역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에 많은 보람을 느낀다." OIE는 본사와 지역 본부를 합쳐 230여명 정도가 일하는 작은 조직이다. 전세계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일한다. 박 국장은 유일한 한국인 정직원이기도 하지만, 조직 내 최연소 국장이기도 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체득해온 국제 회의의 경험과, 한국인 특유의 근성과 성실함이 원동력이 됐다고 했다. - 10년만에 국장이면 빠른 승진 아닌가. "조직 규모가 작다보니 승진 체계나 기회가 별로 없고, 입사 때와 같은 자리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도 많다. 주어진 일이 무엇이건, 열심히 해내는 한국인 특유의 성향이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사람들은 국제기구가 칼퇴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하루 12시간씩 일하고, 주말에 추가 업무를 하는 일도 허다하지만 맡은 일은 어떻게든 최고의 결과를 내려고 노력한다. 회의에도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활발하게 참여하는 편이다. 무엇보다 국제기구는 여러 정치적인 사안들이 얽혀있는데,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해 효율적인 결과를 낼 수 있는 소통 기술이 좋다.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 자란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빠짐없이 준비하고 회의에 들어가야 마음이 편한 완벽주의 성향도 있다. 이런 성격과 일하는 방식이 조직과 잘 맞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 유일한 한국인으로 지내는 건 어떤가. "OIE에서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한국을 대표한다는 마음으로 일한다. 그렇다보니 어떤 것도 대충하지 않고 늘 최선을 다한다. 한국 정부기관 파견자들을 돕고, 정부 기관들의 질문에 OIE측 의견을 전달하고 조언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로 연수 오는 한국 대학생들에 OIE를 소개하고 견학 방문을 돕기도 한다. 내가 최선을 다해 일하고, 한국인 수의사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면 뒤따르는 후배들이 국제 무대에서 활동할 때 도움이 될 것이란 사명감을 갖고 있다." 10년 전 우연히 잡은 기회는 어쩌면 운명이었다. 6개월 인턴은 어느덧 10년차 국장이 됐고, 20대 소녀는 그 사이 엄마가 됐다. 박 국장은 OIE에서 쌓아온 전문적인 지식과 능력으로, 딸을 위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 코로나19 이후 변화는 체험하나. "코로나19 이후 인수공통질병과 OIE의 기준에 관심이 커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OIE의 역할이나 일에 변화가 있지는 않다. 동물과 사람, 환경까지 함께 건강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원헬스'는 원래 코로나19 이전부터 중요한 화두였다. OIE는 이전에도, 지금도 질병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질병이 퍼지지 않도록 신속하게 대응하고 예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한국으로 들어올 계획도 있나. "아직은 없다. 하지만 언젠가 여기서 배우고 얻은 것들을 본국에서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물론 한국 정부 기관들에서 받아줘야 가능한 일이다.(웃음) 세계 어느 곳에 살든 한국인으로 자부심을 갖고 맡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적합한 타이밍에 이 자리에 왔듯이 주어진 날들을 열심히 살고, 지금 맡은 책임을 다 하다보면 언젠가 또 좋은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