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변해야 산다](上)'거수기'로 전락한 국민연금
국민연금이 최근 '환골탈태'하고 있다. '설립 30년 만에 운용자산 600조원 돌파', '일본-노르웨이에 이은 세계 3대 연기금으로 성장' 등 양적 가치 만을 강조하던 기존의 입장에서 벗어나 공적 역할을 강화하고 있다. 당장 올 하반기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통해 기업 지배구조 개선에 앞장서고 한국 사회의 질적 성장을 위한 공공투자 확대에 주력한다. 또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를 상설화하여 연금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확보한다. 메트로신문은 '국민연금, 변해야 산다'를 주제로 시장과의 소통 및 투명성 확보 방안을 짚어 본다./편집자주 문재인 정부 들어 국민연금의 행보가 달라지고 있다. 지난해 말 취임한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기금운용의 독립성과 투명성, 전문성 강화를 위해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과 사회적 책임 투자 원칙에 입각한 주주권 강화 방안 등을 연구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로부터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으며 우리 사회의 질적 성장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모양새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국민의 불신을 씻어내고 투명성을 높이려는 조치를 잇달아 취하고 있다"고 했다. 5일 정부에 따르면 보건복지부는 올해 국민연금의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한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상설화 법안을 마련한다. 기금운용위는 600조원이 넘는 국민연금 기금 운용에 관한 최고 의사결정기구다. 표면적인 국민연금 지배구조의 정점이지만 현재로선 기금운용의 주도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상설기구가 아니어서 회의는 1년에 몇 차례만 열린다. 각계 20명으로 구성된 위원들 역시 상정된 안건을 심도 있게 논의하지 않는 등 문제점이 제기됐다. 회의당 평균 2~3시간 안에 거의 모든 안건을 심의, 의결할 뿐 안건보고를 듣는 시간을 고려하면 깊이 있는 토의는 엄두조차 못낸다는 설명이다. ◆'층층시하' 시어머니 여전 복지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관계부처 차관, 국민연금 이사장, 사용자 및 근로자, 가입자 대표 등이 참여하는 기금운용위는 정부 당연직 위원의 참여가 6명으로 가장 많다. 정부에서 임명하는 일부 위촉위원들까지 합하면 사실상 정부가 기금운용 계획을 주도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또한 법적으로 국민연금의 현행 지배구조에선 기금 관리 및 운용권이 복지부 장관에게 있다. 장관이 위원장으로 있는 기금운용위원회가 기금운용 목표와 주요 투자 관련 사항을 결정한다. 위원회 결정에 따라 실제 국민연금 기금을 굴리는 기금운용본부는 국민연금공단에 속해 있다 보니 공단 내 이사에 불과한 기금운용본부장은 복지부 장관과 공단 이사장, 이사회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 여기에 기획재정부와 감사원까지 더하면 기금운용본부 입장에서 그야말로 시어머니가 한 둘이 아닌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구조를 탈피하기 위해 기금운용본부의 공사화를 주장했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이는 사실상 백지화됐다. 박능후 복지부 장관은 지난해 인사청문회에서 "기금운용본부의 공사화를 통한 독립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캐나다 등 세계적인 공적연금 운용사는 기금 고갈 문제 등이 화두로 제시되면서 지난 90년대 별도의 기금운용공사를 설립했다"며 "금융전문가로 구성된 이사회와 위원장, 1000여 명의 직원이 기금운용을 책임지고 성과에 따라 평가보수를 받는다"고 전했다. 복지부는 이에 지난해 논의를 통해 기금운용위를 상설화하고 최고 의사결정기구로서 권한과 책임을 확대하는 개편안을 마련했다. 정부 당연직은 2~3명으로 축소하고 현재 가입자 대표 성격인 구조를 상근자가 포함된 전문가 집단으로 바뀌는 내용이 담겼다. 논란이 컸던 기금운용본부 공사화는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를 법적기구로 만든다. 현재 국민연금 의결권행사 지침에 따르면 연금의 의결권은 원칙적으로 기금운용본부의 내부 투자위원회에서 행사한다. 현재 전문위는 기금운용본부가 요청한 안건만 심의할 수 있을 뿐 개별 안건에 대해 독자적인 검토가 불가능하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선 전문성 있는 인사 영입이 절실하다"며 "국민연금의 독립성 확보를 위한 구조개편 만큼이나 기금운용 전문성이 떨어지는 낙하산 인사를 막는 것이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역대 이사장 '낙하산 인사' 논란 실제 국민연금을 거쳐간 역대 이사장 16명 가운데 절반은 장·차관 출신으로 대부분 정권의 보은 인사들이 차지했다. 국민노후 자금을 책임지는 이사장 자리에 투자 전문가가 아닌 정치인 출신이 선임되며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지난 1987년 국민연금 설립 초기 멤버인 장원찬 1대 이사장은 검사 출신으로 서울시 시장을 역임했다. 이후 노태우 정부 들어 심유선 2대 이사장과 이상수 3대 이사장은 군 사단장 출신이었다. 문민정부 들어선 처음으로 복지 분야 관료 출신인 조기욱 4대 이사장이 선임됐다. 다만 김태환 5대 이사장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총무비서관 출신으로 다시 정치인이 발탁됐다. 이후 6대 최선정 이사장부턴 보건복지 분야와 연관이 있는 인물들이 이사장직을 맡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 이사장을 포함 7대 전계휴 이사장, 8대 차흥봉 이사장 모두 취임 몇 개월 만에 복지부 장·차관에 임명되며 자리를 비우는 등 낙하산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0대 장석준, 11대 김호식, 13대 전광우, 14대 최광, 15대 문형표 이사장은 모두 정부에서 차관 또는 장관을 역임한 후 국민연금 이사장직을 맡았다. 12대 박해춘 이사장은 유일한 금융업계 출신이었지만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관련이 깊은 인물로 알려졌다. 국민연금은 현재 지난해 11월 말 기준 615조원의 기금을 운용하는 등 세계 3대 연기금으로 꼽힌다. 오는 2043년에는 기금규모가 2500조원까지 불어나는 등 갈수록 거대해지고 있다. 막대한 자금이 국민연금으로 모이면서 정권의 개입은 보다 구체화되는 등 곳곳에서 국민연금의 독립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문재인 정부 들어 공석으로 유지돼 온 이사장 자리에 지난해 말 김성주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임명됐지만 김 이사장 역시 전문성이 없는 정치인 출신이란 이유로 일각에선 낙하산 인사 논란이 불거진 바 있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다만 "이사장은 국민연금의 제도와 기금을 아우르는 자리로 김 이사장은 지난 19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활동했는 등 관련 분야에 정통한 인물로 평가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