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매국노가 '집적'된 곳
반도체는 '집적'이 가장 중요한 산업군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반도체도 본래 이름은 '집적 회로(IC)'. '무어의 법칙'도 일정 공간에 얼마나 많은 트랜지스터를 담아낼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한다. 더 높은 집적도를 위해서는 초미세 기술력이 필요하다. 요즘 반도체 업계 뜨거운 감자인 EUV 장비가 한 번에 새길 수 있는 굵기가 13.5나노미터. 전자가 지나다니는 회로를 이것보다 더 얇게 만들기 위해서는 또 다양한 기술을 적용해야 한다. 반도체가 더 작아지려면 반대로 회사는 더 커져야한다. 비싼 장비와 커다란 공간은 물론, 필요한 사람들도 많다. 반도체 업계가 전자공학과를 비롯한 응용 과학뿐 아니라 화학과 소재, 기계와 물리 등 순수 과학 전공자들도 다수 필요로 하는 이유다.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생태계가 빈약한 이유가 빈약한 수학 때문이라는 비판도 있을 정도. 회로가 너무 미세해지면서 전자가 순간이동하는 '터널링'현상까지 일어나고 있으니, 이제는 정말 획기적인 상상을 해낼 문과생들까지 총동원해야할지도 모르겠다. 반도체 강자들은 그렇게 탄생해 나라를 먹여살리고 있다. 인텔이 미국을 강대국으로 만든 핵심 기업이라는 건 주지의 사실. TSMC도 중소기업만 모여있어 몰락하던 대만을 다시 끌어올렸다. 중국이 반도체 굴기를 선언하고 특정 기업에 힘을 몰아준 것도 다 의미가 있다. 굳이 반대 이야기를 하면, 장인 정신 때문에 한우물만 파던 일본은 더이상 반도체 강국으로 불리지 못한다. 중소기업 밀어준다고 대기업이 늘어나고 반도체 강대국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나라는 유독 반기업 정서가 만연해있다. 길고 깊은 부자에 대한 반감 역사 때문인가본데, 그래도 별 이유없이 기업이 커지는 걸 그냥 보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위기가 올 때마다 희안한 법안이 새로 만들어지고, 혹은 남들 다하는 지원조차 끊어버리는 게 부지기수다. 반도체 지원안도 그랬다. 기껏 나서서 다른 나라 수준이라도 지원해달라 개정안을 제시하니 '재벌 쁘락치냐'는 인신 공격은 물론, 날치기로 갈갈이 찢어서 누더기로 만들어놨다. 그나마 대통령이 다시 바로잡겠다고 나서긴 했지만, 대한민국이 기업하기 어려운 나라라는 건 다시 한 번 전세계에 각인시켰다. 반도체 공장 하나가 유발하는 고용 효과가 수만단위다. 여기에 교육 시설이나 인프라, 이것저것 다 합치면 경제적 효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다. 양향자 의원이 말했다. 반도체 산업법을 누더기로 만든 정치인들은 매국노로 기억될 것이라고. 정치인들 말에 공감을 잘 하지 않지만, 아마도 잊지 못할 것 같다. /김재웅기자 juk@metr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