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발 '부채절벽' , 한국경제 부채 늪에 빠지면 회생 불가
"한국 정부는 여러 조처를 동원해 빠르게 느는 가계부채에 대응하고 있으나 총부채상환비율(DTI) 한도 규제는 60%로 주변국에 견줘 높은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이 비율을 점진적으로 30~50% 수준까지 끌어 내려야 한다"(국제통화기금 한국 보고서(2016 ARTICLE 4))
미국의 경제학자 피셔(계량경제학의 창시자)는 1933년 '부채 디플레이션(Debt Deflation)' 개념을 통해 장기 경기 사이클에서 부채와 물가를 가장 경계해야 할 변수로 꼽았다. '호황 국면이 끝난 후 부채 조정 과정에서 나타난 자산 가격 하락과 유동성 위축 등이 실물경제 침체와 물가 하락으로 퍼진다는 것. 이런 디플레이션에서 실질 채무는 불어나고, 채무자는 소비와 저축을 줄일 수밖에 없다. 이는 다시 실물경제 침체와 물가 하락이라는 악순환 고리를 만든다'는 게 부채 디플레이션의 요지다.
지금 한국 경제가 처한 모습도 이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금리가 오르면 가계가 빚을 내고 싶어도 늘리기 어려운처지에 내몰릴 수 있고, 이는 한국경제에 충격을 몰고 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1340조 가계빚, 한국경제에 '퍼펙트 스톰' 우려
97년 외환위기 진원지는 경상수지 적자였다. 11월 외환위기가 터지기 직전까지도 아무도 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1996년 경상수지 적자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4%에 달했다. 1992년 629억달러였던 대외 지불 부담은 1996년 1643억달러로 연평균 27% 증가했다. 대부분 금융회사의 외화 부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2017년 한국경제의 위험징후는 '부채'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말 가계신용(가계대출+판매신용) 잔액은 1344조3000원이다. 저금리 상황에서 폭증한 가계부채는 금리 인상기에 부담으로 작용한다.
부채의 질이 악화되고 있다는 증거도 곳곳에서 나온다.
한국은행이 국회에 제출한 '금융안정보고서'를 보면, 올해 9월말 기준 가계대출 총액(1228조원)에서 취약차주의 비중은 6.4%로 78조6000억원에 이른다. 한은은 3곳 이상의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아간 다중채무자로 저신용자(신용등급 7~10등급)이거나 저소득자(소득 하위 30%) 요건을 추가로 충족할 경우 취약차주로 분류했다.
다중채무자이면서 저신용자의 대출 비중은 4.1%(50조원), 다중채무자이면서 저소득자의 대출 비중은 3.2%(39.3조원)였다. 다중채무·저소득·저신용 세가지 요건에 모두 해당하는 이들의 대출 비중은 0.9%(11조원)로 추산된다.
취약차주 규모는 가계대출 전체 차주(1830만명)의 8%에 해당하는 146만명이었다. 특히 다중채무·저소득·저신용 세가지 요건에 모두 해당하는 이들은 2.1%, 38만명으로 추산된다.
저신용, 저소득, 다중채무 차주들이 보유한 연 15% 이상 고금리 신용대출액 비중은 각 17.3%, 5.8%, 8%에 이른다.
◆미국도 일본도 가계부채에서 위기 시작
가계부채의 위험성은 경험적으로 잘 안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부채가 순간의 정책 실패나 외부 충격과 결합할 때 충격은 핵폭탄급으로 돌변한다. 세계 경제사를 봐도 심각한 경기침체는 가계 빚에 있었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전주곡이었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위기는 가계부채가 주택시장의 버블 붕괴와 만나 터진 대표적인 사례였다. 1990년대 시작된 일본의 장기불황 역시 경기부양을 위한 저금리 정책이 부동산 관련 대출 확대로 이어졌다. 이는 결국 자산거품이 꺼진 원인이 됐다.
이처럼 가계부채의 악몽을 경험한 선진국들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저마다 과도한 가계빚을 줄이는 작업에 들어갔다. 빚을 줄이는 게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경제의 체질 바꿔야 미래가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한국금융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2분기 말 기준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미국 78.8%, 일본 65.9%이다. 우리나라는 90.0%나 된다. 세계적으로 부동산 버블이 심각한 영국 87.6%도 추월했다. 프랑스 56.7%, 독일 53.4%였다. 한국은 경제규모 대비 가계부채 부담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이다. 이 비율은 1962년만 해도 1.9%에 불과했지만, 2000년 50%대, 2002년 60%대로 진입하며 가파른 속도로 치솟아 홍콩을 앞지른 뒤 14년째 신흥국 1위를 지키고 있다.
시장에서는 이런 생계형 대출이 부실화하면 가계부채가 국가경제를 위협하는 시스템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의 강종구 미시제도연구실장은 '가계부채가 소비와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보고서에서 "최근 가계부채 누적으로 소비와 경제성장에 부정적인 저량효과의 기여도가 확대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가계부채 증가세를 억제할 필요가 있다"며 자산투자 목적의 대출 증가를 줄이고 금융시장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악 시나리오는 주택가격 하락과 기업부채 부실이 동시에 발생하는 '복합 충격'이 가해지면서 자산 버블이 꺼지는 것이다. '자산 가격 폭락→소비 위축→기업투자 감소→경기 위축'이라는 악순환 고리로 이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물가 상승까지 겹친다면 경제는 한동안 고물가·저성장이 함께하는 스태그플레이션 늪에 빠져들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중위소득 50~100%에 속하는 한계 중산층이 추가 붕괴할 것으로 염려된다.
시장에서는 가계부채가 소비 여력을 제약하고 경제 성장의 활력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우려한다.
현대경제연구원은 가계부채가 소비증가율을 0.63% 포인트 낮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조규림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가계부채가 소비에 미치는 부정적 효과를 최소화하기 위해 부동산 경기에 대한 정부의 정책 방향을 명확하게 수립하고 채무부담을 낮추기 위한 가계부채 구조개선을 지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금융연구원 구정한 선임연구위원은 "주택담보대출뿐만 아니라 주택 임대가격 상승으로 인한 주거비용 증가, 이에 따른 생활비 부족에 기인한 생계자금 수요 증가가 가계대출 수요 급증에 영향을 미쳤다"면서 정책서민금융 확대, 연체전후 채무재조정, 복지 및 자활프로그램 연계 등을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