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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인터뷰]'야시시' NS윤지 "평소 화장도 안 하고 하이힐도 안 신어"

"평소 화장도 안하고 하이힐도 안신죠." '섹시 여가수' NS윤지(27)가 1년 6개월만에 새 미니앨범 '더 웨이2' 타이틀곡 '야시시'로 가요계에 돌아왔다. 시작부터 뜨거웠다. 신보 공개를 앞두고 공개한 수영복 티저 사진은 물론 뮤직비디오 등이 남심을 흔들었다. 최근 가요 무대에서도 몸매 라인이 그대로 드러나는 검은색 밀착 스키니를 소화했다. 그러나 NS윤지의 실제 성격은 섹시와는 거리가 멀었다. ◆ 1년 6개월 공백 2012년 디지털싱글 '이프 유 러브 미'의 매력적인 음색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NS윤지의 공백은 생각보다 길었다. 1년에 두차례 싱글을 발매하는 최근 가요계 트렌드와 다른 행보였다. "1년 반 만에 돌아왔네요. 의도치 않게 공백기가 길어졌지만 쉬지않고 준비해왔어요. 아쉽게 폐지됐지만 3개월동안 다이빙 프로그램 '스플래시'를 준비했고. 조그만 행사부터 대만, 홍콩 등 해외 공연도 진행하며 쉬지않고 대중을 만났죠. 지난해 1월 미국에 다녀온 열흘 정도만 맘편히 쉬었던 것 같아요. 이번 앨범도 1년동안 준비한 거예요." 덕분에 이번 앨범 타이틀곡 '야시시'는 물론 두 번째 트랙 '이프 아이 러브 유'도 음원 공개와함께 주목받고 있다. NS윤지는 앨범에 대해 "타이틀곡 '야시시'는 신나는 노래기 때문에 무대에서 즐겁고 재미있게 할 수 있어서 좋다"며 "댄스브레이크 부분이 있는데 그날 무대 느낌에 따라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어 좋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이어 "이단옆차기께서 직접 피처링해준 두 번째 트랙 '이프 아이 러브 유'는 여자의 심정이 강하게 담겨있다"며 "박재범씨가 피처링한 '이프 유 러브 미' 2탄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이기도 하다"고 소개했다. ◆ NS윤지 새로운 발견 한시간여 동안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NS윤지는 김윤지로 돌아왔다. 털털한 웃음과 솔직한 모습 섹시 여가수라기 보다는 여자 대장부의 느낌이 강했다.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지만 노출에 대한 부담은 없어요. 어렸을때부터 미국에서 자라서 그런지 제 모습을 보고 '이게 심한건가?'라는 생각도 가끔해요. 그런데 가장 큰 고민은 미국 친구들이 제 모습을 보고 적응을 못하는 거죠.(웃음) 농구 선수로 활동하며 어린시절을 보냈고, 스포츠와 자동차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제 모습을 기억하고 있죠. 저 또한 어색하지만 무대위에서는 다른 매력을 보여줄 수 있어 즐거워요." NS윤지의 반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루 5끼를 먹을 정도로 남다른 식성을 가진 NS윤지는 컴백을 앞두고 첫 다이어트에 도전했다. "뮤직비디오 촬영을 위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이어트에 도전했어요. 3개월 동안 닭가슴살과 바나나, 견과류를 먹고 살을 빼면서 근력 운동을 했죠. 덕분에 반응은 좋았지만 지금은 심각한 요요현상을 겪고 있죠. 뮤직비디오 촬영 후 닭강정과 돈가스, 치즈김밥에 빠져서 4kg정도 늘어났어요. 데뷔 무대를 보신 어머니께서 관리하라는 연락을 할 정도였죠. 다이어트 생각만해도 끔찍해요."(웃음) ◆ 데뷔 5년, 10년 뒤에는 '제2의 엄정화' 이제 활동 5년차를 맞이한 NS윤지는 다양한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단독 콘서트부터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까지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금은 가수로서 자리잡고 단독 콘서트를 진행하는 게 우선이지만 5년 뒤에는 다른 분야에 도전해 보고 싶어요. 도전을 좋아하는 성격 탓이기도 하죠. 그래서 연기 레슨도 시작했죠. 제 자신이 준비됐을 때 좋은 작품을 만났으면 좋겠어요." 자신의 롤 모델에 대한 질문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엄정화를 지목한 NS윤지의 향후 행보가 기대된다.

2014-04-09 14:48:19 양성운 기자
中 호화연회 금지령에 상어지느러미 수입 '뚝'

중국에 수출된 상어지느러미가 90%나 급감했다. 시진핑 정부가 지난해 호화 연회를 금지, 고급 상어지느러미 요리인 '샥스핀'이 관료들의 식탁에서 사라진 탓이다. 9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국제환경보호단체인 세계자연기금(WWF) 홍콩본부를 인용, 홍콩에서 중국으로 수출된 상어지느러미가 2012년 120만kg에서 지난해 11만 3973kg으로 약 90% 감소했다고 전했다. 홍콩의 상어지느러미 최대 수입국이었던 중국은 2010년 이후 처음으로 베트남에 최대 수입국 자리를 내줬다. 홍콩은 세계 최대 상어지느러미 시장 중 하나다. 홍콩으로 들어온 상어지느러미는 대부분 중국 본토로 재수출돼 결혼식과 연회 음식 등으로 사용된다. 환경보호단체들에 따르면 중국이 전 세계 상어지느러미 수요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홍콩으로 들어오는 상어지느러미 분량도 2012년 8285t에서 지난해 5412t으로 35% 감소했다고 WWF는 밝혔다. 이는 10년 만에 최저치다. SCMP는 상어지느러미의 수요가 줄어든 가장 큰 요인으로 중국 정부의 사치풍조 척결 운동에 따른 호화 연회 금지 조치를 꼽았다. 이와 함께 환경 단체들의 상어지느러미 거래 금지 운동도 효과를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2014-04-09 14:40:29 조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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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사각링영웅' 워리어-헐크호건 재조명

'워리어 사망 소식에 헐크호건 재조명' '영웅' 워리어의 사망으로 영원한 라이벌 헐크 호건이 재조명 되고 있다. 헐크호건은 WWE 최고의 슈퍼스타다.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평가도 많이 받았지만 그 역시 선배들의 그늘에 가려서 불만을 토로하던 시절이 있었다. 1980년대 중반 미국 3위 단체 AWA에서 활약하던 시절, 중년을 훌쩍 넘긴 프로모터 겸 선수인 버네 가니에에게 아마추어 레슬링을 하지 않았기에 실전 능력이 부족하다면서 스타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 단체는 50대들이 아직도 메인이벤트를 장식하고 있었다. 선배들에 대한 분노가 가득하던 헐크호건은 부친에게 회사를 매입한 빈스 맥맨의 제의를 받아들여 WWE로 이적해버렸고, 빈스 맥맨은 아버지의 간판스타인 밥 백런드 대신 헐크 호건을 간판으로 밀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1980년대 초반 잠시 악역으로 등장했던 WWE에서 다시 1983년 12월 27일 등장한 헐크 호건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1984년 1월 23일 MSG(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아이언 쉬크를 잡고 WWE 챔피언에 오른다. 이후 1990년 레슬매니아6에서 워리어에게 패해 챔피언 밸트를 내준다. 이후 1994년 WCW 로 이적 그해 7월 릭플레어를 제압 WCW챔피언에 새롭게 등극한다. n.W.o의 수장으로 또다시 잠시 악역을 하며 많은 팬들에게 충격을 줬고 1998년에는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이후에 다시 번복하고 2002년 WWE 로 복귀 당대 최고의 젊은 스타들과 대립. 새로운 시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사생할과 가족사에 관한 문제는 그리 밝지못하다. 명품을 지나치게 밝히는 바람에 그의 연수입 대부분을 짧은 시간 안에 지출하는 아내 때문에 엄청난 곤혹을 치르기도 했으며 3류 가수인 딸 브룩 호건과 승용차 그것도 람보르기니급의 고가 명품차량을 교통사고로 폐차시키는 아들 닉 호건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헐크 호건은 힘들게 번 돈이 너무나 허무하게 지출되는 것을 견디다 못한 나머지 이혼했다. 한편 지난 8일 사망한 얼티미트 워리어는 1959년 6월 16일생으로 본명은 제임스 브라이언이다. 그는 미국의 전 프로레슬링선수로 원래는 이름이 제임스 브라이언 헬위그였지만 나중에 개명을 하여 이름에 선수시절 링네임인 워리어가 들어가게 되었다. 1987년 10월 7일 아무 음악도 없이 걸어 나와 무명의 테리 깁스를 가볍게 꺾은 워리어에게 이후 '쿵 쿵'거리는 등장 음악도 주어졌고 링으로 달려가 로프를 흔드는 퍼포먼스까지 더하자 팬들은 강한 인상을 받았다. 오래 버티지 않고 반짝하다가 사라질 것이라는 일부 선배들의 평가와 달리 WWE에서는 수직상승하면서 10개월 만인 1988년 8월 29일 서머 슬램에서 홍키 통크 맨을 31초 만에 꺾고 인터컨티넨털 챔피언에 오르기도 했다.

2014-04-09 14:36:49 양성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