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럴려고 돈맡겼나"...은행에 돈 오래 맡길수록 손해?
# 50대인 김 모씨는 30억원대의 금융자산(지난해 말 기준)을 보유한 큰 손이다. 그는 물려받은 부동산 임대소득과 이자소득으로 생활하는 '안정형' 투자자로 분류된다. 그런 그가 최근 은행에서 적잖은 돈을 빼냈다. 은행에 묵힐 수록 손해라는 말은 들었지만 직접 경험해보니 '설마'가 현실이 돼서다. 김 씨가 선택한 대안은 사모 회사채였다. 채권의 경우 안정적인 데다 사모채의 경우 수익률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판단에서다. # 가산 디지털 단지에 있는 벤처회사에 근무하는 직장인 이 모씨(32)는 최근 은행연합회 정기예금 상품을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만기가 1년 더 긴 데도 금리가 같거나 역전된 상품까지 있었다. 김 씨는 "만기가 길수록 금리가 높다는 게 상식이다. 말 문이 막힐 뿐이다"며 "그나마 예·적금이 목돈 마련에 제격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어디에 넣어야 할 지 고민이다"고 말했다. 은행에 돈을 오래 맡길수록 손해보는 시대가 됐다. 초저금리 기조가 이어지면서 시중은행 예·적금 상품에서도 장단기의 금리 차이가 사라지고 있고, 일부 상품은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만기가 길수록 금리도 높다는 예·적금의 '상식'이 깨지고 있는 것이다. ◆ 이럴줄 몰랐네, 은행에 오래 묶히면 손해(?) 30일 전국은행연합회에 따르면 광주은행의 정기예금 상품은 3년보다는 2년 만기로 가입하는 게 더 유리하다. '스마트모아드림정기예금'의 2년 만기 상품 금리는 30일 기준 연 1.84%로 3년 만기 금리인 1.79%보다 더 높다. 또 다른 상품인 '플러스다모아예금'도 3년보다 2년 만기 상품에 가입하는 게 낫다. 2년을 맡기면 1.74%를 주지만, 3년을 맡기면 1.69%로 오히려 손해다. 맡기는 기간은 1년이 긴데도 금리는 같은 경우도 있다. 기회비용과 시간가치를 따지면 손해인 경우다. SH수협은행의 '정기예금'은 2년, 3년 만기 상품의 금리가 1.38%로 같다. 우리은행의 '키위정기예금(확정형)'은 1년 만기와 2년 만기 상품의 금리가 1.10%로 동일하다. 제주은행의 '사이버우대정기예금(만기지급식)'도 2, 3년 만기 금리가 1.80%로 동일하다. 한국씨티은행의 '프리스타일예금'도 2년과 3년의 금리가 1.40%로 같다. 서민들의 목돈 마련처인 적금도 사정은 비슷하다. KEB하나은행의 '행복투게더적금'은 3년, 4년 금리가 1.70%로 같다. 이 은행의 '하나머니세상 적금'도 6개월과 12개월 금리가 1.00%로 같고, 'T핀테크적금'은 1년, 2년 예금 금리가 1.70%로 동일하다.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의 '퍼스트기업적금'은 1년~5년 금리가 1.70%로 동일하다. 이 은행의 '퍼스트가계적금'은 3년을 선택하든 5년을 선택하던 금리는 1.70%밖에 받을 수 없다. 전북은행의 '정기적금(정액적립식)' 역시 4년, 5년 적금 금리가 1.70%로 동일하다. 제주은행의 '제주Tops허니문통장'은 3년이나 4년 모두 1.70%의 동일한 금리를 적용한다. 은행들은 예금 상품의 1년 만기와 3년 만기의 금리 차를 보통 0.10∼0.20%포인트 정도로 유지해 왔다. 하지만 은행연합회에 올라온 시중은행들의 정기예금 상품 격차는 평균 0.118%로 낮아졌다. DGB대구은행 e'-U(이유)예금(만기지금)'과 'DGB행복파트너예금(일반형)'은 0.04%포인트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전북은행 '시장금리부 정기예금(만기지급식)'과 제주은행 '사이버우대정기예금(만기지급식-일반)'도 각각 0.05%포인트 격차에 불과했다. IBK기업은행 'IBK평생한가족통장', NH농협은행 '큰만족실세예금', 우리은행 '키위정기예금(확정형)', 케이뱅크은행 '주거래우대 정기예금', 한국씨티은행 '프리스타일예금', 한국카카오은행 '카카오뱅크 정기예금' 등도 1년, 3년 예금금리 격차가 0.1%로 평균보다 낮다. 한국은행 기준금리 1.25%포인트에도 못미치는 셈이다. ◆ 이유있는 장·단기 금리 왜곡 왜 장단기 예·적금 금리가 같아지거나 역전되는 일이 벌어질까. 답은 간단하다. 은행 입장에선 금리 변동에 따른 리스크를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 3년 만기 상품의 경우 가입할 때 정해진 금리가 3년 동안 적용되는데, 고객이 가입한 후 금리가 더 떨어지면 은행은 계속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A은행 금리 담당자는 "예금 기본 금리는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변동이나 국고채 금리 등의 움직임에 따라 바뀌게 된다"면서 "초저금리 시대에 접어들면서 은행도 이자장사를 하기 힘들어졌다. 앞으로 미국이 기준 금리를 인상하면 금리가 어떻게 움직일지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이 대형 은행에까지 확산될지도 관심사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금리 역전 현상이 나타난 적이 있다. 장단기 예금금리 역전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시중 은행들마다 속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며 "상황에 다라 다른 대형 은행으로까지 확산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