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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외국인 북적이는 매장, 얇아진 내국인 지갑

방한 외국인 관광객의 증가가 유통가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이곳저곳에서 외국인 매출이 늘었다는 이야기가 쏟아진다. 실제 주요 유통 기업들의 1분기 성적표를 들여다보면 화려함 그 자체다. 롯데백화점 본점은 매출의 4분의 1 가까이를 외국인이 채웠고, 신세계백화점은 외국인 매출만으로 '연간 1조 원 클럽' 가입을 목전에 두고 있다. 더현대 서울은 외국인 매출이 두 배 넘게 뛰며 관광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 편의점인 GS25와 CU 또한 외국인 결제 매출이 60~70% 이상 급증하며 'K-편의점'의 위상을 증명했다. 올해 1분기 방한 관광객이 476만 명으로 역대 최대치를 갈아치웠으니, 유통가 입장에선 그야말로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형국이다. 하지만 화려한 숫자의 잔치 뒤편에는 서늘한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매장을 가득 채운 외국인들의 활기찬 대화 소리와 달리, 우리 국민들의 소비 심리는 차갑게 식어버린 탓이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4월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전월보다 7.8포인트나 급락하며 100 아래인 99.2로 떨어졌다. 지수가 100 미만이라는 것은 경제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는 소비자가 낙관적인 이들보다 많아졌음을 의미한다. 외국인에게는 축제인 유통 매장이 내국인에게는 선뜻 지갑을 열기 두려운 공간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러한 극명한 대조의 중심에는 '환율'이라는 양날의 검이 있다. 달러당 1490원까지 치솟은 고환율은 방한 외국인들에게 강력한 구매력을 선물했다. 그들에게 한국은 고품질의 물건을 저렴하게 살 수 있는 '쇼핑 천국'이 됐지만, 수입 물가 상승 압박을 견뎌야 하는 내국인들에게 고환율은 생활고를 가중하는 고통의 원인이다. 외국인이 럭셔리 주얼리와 명품 쇼핑에 열을 올리는 동안, 우리 서민들은 장바구니에 담을 채소 하나 가격에 손을 떨며 지갑을 닫고 있다. 결국 지금 유통가가 누리는 호황은 외부 요인에 기댄 '반쪽짜리 활력'일지도 모른다. 외국인 관광객의 소비가 실적을 떠받치고는 있으나, 내수 소비라는 기초 체력은 갈수록 허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관광객은 언제든 대외 환경에 따라 발길을 돌릴 수 있는 가변적인 수요다. 유통업계가 외국인 특수에 취해 정작 안방 고객들의 아우성을 외면한다면, 환율의 마법이 풀리는 순간 마주할 내수 시장의 공동화 현상은 감당하기 힘든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화려한 매출 신기록에 가려진 '내수 침체'라는 구조적 위기를 직시해야 할 때다. /김서현기자 seoh@metroseoul.co.kr

2026-05-12 16:49:08 김서현 기자
[기자수첩] 증시의 여름, 골목의 겨울

"자고 일어나면 돈이 복사되는 것 같아. 장이 안 열리는 주말이 지겹고 월요일이 기다려질 정도라니까!" 최근 기자의 지인이 건넨 말이다. 그만큼 지금 주식시장을 바라보는 투자자들의 열기는 뜨겁다. 증권시장은 벌써 한여름이다. 인공지능(AI) 투자 확대와 메모리 반도체 초호황, 자본시장 제도 개선 기대가 맞물리며 한국 증시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숫자만 놓고 보면 한국 경제가 새로운 전성기에 들어선 듯하다. 하지만 골목시장은 아직 혹한기다. 4대 금융그룹(KB·신한·하나·우리)이 올해 1분기 말 사실상 회수가 어렵다고 분류한 '추정손실' 규모는 2조9963억원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1년 이상 연체됐거나 폐업·파산 등으로 사실상 떼인 돈이다. 코스피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동안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은 내수 부진과 고금리를 견디지 못한 채 하나둘 시장에서 밀려나고 있다. 그렇다고 증시의 상승을 거품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주식시장은 본래 현실보다 한발 앞서 움직이며 미래의 기대를 먼저 가격에 반영한다. 인공지능(AI) 투자 확대와 메모리 반도체 초호황, 상법 개정과 주주환원 기대를 감안하면 '만스피(코스피 1만)' 역시 단순한 공상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문제는 주가가 너무 올랐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승의 온기가 아직 골목경제까지 퍼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의 랠리는 반도체와 일부 대형주, 그리고 정책 기대가 이끌고 있다. 반면 코로나19 이후 대출로 시간을 벌었던 자영업자들은 여전히 빚의 무게를 견디고 있고, 영업이익으로 이자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중소기업들은 법정관리로 내몰리고 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코스피 7800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보여주고, 추정손실 2조9963억원은 현재의 고통을 드러낸다. 하나는 증권시장의 한여름을, 다른 하나는 골목시장의 한겨울을 말한다. 지금의 상승장이 거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지수의 신기록만 보고 한국 경제 전체가 회복됐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또한 모두가 돈을 버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일수록 빚을 내 뒤늦게 시장에 뛰어드는 것은 가장 위험한 선택일 수 있다. 진짜 호황은 주가가 얼마나 올랐느냐가 아니라 그 상승의 온기가 시장 밖으로 퍼져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증권시장의 뜨거움이 골목시장의 겨울까지 닿을 때, 그때의 '만스피'는 단순한 숫자를 넘어 한국 경제 전체의 회복을 상징하는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허정윤기자 zelkova@metroseoul.co.kr

2026-05-11 16:18:54 허정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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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기억상실

39년 만의 개헌 시도가 무산됐다. 임기 만료를 눈 앞에 둔 우원식 국회의장은 20분간 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를 예고한 데 대해 열변을 토했다. "답답하다"며 산회를 선포한 우 의장은 의사봉을 힘껏 내리치며 산회를 선포했다. 발언 중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사실 우원식 의장이 눈물을 보인 건 다른 데 있지 않다. 시계를 8년 전으로 돌려야 한다. 2018년 지방선거 전, 당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였던 우 의장은 정부여당의 개헌안 통과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심지어 당시에는 국민투표법을 개정해야 하는 상황이라, 야권의 협조가 절실했다. 하지만 자유한국당은 '시기상조'라며 정략적이라는 이유로 국민투표법 개정안과 헌법 개정안 처리에 협조하지 않았다. 권력구조 개편에서 이견이 갈리기도 했다. 그러니 우 의장으로서는 두 번의 좌절을 맛본 셈이다. 당시 개헌이 추진된 이유가 있다. 2017년 대선에서 모든 대선 후보가 개헌을 약속해서다. 자유한국당도 개헌을 주장했다. 모든 대선 후보의 약속인 만큼,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 개헌안을 발의했다. 뭔가 익숙한 그림이다. 2025년 대선 때에도 국민의힘은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라며 개헌을 주장했다. 그래서 이번엔 민감한 부분인 권력구조 개편은 하지 않고, 5·18 정신 헌법 전문 수록이나 대통령의 계엄 선포 요건 강화 등을 넣었다. 이 부분은 야권도 찬성했던 부분이라 개헌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다. 그런데도 국민의힘은 반대했다. 부마항쟁을 요구해서 넣었더니, 이번엔 새마을운동 정신을 포함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왔다. 권력구조 개편이 없다며 '누더기'라고 폄하했다. 그런데 이재명 대통령이 연임을 하려는 의도라고 주장했다. 권력구조는 건드리지 않았음에도. 자유한국당은 지금의 국민의힘이 됐다. 그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시기상조' '정략적 개헌'이라는 낡은 방패를 꺼냈고, 대선 국면의 약속은 선거용 미끼였다는 걸 증명했다. 그렇게 민주당의 이름으로 기록될 '성공의 역사'를 저지하는 게 그들의 진정한 속내라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기억하고 있다. 단체로 기억 상실에 걸리지 않는 한 말이다. 그들은 국민이 잊기를 바랄 수 있다. 그럼에도 국민은 8년 전 일을 기억하듯, 현재의 일도 기억할 것이다. 기억상실에 걸린 건 누구인가. /서예진기자 syj@metroseoul.co.kr

2026-05-10 14:36:21 서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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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AI 활용은 늘었는데 일손은 그대로

"AI 도입으로 업무 효율을 높였다." 최근 기업들이 가장 자주 내세우는 표현이다. 생성형 인공지능(AI)과 AI 에이전트 도입이 확산하면서 기획서 작성, 번역, 고객 응대, 코딩, 콘텐츠 제작까지 AI 활용 범위도 빠르게 넓어진다. 기업들은 "생산성이 높아졌다"고 말하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AI를 써도 일손은 줄지 않았다는 반응이다. 분명 AI는 강력한 도구다. 초안 작성 속도는 빨라졌고 반복 업무 부담도 줄었다. 하지만 업무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AI가 만든 결과물을 사람이 다시 검수하고 수정하는 과정이 새롭게 추가됐다. 생성형 AI 특유의 '그럴듯한 오류'도 문제다. 틀린 정보를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환각(할루시네이션) 현상은 여전히 반복된다. 결국 실무자는 AI가 작성한 문장과 데이터, 출처를 다시 확인해야 한다. "AI가 대신 일한다"기보다 "AI가 만든 결과물을 사람이 책임지는 구조"에 가까운 셈이다. 업무 강도 역시 기대만큼 줄지 않는다. AI 덕분에 작업 속도가 빨라지자 기업들은 더 많은 결과물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과거 하루에 하나 만들던 보고서를 이제는 여러 개 처리하고, 콘텐츠 역시 더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이 생산해야 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생산성이 높아진 만큼 업무 기대치도 함께 올라간 것이다. 특히 콘텐츠 업계와 IT 업계에서는 이런 변화가 두드러진다. 개발자는 AI 코딩 도구를 활용하는 만큼 더 빠른 개발 속도를 요구받고, 기자와 마케터 역시 AI를 활용해 더 많은 결과물을 생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효율화가 곧 노동 감소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다. 문제는 많은 기업이 AI 도입 자체를 성과처럼 여긴다는 점이다. 실제 현장에서 업무 부담이 얼마나 줄었는지보다 "우리도 AI를 쓴다"는 상징성에 집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AI가 업무 혁신 도구인지, 단순한 비용 절감 압박 수단인지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AI 흐름 자체를 거스를 수는 없다. 산업 전반이 AI 중심으로 재편되는 것도 분명한 현실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AI 도입 속도가 아니라, 그 기술이 실제로 사람의 일을 줄이는 방향으로 작동하느냐다. AI는 이미 충분히 빠르게 현장에 들어왔다. 이제는 "무엇을 더 자동화할 것인가"보다 "사람의 부담을 실제로 덜어주고 있는가"를 고민할 시점이다.

2026-05-07 16:01:43 최빛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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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메모리 호황의 그늘

삼성전자 스마트폰 사업에 드리운 '칩플레이션'의 그림자가 예상보다 짙어지고 있다. AI 시대 최대 수혜 분야로 꼽히는 메모리 반도체 가격 급등이 되레 스마트폰 사업 수익성을 갉아먹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 삼성전자 모바일경험(MX) 사업부는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감소세를 보였다. 갤럭시 S26 시리즈 흥행으로 판매량 자체는 선방했으나 급등한 메모리 가격이 수익성을 압박했다는 분석이다. 업계에서는 AI 인프라 투자 확대가 이어지는 동안 메모리칩 가격 강세 역시 지속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최근 글로벌 경기 둔화와 소비 심리 위축 속에서는 제품 가격 인상도 쉽지 않은 분위기다. 경쟁사인 애플 조차 아이폰 신제품 가격 동결 가능성이 거론될 정도로 소비자들의 가격 민감도는 높아진 상태다. 삼성전자가 꺼내 든 카드는 제품 믹스 개선과 신규 폼팩터 확대다. 갤럭시 S26 울트라 등 고가 모델 판매 비중을 늘리고 폴더블 제품군 확대를 통해 평균판매단가(ASP)를 끌어올리겠다는 전략이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기존 폴드·플립 시리즈를 넘어 '와이드 폴드' 형태의 신규 폼팩터까지 준비 중인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여기에 AI 스마트 글래스 등 새로운 디바이스 시장 진출 가능성도 언급된다. 특히 폴더블폰은 삼성 입장에서 단순한 혁신 제품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상대적으로 높은 판매 가격을 형성할 수 있는 데다 원가 구조 측면에서도 일반 바형 스마트폰 대비 수익성 방어에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시장 환경은 녹록지 않다. 삼성이 사실상 독주하던 폴더블폰 시장에는 애플 진입 가능성이 본격 거론되고 있다. 여기에 화웨이·모토로라·구글 등 중국 및 글로벌 업체들까지 경쟁에 뛰어들면서 시장 주도권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는 분위기다. 결국 삼성전자가 넘어야 할 과제는 단순히 스마트폰 판매량 확대가 아니다. AI 시대 들어 급변한 원가 구조 속에서 하드웨어 중심 사업 모델만으로 수익성을 방어할 수 있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해야 하는 시점에 가까워지고 있다. 결국 칩플레이션 시대에 삼성전자가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신제품이 아니라, 원가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을 새로운 사업 구조일 것이다. /차현정기자 hyeon@metroseoul.co.kr

2026-05-06 14:46:54 차현정 기자
[기자수첩]차세대 배터리 전쟁의 시간, 우리에겐 얼마나 남았나

지난달 21일, 중국 베이징. CATL이 '수퍼 테크데이' 행사장에서 꺼내 든 숫자는 우리 배터리 업계를 얼어붙게 했다. 10%에서 80%까지 단 3분 44초. 완충에 가까운 98%까지도 6분 27초. 영하 30도 혹한에서도 10분 안에 충전이 끝난다. 거기에 반고체 수준의 신형 배터리를 탑재한 세단은 한 번 충전으로 최대 1500km를 달릴 수 있다. "한마디로 공포였습니다" 국내 배터리 업계 한 전문가가 솔직하게 털어놓은 말이다. 기술 격차만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도 한중간의 격차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숫자는 냉정하다. 올해 1~2월 중국을 제외한 미국·유럽 등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 국내 배터리 3사의 점유율은 28.3%로 전년 동기 37.1%보다 8.8%포인트 하락했다. 반면 같은 기간 CATL과 BYD의 합산 점유율은 36.7%에서 44.2%로 7.5%포인트 상승했다. 판이 기울었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이미 판 자체가 엎어졌다. 뒤집어진 판에서 한국업체들이 꺼내 든 반격 카드는 전고체 배터리다. 삼성SDI는 최근 인터배터리 전시회에서 전고체 브랜드 '솔리드스택'을 공개하고 내년 하반기 휴머노이드 로봇용 소형 전고체 배터리 양산을 목표로 제시했다. 그러나 전고체가 시장 주도권을 바꾸려면 얼마나 걸릴까. 업계 안팎의 답은 한결같다. 지금부터 최소 10년 이상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양산 자체도 이제 막 시작 단계인데 초기에는 가격이 너무 높아 일부 프리미엄 모델과 로봇에나 쓰일 것이다.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는 건 미·중 갈등이다. 미국과 유럽이 중국 배터리를 밀어내면서 한국 기업이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지정학이 기술 격차를 메워주진 않는다. 외부 환경에 기댄 생존 전략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배터리는 반도체와 함께 한국 제조업의 마지막 보루다. 그 보루가 흔들리고 있는데 산업 현장에서는 정작 정부 손길이 닿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높다. 연구개발 세액공제 확대, 핵심 광물 공급망 확보, 차세대 배터리 국가 R&D 로드맵 수립 등 말은 무성했지만 속도가 없다. 기업이 뛰는 동안 정부는 제자리걸음이다. 중국이 국가 자본과 정책을 총동원해 배터리 생태계를 키우는 동안, 우리 기업들은 홀로 버텨왔다. 그 한계가 지금 점유율 숫자로 나타나고 있다. 기업 하나의 기술력으로 국가 대 국가의 싸움에 이길 수는 없다. 시간이 부족하다. 국가가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원관희기자 wkh@metroseoul.co.kr

2026-05-05 12:55:17 원관희 기자
[기자수첩] 프라다를 입은 악마에게 묻는 조직윤리

지난 2006년 개봉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속편,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가 공개된다. 20년 전 영화지만 대중은 여전히 편집장 '미란다'의 카리스마와 비서 '앤디'의 화려한 변신을 추억한다. 유명 패션잡지 런웨이를 배경으로 치열한 커리어의 세계를 그린 이야기 속에서 정작 오늘날 관객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또 다른 비서 '에밀리'의 얼굴이다. 에밀리는 파리 패션위크를 목표로 버티고 있지만 패션에는 관심 없다던 굴러들어온 돌 앤디가 그 기회를 빠르게 차지한다. 에밀리는 '나는 내 일을 사랑해'라고 외치며 조직의 가치관을 내면화하는 데 비해 앤디는 조직을 수단으로 여긴다. 결국 앤디는 런웨이를 떠나며 미란다 비서 출신이라는 명성을 활용해 원하는 곳으로 도약한다. 이때 영화 제목은 현실의 문장으로 다시 읽힌다. 악마'가' 프라다를 입는다. 영화 밖 실제 상황도 종종 그렇게 흘러간다. 앤디의 서사가 영리한 이직 성공 사례가 된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에밀리들은 대체 가능한 소모품으로 격하되곤 한다. 앤디는 파리 출장을 가로챈 미안함을 명품 옷 몇 벌로 표현하고 에밀리의 입꼬리가 씰룩이는 장면이 연출된다. 에밀리가 원하는 것은 물질보다 자신이 쏟은 열정에 대한 인정과 성취였을 테지만, 노력과 결과가 어긋난 순간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사회 역시 본질적인 갈등을 소모품적 보상으로 봉합하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5월에는 각종 기념일이 있어 연휴가 이어지는 동시에, 휴무를 가능하게 하는 필수 근로 또한 뒷받침되고 있다. 이러한 노동의 비대칭성이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경제 선순환을 위해 누군가는 일해야 하며 남들이 쉴 때 두 배로 뛰어아 하는 직군도 존재한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현장 사수는 기회를 쫓아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된 앤디들이 아니라 자기 자리에 뿌리 내린 에밀리들의 몫이라는 점이다. 문제는 존중 결핍이다. 조직이 효율성에 중점을 두는 것은 숙명이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에 대한 예의를 놓치고 있지는 않는가 다시금 짚어본다. 떠난 앤디와 남은 에밀리는 모두 K직장인의 단면이다. 프라다 뒤로 보이지 않는 근로의 소외를 정당화하지 않는 것이 20년 만에 다시 만날 악마들에게 요구해야 할 최소한의 조직 윤리다.

2026-04-29 13:53:17 이청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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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산업이 계급을 가르는 시대

한 명품관 직원이 허름한 점퍼 차림의 손님을 무시한다. 그러나 점퍼 안쪽에서 SK하이닉스 로고가 드러나자 태도는 곧바로 바뀐다. "하이닉스느님?" 쿠팡플레이 'SNL코리아'의 한 장면이 화제다. SK하이닉스 직원이 하나의 밈처럼 소비되는 것은 단순히 성과급이 역대급으로 예상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SK하이닉스 로고가 더 이상 회사명이 아니라 보상의 크기를 짐작하게 하는 상징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같은 직장인이라도 어느 산업, 어느 회사에 들어갔느냐에 따라 삶의 수준, 이른바 '급'이 달라지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업이 성과를 낸 만큼 임직원에게 보상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그 격차가 개인의 노력 차이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인공지능 수요와 반도체 호황은 일부 산업에 막대한 보상을 몰아주고 있다. 반대로 다른 산업의 노동자는 비슷한 시간을 일해도 그만한 상승을 기대하기 어렵다. 청년들에게 취업은 더 이상 직무 선택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산업의 호황에 올라타느냐가 커리어의 출발선을 가르는 문제가 됐다. 개발자든 사무직이든, 직무가 같아도 반도체·AI처럼 돈이 몰리는 산업에 있느냐에 따라 보상과 평판은 달라진다. '하이닉스느님'이라는 농담이 마냥 가볍게 들리지 않는 이유다. 직무보다 산업, 노력보다 시장의 파도가 개인의 몸값을 먼저 결정하는 사회의 단면이기 때문이다. 격차를 모두 없앨 수는 없다. 없애는 것이 정답도 아니다. 그러나 격차를 줄일 기회가 줄어드는 것은 다른 문제다. 산업 간 이동이 어려워지고, 재교육의 기회가 부족하고, 중간 수준의 일자리가 약해지면 격차는 곧 계급이 된다. 격차가 커질수록 개인의 노력만으로 그 차이를 따라잡기 어렵고, 산업의 흥망이 개인의 삶까지 과도하게 좌우하는 구조로 굳어지기 쉽다. 성과는 정당하게 보상받아야 한다. 다만 산업의 호황이 일부에게만 계층 이동의 기회로 작동하고, 그 밖의 일자리에서는 삶의 전망이 희미해지는 구조는 경계해야 한다. 직무 전환 교육과 산업 이동 지원, 중간소득 일자리 보호가 더 촘촘해져야 하는 이유다. SNL의 장면이 던진 질문은 가볍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개인의 노력으로 올라갈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성과급보다 더 크게 봐야 할 것은 한 기업의 호황이 아니라, '산업의 격차가 개인의 미래를 어디까지 갈라놓고 있는가'이다.

2026-04-28 14:33:02 이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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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현대차, 차이나드림 '분골쇄신' 해야…故 정주영 회장 '적당히는 없다'

글로벌 자동차 산업 변화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특히 세계 자동차 시장의 흐름은 전기차 출시 전후로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전기차는 전기모빌리티·자율주행 등과 결합해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세계 최대 자동차 전시회인 '오토차이나'는 전기차 시대의 글로벌 지형을 확인할 수 있는 한편,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현주소를 진단할 수 있다. 지난 24일 개막한 오토차이나는 말 그대로 전동화와 자율주행 기술의 가파른 성장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우리 나라 대표 기업인 현대차·기아가 중국 시장에서 고전하는 이유도 명확했다. 단순히 과거 사드 사태로 인한 판매량 감소로 판단하면 큰 오산이다. 10년전과 비교하면 지리자동차그룹, BYD, 상하이자동차, 체리자동차, 샤오미 등 중국 현지 자동차 기업들이 보유한 기술 수준은 눈에 띄게 성장했다. 베이징 현장에서 만난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내연기관 시절에는 독일차 일본, 한국 순으로 중국 브랜드보다 높은 기술력을 선보였다"면서 "전기차 시대에 현대차는 중국 브랜드보다 낮게 평가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현대차·기아가 중국 시장에 전기차를 출시한다고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성공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실제 중국 기업의 성장은 무서울 정도다. BYD는 글로벌 전기차 1위 업체로 성장했으며 지리자동차를 비롯해 자율주행 업체들은 로보택시 기술을 도입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현대차는 이번 오토차이나에서 정주영 창업회장의 정신을 강조하며 아이오닉 브랜드 런칭과 아이오닉 V로 중국 시장 공략을 선언했지만 중국 기업을 넘어서는 전략과 기술은 보이지 않았다. 중국 자동차 기업들이 BMW와 아우디, 롤스로이스, 페라리, 람보르기니 출신의 유명 디자이너를 영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현대차의 '디자인 차별화' 전략이 통할지 의문이다. 현대차가 2018년 평창에서 선보인 자율주행차를 체험할 당시만해도 글로벌 모빌리티 시장을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있었지만 8년이 지난 현재도 그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현대차가 다시 한번 차이나드림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분골쇄신의 자세로 미비점을 전면 재점검해야 한다. 고 정주영 창업회장이 강조한 '적당히라는 그물 속에서 오직 운만을 바라는 인간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을 되새겨야 할때다.

2026-04-27 16:23:10 양성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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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반도체 초격차의 역설…변수는 ‘사람’

삼성전자 노조의 총파업 예고를 둘러싼 시선은 생산 차질과 공급망 영향에 쏠려 있다. 그러나 사안을 단순히 '라인 가동' 문제로만 보는 접근은 부족하다. 첨단 산업일수록 인력 변수가 더 크게 작동하는 역설이 뚜렷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갈등의 출발점은 성과급 체계다. 회사는 초과이익성과급(OPI) 상한을 유지한 채 특별 포상 등 추가 보상안을 제시했다. 반면 노조는 일회성 보상이 아닌 제도 개편을 요구하며 맞서고 있다. 쟁점은 지급 규모보다 보상 방식과 기준에 대한 신뢰에 가깝다. 갈등은 반도체 경쟁의 축 변화를 드러낸다. 과거 산업을 지배한 것은 설비와 공정이었다. 더 미세한 공정과 더 많은 생산능력이 경쟁력을 좌우했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사람의 개입은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도 뒤따랐다. 하지만 AI 반도체 경쟁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차세대 공정은 설계·공정·패키징이 동시에 맞물리는 구조다. 특정 엔지니어의 숙련도와 조직의 협업 수준이 수율과 성능, 납기 대응까지 좌우한다. 같은 설비를 갖추고도 결과가 갈리는 이유다. 경쟁이 심화될수록 인력 변수의 영향력도 커진다. 설비는 투자로 확보할 수 있지만, 공정을 안정적으로 운용하고 성과로 연결할 조직과 인력은 단기간에 확보하기 어렵다. 인력 확보와 유지, 조직 운영 방식이 곧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삼성전자의 사업 구조는 갈등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메모리와 파운드리, 시스템반도체를 동시에 운영하는 체계에서 사업부 간 실적 편차는 불가피하다. 격차는 보상 기준을 둘러싼 갈등으로 이어지고, 성과급 논쟁은 특정 사업부를 중심으로 확산되며 조직 내부 균열로 번지고 있다. 유사한 흐름은 업계 전반에서도 감지된다.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핵심 인력 확보와 유지에 공격적으로 나서는 배경이다. 설비 투자 경쟁과 함께 인재 경쟁도 동시에 격화되고 있다. 결국 반도체 산업은 또 다른 전환점에 서 있다. 공정은 최첨단으로 진화하고 있지만, 불확실성은 인력과 조직에서 확대되고 있다. 삼성전자가 갈등을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기술 경쟁력의 방향도 달라질 수 있다. AI 시대 반도체 경쟁의 변수는 더 이상 공정만이 아니다.

2026-04-26 16:42:39 구남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