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기업 노리는 탐욕의 약탈자...기업도 방패 있어야
외환위기는 국내 자본시장을 완전히 바꿔놨다. 민족자본은 사라지고 외국자본 유치가 지상과제로 자리 잡았다. 덕분에 만신창이가 된 채로 막대한 공적자금의 수혈을 받은 제일은행(뉴브리지캐피탈), 외환은행(론스타) 등은 외국자본에 팔려 나갔다. 삼성자동차(르노), 대우자동차(GM), 대우상용차(타타그룹), 만도기계(JP모건) 등도 외국계에 넘어갔다. 삼성과 같은 대기업도 벌처펀드(투기펀드)에 휘둘리며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적잖은 투기자본은 수 년 만에 몇 배의 투자수익을 올리고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한국 시장을 유유히 떠났다. 오랜 학습효과에도 불구하고 국내 기업들이 행동주의 펀드와 같은 외국 자본의 손쉬운 먹잇감이 된 것은 투기자본에 맞설 수 있는 제도적인 경영권 방어 장치가 취약하기 때문이란 분석이 많다. ◆ 행동주의로 포장된 '탐욕의 약탈자' 한국 자본시장에서 투기 자본과 행동주의 펀드는 '탐욕의 약탈자' 그 자체다. 이 같은 별칭답게 몇몇 투기자본은 경영권을 위협할 정도로 지분을 끌어모은 뒤 분쟁을 일으키고, 기회가 되면 막대한 차익을 남기고 미련 없이 떠나는 속성 때문이다. 타이거펀드, 소버린자산운용, 헤르메스, 아이칸, 론스타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 99년 미국계인 타이거펀드는 SK텔레콤 지분 6.6%를 취득한 후 경영진 교체 등을 요구하다 SK 계열사에 보유 지분을 전량 매각해 6300억원의 시세차익을 남기고 발을 뺐다. 2003년 4월 영국계 펀드인 소버린자산운용은 SK㈜ 지분 14.99%를 매입해 2대 주주에 올랐다. 당시 소버린 측은 SK그룹에 대한 경영참여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는 것. 소버린자산운용은 이후 2년 3개월 동안 경영투명성 제고 등을 내세워 SK그룹을 상대로 최태원 회장 퇴진 등 경영진 교체 및 기업지배구조 개선, 계열사 청산 등을 요구했다. 1조원 가까이 투입해 방어전에 나선 SK를 소버린이 차지하진 못했다. 하지만 소버린은 지분 14.99%를 주당 5만2700원에 팔아 7559억원을 챙겼다. 배당금과 환율 변동 등에 따른 차익까지 감안하면 1조원 안팎이다. 뉴브리지캐피탈은 1999년 말 제일은행 지분 48.56%를 5000억원에 산 뒤 지난 2005년 영국계 스탠다드차타드은행(SCB)에 매각해 1조1800억원의 차익을 거뒀으나 조세회피지역인 말레이시아 라부안을 통해 거래하면서 세금을 내지 않았다. 론스타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삼척동자도 다 알 정도다. 외환은행을 헐값에 인수한 뒤 큰 차익을 남기면서 되팔아 '먹튀' 논란을 일으킨 론스타 욕심은 현재도 끝나지 않았다. 론스타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매각 절차 지연으로 손해를 봤다며 5조여원을 요구하는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해 심리가 끝나고, 판정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의 먹튀 과정은 복잡하면서도 단순하다. '헐값 인수→다이어트(구조조정)→실적 호전→고가 매각'이란 수법이 그중 하나다. 극동건설, 만도 등이 대표적이다. 또 '주식 다량 매집→경영권 간섭·적대적 M&A 위협→경영권 분쟁→주가 상승→막대한 차익실현 후 철수'란 절차도 곧잘 쓴다. 재계 한 관계자는 "표면적으로는 주주가치 제고와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이지만 결국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목적이라 볼 수 있다"면서 "기업의 발전방향을 공유하기 보다는 대체로 배당, 자사주매입 등을 요구하기 때문에 장기적 기업의 성장동력을 헤친다"며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들 펀드의 수익률이 이를 말해 준다. 증권가에 따르면 행동주의 펀드의 평균 수익률은 8%(2016년 한 해 기준)에 이른다. 최근 10년동안 글로벌 헤지펀드의 수익률이 1%대 낮은 수익률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과 대조된다. 펀드 수도 5년전에 비해 5배가 급증한 400여개 달하며 자산규모도 1300억달러로 덩치가 커졌다. 한국 대표기업인 삼성만 당한 것도 아니다. 2013년 8월 칼 아이칸. 트위터를 통해 저평가돼 있는 애플의 지분을 대량 매입했으며 CEO 팀 쿡에게 1500달러 규모의 자사주 매입을 요구했다고 발표한다. 아이칸의 보유 지분은 약 1%에 못 미쳤음에도 이 날 애플의 주가는 4.8% 상승했다. 또한 2014년 1월에는 애플의 주가가 여전히 "저렴하다"며 5억달러 규모의 지분을 추가 매입하였고 공개적인 자사주 매입요구를 지속했다. 결국 4월 애플은 전 해에 발표한 600억 달러 규모의 자사주 매입 규모를 900억 달러 규모로 늘렸다. 2016년 4월 아이칸은 애플과 중국간 관계를 이유로 애플 지분 전량을 매각했다. ◆ 자본시장 발전은 '투자민주화', 기업에게도 방패를 전문가들은 주주행동주의가 투자민주화 프레임 아래서 진행되는 변화로 해석한다. 장화탁 DB금융투자 리서치센터장은 '대한민국 격동의 시대:주주행동주의 확산'이란 보고서에 "최근 주주행동주의는 단기차익을 극대화하는 형태에서 탈피해 장기적인 기업가치 극대화쪽으로 진화하고있다. 혁신(innovation)은 강제규율이 아니라 자율규제 하에서 달성할 수 있는데, 주주행동주의는 기업지배구조 부분에서 시장의 주요한 자율규제 역할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부의 재분배 측면에서도 주주 행동주의가 강조된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은 '한국 자본주의(Capitalism in Korea)'라는 책에서 한국 자본주의가 고장났다고 진단했다. 추세적으로 기업소득이 증가한 반면, 가계소득이 줄어든 부분이 먹고 살기 힘든 국민들의 생계형 가계부채 문제와 연결됐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주주행동주의가 한국의 가계부채나 부의 편중 문제를 해결하는 해법은 아니다. 하지만 사내유보라는 형식으로 지나친 현금(소득)이 넘치는 기업과 소득(현금)이 부족해 빚을 지닌 가계의 불균형을 잡아주는 하나의 단초는 될 수 있다는 시각이 많다. 재계 한 관계자는 "한국의 경우 소유와 경영이 집중됐다는 특징 때문에 이 과정에서 기업지배구조(corporate governance)문제가 핵심으로 부각할 수밖에 없다. 지금껏 한국의 기업지배구조개편은 정부주도, 경기위기시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주주행동주의가 확산된 향후의 기업지배구조개편은 민간주도, 상시 기업가치 향상의 일환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기업들에도 방패를 쥐여 줘야 한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소유 분산을 권장하고 소액주주의 권한을 단계적으로 강화해 왔지만, 신주인수선택권(포이즌필·기존 주주에게 시가보다 싼 가격에 지분을 매입할 수 있는 권리 부여)이나 차등의결권(일부 주식에 많은 수의 의결권을 부여해 주주 지배권을 강화하는 것), 황금주(특정한 주총 안건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주식) 등 선진국이 보유한 경영권 방어 장치들이 취약한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