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침체에 환율·물가 불안…고심커지는 한은
"한국은행의 첫번째 의무는 물가안정, 두번째는 금융안정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1일 기준금리를 연 3.5%로 동결한 뒤 이 같이 말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말 5%에서 올해 4%대로 낮아졌다. 물가흐름이 전환한 상태에서 얼어붙은 경기와 금융에 부담을 줄 이유가 없어 동결을 택했다는 분석이다. 다만, 현재 물가의 기조적인 흐름을 보여주는 근원물가는 여전히 상승세가 꺾이지 않고, 지난 2월 1200원대로 하락한 원·달러 환율은 1300원을 훌쩍 넘어선 상태다. 금리를 인상할 경우 경기에 부담이 될 수 있고, 금리를 동결할 경우 환율과 물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한국은행의 고심이 깊어질 전망이다. ◆문제는 근원물가 23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3월 근원물가는 1년전보다 4.0%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월과 동일한 수준이다.근원물가는 계절적 요인이나 일시적 충격으로 가격 변동성이 큰 농산물과 석유류 품목을 제외한 것으로 물가의 기조적 흐름을 파악하는 지표다. 근원물가 상승률이 꺾이지 않는 이유는 외식물가(7.5%)를 포함한 개인서비스 물가가 1년전과 비교해 5.8% 올랐기 때문이다. 개인서비스는 다른 물가 품목과 달리 지속가능성이 높다. 한번 오르면 잘 내려가지 않고, 높은 가격수준이 오래간다는 의미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근원물가가 높다는 것은 여전히 물가상승 압력이 상당하다는 것"이라며 한국은행의 금리인상 필요성이 여전하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美, 근원물가에 금리인상 고려 미국도 근원물가가 문제다. 미국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둔화하고 있지만, 근원물가가 꺾이지 않고 있다. 지난 3월소비자물가지수는 1년전과 비교해 5.0%올라 전달(6.0%)보다 큰 폭으로 낮아졌다. 반면 근원물가 상승률은 같은 기간 5.6%올라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웃돌았다. 시장에서는 내달 3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금리를 인상할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달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으로 인한 유동성 우려가 잦아든 것도 한 몫했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의 패드워치에 따르면 내달 3일 연준이 금리를 0.25% 인상할 수 있다는 의견에 89.1%가 몰렸다. 현재 미국의 기준금리는 4.75~5.00%이다. 다만 금리인상 가능성이 높아지며 지난 2월 1220원대로 하락했던 원·달러 환율은 지난 21일 기준 1328.2원까지 올랐다. ◆韓 경기바닥조차 확인못해…환율·물가 불안 이에 따라 한국은행의 고심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현 상황에서 기준금리를 올리면 경기에 타격이 불가피하고, 금리동결을 이어갈 경우 환율과 물가가 뛸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선행지수는 2월 98.1로 전월비 0.2포인트 하락했다. 2021년 6월 102.4로 고점을 찍은 후 1년 8개월째 내리 하락세다. 주요 20개국(G20)의 경우 선행지수가 지난 2021년 6월 101.5로 코로나19 이후 최고점을 찍은 뒤 1년 7개월째 하락하다 2월 하락세가 멈췄다. 주요국은 경기 바닥을 다지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바닥조차 확인하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특히 OECD의 선행지수는 관측시점에서 6~9개월 뒤의 실물경기 흐름을 예측하는 지표로 활용된다. 이 상황에서 금리인상을 단행할 경우 경기 반등의 모멘텀이 지속적으로 약화하며,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금리동결을 이어나가기도 불안한 상황이다. 금리를 동결할 경우 한미간 금리격차가 벌어지며 외국인자본이 유출돼 원화약세로 작용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의 기준금리는 3.5%로 미국 연준이 내달 기준금리를 4.75~5.00%에서 5.00~5.25%로 0.25%올리면 금리격차는 상단기준 1.75%포인트(p)까지 벌어진다. 한미간 기준금리 격차가 가장 많이 벌어졌을 때는 2020년 5~9월 1.50%p이고, 1%p이상이던 때는 2006년 5~7월 두차례다. 2000년 5∼9월은 미국 경제가 IT 버블 붕괴로 침체국면에 진입하기 직전이었고, 2006년 5∼7월 역시 미 서브프라임 사태 초기였다. 현재 미국이 심각한 경기침체 국면에 진입할 가능성은 낮아 두 차례와는 다를 수 있다. 또 원화 약세가 이어질 경우 수입물가가 오르면서 물가를 더 자극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원유 등 원자재 등을 전량 수입하기 때문에 환율이 오르면 원화표시 원자재, 중간재 가격이 상승해 이를 사용해 생산하는 제품의 가격이 상승 압력을 받을 수 있다. 안예하 키움증권 연구원 "물가 불확실성이 높지만, 최근 높아진 금융 불안과 경기 하강 우려 등을 감안할 때 수요 부진에 따른 물가 하락 기조는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며 "하반기 들어서는 낮아진 물가 속 경기 하강과 금융 불안 등으로 시선이 옮겨지면서, 한은도 이에 주목해 기준금리를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나유리기자 yul115@metr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