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그림자 '석유화학, 이차전지, 철강'…SK·롯데 등 '전전긍긍'
"물타기를 해볼까 싶었는데, 신용등급까지 떨어질 수 있다니 손이 안 나간다." "주가는 다시 오를지도 모르지만, 신용등급은 한 번 내려가면 다시 올라가는 건 힘들어 보이더라." 요즘 증권가 투자자들 사이에서 크레딧 리스크가 새삼 화두다. 석유화학, 2차전지 업종처럼 낙폭이 큰 종목은 저점 매수 유인이 있어 보이지만, 신용등급 하향 경고가 이어지며 '싼 게 비지떡'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신용등급이 떨어지면 회사채 발행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는 금융투자업계 중론처럼, 숫자 하나로 자금조달 여건이 뒤바뀌는 현실에서 투자자들뿐 아니라 운용사, 금융기관 모두 긴장하는 모습이다. 신용등급 하락은 단순한 수치 조정이 아니다. 기업 경영의 중추를 흔드는 구조적 리스크의 일종의 '신호탄'처럼 여겨진다. 특히 한국신용평가가 최근 발간한 '2025 KIS Industry Outlook'에서 '비우호적'으로 분류된 석유화학, 건설, 유통, 2차전지, 증권, 캐피탈, 저축은행, 부동산신탁 8개 업종은, 신용도 전망까지 '부정적'이 겹쳐 '다중 리스크'에 직면해 있다. ◆"이자 늘고, 환차손 터지고"…신용등급 하락 부르는 복합 리스크 기업들의 조달 여건을 결정짓는 신용등급이 각종 복합 리스크에 흔들리고 있다. 환율과 금리는 여전히 높은 수준에서 기업의 비용 구조를 압박하고, 대외 통상 정책 변화와 규제 강화 같은 '정책 리스크'는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있다. 특히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국내 산업 구조에서 원·달러 환율의 상승은 기업 수익성에 직격탄이 된다. 2020년 4월 1224원이던 환율은 2024년 4월 1441원까지 급등했고, 원재료 수입 비중이 높은 제조업체들은 환차손과 원가 상승에 동시에 직면했다. 최근 환율은 대만달러와의 동조 움직임 속 1370~1400원대를 오가며 급등락 중이다. 환율이 단기 급등락을 반복할 경우 수익 예측이 어려워지면서 투자·조달 계획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미중 무역협상 결과에 따라 원화 약세 흐름이 재차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기준금리는 0.5%에서 2.75%로 상승했고, 중소기업 대출금리는 2020년 3.55%에서 현재 5.33%까지 올라 이자비용 부담이 크게 늘었다. 동시에 은행권의 여신심사 기준도 엄격해졌다. BB등급 이하 기업 대출은 위험가중자산(RWA) 150%로 반영돼 은행의 건전성을 해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 결과 4대 은행의 고정이하여신 잔액은 전년보다 33% 급증했고, 기업 연체율도 줄줄이 상승세다. 금융권은 6월 중 신용평가 모델을 재점검하고 대출 심사 기준을 조정할 예정이다. 기업 신용을 짓누르는 복합 리스크에는 고금리, 고환율 외에도 대외 통상 정책 변화와 규제 강화 등 '정책 리스크'도 포함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관세 정책이다. 트럼프 2기 정부 출범 가능성이 현실화되면서 한국 수출 기업에 대한 관세 부담이 확대되고 있다.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내 세액공제 축소 가능성은 국내 2차전지 업계의 수익성을 직접 압박하며, NICE신용평가는 세액공제 제외 시 셀 3사의 영업이익이 1조원 넘게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AMPC 보조금에 의존하던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은 신용도 하향 압력에 놓여 있다. 신용등급이 투기등급으로 하락할 경우 자금 조달 자체가 막힐 수 있다. 국내 신용평가사 기준 BBB-까지가 투자등급이며, 그 이하인 BB+부터는 투기등급으로 분류된다. 무보증 회사채 발행은 거의 불가능해지고, 유상증자나 브릿지론 등 고비용 조달로 밀릴 수밖에 없다. IB업계 관계자는 "기업에 따라선 신용등급 하나로 수천억 원의 조달 여건이 바뀌기도 한다"며 "기관투자자의 자산 편입 기준도 달라져 사실상 시장에서 퇴출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조달 구조의 변화는 기업 신용등급 하락이 단순한 수치 변화에 그치지 않고, 실제 생존 문제로 이어질 수 있음을 방증한다. ◆'비우호 산업' 덫에 갇힌 그룹들…신용등급 줄하락 현실화에 '초비상' 구조적 리스크는 산업을 넘어 그룹 단위로 확산되고 있다. 대표 사례가 롯데다. 롯데그룹은 지난해 부동산 자산 재평가를 통해 롯데쇼핑·호텔롯데 등 주요 계열사의 부채비율을 낮췄지만, 이는 현금 유입 없는 장부상 변화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전체 차입금은 40조원 이상으로 확대됐고, EBITDA 대비 순차입금 비율은 7.7배에 달했다. 서민호 한국신용평가 수석애널리스트는 "자산재평가만으로는 신용 하락 압력을 상쇄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롯데케미칼은 이미 3년 연속 적자를 기록 중이며, 신용등급 하향 기준도 충족한 상태다. 석유화학 산업은 공급과잉과 수요 부진의 이중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S&P는 "중국과 중동발 공급과잉이 향후 2년간 해소되기 어렵다"며 "한국 석유화학 업계는 수익성과 레버리지 모두에서 하방 리스크가 크다"고 진단했다. 국내 업체의 가동률은 2018년 90%대에서 2023년 50% 아래로 추락했고, LG화학, SK지오센트릭, 한화토탈에너지는 잇따라 신용등급이 하향됐다. 2차전지 업계 역시 수요 둔화와 과잉 설비 부담, 미국 통상정책 불확실성에 동시에 노출돼 있다. AMPC 보조금이 축소될 경우 LG에너지솔루션, SK온 등의 이익은 1조원 이상 줄어든다는 분석도 나왔다. SK온은 IPO 일정이 지연되고 있고, SK이노베이션의 순차입금 중 65%가 SK온에 집중돼 있어 그룹 차원의 신용도 하락 리스크로 번질 수 있다. NICE신용평가는 "AMPC 제외 시 신용도 하향 압력이 불가피하다"고 평가했다. 철강 산업은 글로벌 수요 위축과 공급 과잉,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압력 가능성 등 삼중 리스크에 노출돼 있다. S&P는 "이번 하락 국면은 단기적 반등으로는 벗어나기 어려운 구조적 사이클"이라고 경고했다. 미국발 수요 차질과 보호무역 강화는 수출 비중이 높은 국내 철강업계에 직접적인 악재로 작용한다. ◆신용보다 빠른 주가의 경고…6월 정기평가 촉각 신용등급은 실적과 재무구조, 사업 전망 등을 종합해 일정 시점에 평가되는 후행 지표다. 반면 주가는 불확실성과 투자심리를 선반영하는 선행 지표다. 업계에서는 "고정비 부담이 큰 제조업이나 업황에 민감한 금융업종은 실적이 꺾이기 무섭게 주가가 먼저 반응한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NICE신용평가는 최근 세미나에서 "15% 이상 주가가 하락한 기업 중 다수가 아직 등급 조정에 이르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 신용도보다 시장이 더 빠르게 위험을 반영하고 있다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오는 6월 말 예정된 정기 신용등급 리뷰에서 구조적 리스크가 본격 반영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2차전지·석유화학·저축은행 등 이중 리스크 산업군은 개별 기업을 넘어 산업 차원에서 등급 하향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신용등급 변화는 단순한 기업 평가를 넘어 산업 구조 재편의 신호탄으로 해석되고 있다. 일부 조선, 방산 업종처럼 '긍정적' 전망을 받은 업종도 있지만 이는 예외적 사례다. NICE신평은 조선·방산 산업이 수주 확대와 실적 개선으로 신용도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지만, 전반적인 흐름은 신용도 하향 기조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