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었던 한반도, 봄이 찾아오다
"우리가 미사일 발사하면 문재인 대통령이 새벽에 NSC 개최하느라 고생 많으셨다. 오늘 결심했으니 이제 더는 문 대통령이 새벽잠 설치지 않아도 된다."(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5일 평양 조선노동당 본관 진달래관에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등과 만찬을 하면서 전한 이야기) "거 봐라. (북한과)대화하는 것이 잘한 것이다. 여기(워싱턴)까지 온 김에 한국 대표들이 오늘 논의 내용을 백악관에서 직접 발표해달라."(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9일 백악관에서 정의용 안보실장 등 일행과 대화하면서 펜스 부통령 등 주변에 있는 참모진에게 한 말) 꽁꽁 얼어붙었던 한반도에 봄이 빠르게 찾아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4월 말께 판문점에서 만나 남북정상회담을 열기로 했고, 김정은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5월에 북미정상회담을 개최키로 했다. 봄이 한창 무르익는 4~5월에 한반도 비핵화를 향한 큰 발걸음을 남한과 북한, 그리고 미국이 내딛는 것이다. 우리측이 곧 접촉하게 될 중국, 일본, 러시아도 여기에 힘을 보탤 전망이다. 취임 이후 줄곧 '한반도 비핵화'를 강조해 온 문 대통령은 집권 2년째에 접어들면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을 적극 활용해 당사자인 북한뿐만 아니라 '주변 4강'을 모두 아우르며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획기적 전환기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운전대를 잡은 문 대통령 옆에 김정은 위원장이 앉고 뒷좌석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자리잡은 모양새다. 11일 청와대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지난 9일 강원도 평창에서 열린 동계패럴림픽 개회식 사전 리셉션 환영사를 통해 "평창 동계올림픽이 '평화올림픽'으로 성공한 것은 대한민국에 너무나 큰 선물이 됐다"면서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는 현실이 돼 가고 있다. 평창에서 열린 올림픽과 패럴림픽, 또 평화를 위한 우리의 노력이 새로운 세계평화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북한의 핵 실험과 미사일 도발에 멀게만 느껴졌던 남과 북이 가까워지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지난 5일부터 1박2일간 평양을 다녀온 정의용 실장을 수석특사로 한 대북특사단은 '4월 말 남북정상회담'이라는 큰 선물을 들고 왔다. 김 위원장은 "문 대통령이 더 이상 새벽잠을 설치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앞으로 미사일 발사나 핵실험을 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평양에서 만난 김 위원장에 대해 특사단이 평가한 말을 종합하면 '리더십'과 '배려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김 위원장은 조선노동당 본관에서 특사단을 만난 직후 대표인 정 실장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이해한다"는 말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할 때는 정 실장이 다가가기전에 김 위원장이 직접 일어나 테이블 가운데로 나와 받기도 했다. 특사원이 하루밤 묵은 고봉산 호텔에 대해선 "자기들은(평창올림픽때 남측을 방문한 북측대표단을 말함) 남쪽에서 대접 잘 받고 돌아와놓고 소홀해서야 되겠느냐"면서 "백화원 초대소가 공사중이라 이용하지 못해 양해바란다"고 친근하게 말하기도 했다고 청와대가 밝혔다. '북한의 영빈관'으로 불리는 백화원 초대소는 외국의 주요 국빈급 사절이 방문할 때 이용된다. 이번 남측 특사단을 국빈급으로 대우하면서도 그에 맞는 숙소를 불가피하게 제공하지 못해 김 위원장이 직접 미안함을 표한 것이다. 특히 김 위원장은 정 실장 일행에게 "이제는 실무적 대화가 막히고, (북측 실무자들이)안하무인격으로 나오면 (문재인)대통령하고 나하고 직통전화로 이야기하면 간단히 해결된다"며 호탕하게 웃은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 남북은 긴밀한 협의를 위해 정상간 '핫 라인'(Hot Line)을 설치하기로 뜻을 모았다. 첫 통화는 4월 말 예정된 남북정상회담에 앞서 실시하기로 했다. 이런 가운데 문 대통령은 임종석 비서실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를 꾸려 만반의 준비를 할 것을 지시했다. 준비위는 과거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절 꾸렸던 경험을 토대로 통일부 등 관련 부처가 폭넓게 참여할 것으로 알려졌다. 5월에 만날 가능성이 높은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간 북미정상회담의 장소는 남측 제주도와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 그리고 중립국인 스위스 등이 거론되고 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판문점이 유력한 대안이 되지 않겠느냐"고 전했다.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과 북한간 소통은 기존에 알려진 '뉴욕채널' 외에도 여러 채널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 만큼 장소와 주요 의제 등 실무 논의는 이들 채널을 활용하되 사안에 따라 우리쪽과도 긴밀한 협의가 이어질 전망이다. 2박3일 일정으로 워싱턴을 방문한 정 실장과 서훈 국정원장 일행이 북미간 정상회담 수락 등 트럼프 대통령과의 면담 내용에 대해 지난 9일(한국시간) 백악관에서 직접 공식 발표한 것을 놓고도 북한에 대한 미국측의 바뀐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는 평가다. 이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정 실장 일행과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등 백악관 참모진 20여 명이 백악관 내에서 대화하는 시간을 15분 가량 앞당겨 우리측 일행을 만나는 파격을 선보였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정 실장 등으로부터 북한을 다녀온 내용에 대한 브리핑을 듣고는 주변의 참모들을 향해 "거 봐라"라는 말을 하며 정 실장에게 "백악관에서 직접 발표해 달라"고 제안을 했다. 당시 정 실장 일행은 트럼프 대통령의 제안이 워낙 갑작스러워 문 대통령게 보고할 경황도 없이 실무협의를 한 후 사후보고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트럼프가 (북과)대화를 하려고 해도 말리는 참모가 있는 등 백악관 내에서도 서로 다른 기류가 있는 만큼 그런 참모들에게 (간접적으로)말하려고 우리측에게 직접 발표를 제안한 것으로 이해된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과의 대화에 대해 10일(현지시간) "엄청난 성공을 거둘 것이다. 북한이 아주 잘 해나가리라 본다"고 말했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한편 이날 오후 늦게 귀국한 정 실장, 서훈 원장은 문 대통령에게 방미 결과 등을 설명한 후 정 실장은 12일부터 1박2일 일정으로 중국을, 서 원장 역시 같은 기간 일본을 각각 방문한다. 정 실장은 12일 오후 시진핑 주석을, 서 원장은 13일 아베 총리를 각각 접견한다. 정 실장은 중국 일정을 마친 후 곧바로 러시아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