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섬유산업의 개척자 故 이동찬 명예회장
기업은 국가경제의 주요한 주체이며 사회발전의 원천이고, 직장인의 생활터전입니다. 따라서 후손에게 풍요로운 정신적 물질적 유산을 남겨 놓아야 한다는 것은 기업가의 사명입니다' 기업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 사람의 소중함과 그에 대한 책임을 담은 이 명료한 어록은 향년 92세로 타계한 고 이동찬 명예회장이 1987년 중앙대에서 대학생을 대상으로 강연했던 내용의 일부다. 짧은 내용이지만 그의 행동하는 삶과 노력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 산업화와 근대화의 격변의 시기를 거치며, 우리나라 화섬 산업의 최선두에서 국민 의(衣)생활의 혁명을 일으키며 국가 경제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 온 코오롱. 그 뿌리에는 부국을 위해 청춘을 쏟아 부은 그의 삶이 있었다. '이상은 높게' 설정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등산식 경영과 '눈은 아래를' 바라보며 임직원을 비롯한 사회의 문제들을 따듯한 보살핌으로 살피는 공동체적 책임경영이 그의 경영철학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한국섬유산업을 개척하며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이끈 1세대 기업인 우정(牛汀) 이동찬 명예회장은 1922년 4월1일 경북 영일군에서 이원만 창업주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호방한 성격의 창업주 이원만 선대회장(전 기업인, 전 국회의원)이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기에, 이동찬 명예회장은 고향에서 넉넉치 않은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런 가운데도 소학교를 수석 졸업한 이 명예회장은 어린 나이에 포항에 있는 일본인 상점의 점원으로 사회에 첫 출발을 내디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일(渡日) 하라는 부친의 편지를 받고 일본으로 떠나 당시 부친이 설립한 '아사히공예사'에서 열다섯 살의 나이로 경리를 맡아 아버지를 돕기 시작했다. 낮에는 일터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흥국상업학교' 야간부에 들어가 주경야독의 생활을 했다. 이후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어느덧 청년이 되었지만 학구열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와세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하던 조선인 교수의 권유로 시험을 준비해 이후 와세다 대학의 정치경제학부에 합격했다. 입학한 후에도 평소의 취미와 소질을 살려 정구, 축구, 기마 등의 스포츠는 물론 영어회화부, 변론부, 정치학회인 동아협회 같은 학내 동아리에 참여하며 대학시절을 보냈다. 1944년 1월13일 스물 세살때 입영 1주일을 앞두고, 신덕진 여사를 아내로 맞았다. 결혼한지 1주일째인 1월20일, 쯔루가의 중부 36연대에 조선학도특별지원병으로 입대해 식민지 청년으로서 감내해야 했던 울분과 고난을 겪으며 조국해방과 부국의 꿈을 키우던 중 조국은 해방을 맞았다. 광복 후 귀국한 청년 이동찬은 한국전쟁의 여파로 국민의 기초생활마저 위협받던 때, 헐벗은 국민에게 따뜻한 옷을 입게해 사회봉사와 애국을 실천하겠다는 신념아래 경북기업이라는 직물공장을 설립하며 이 땅에 섬유산업의 횃불을 처음 들어올렸다. 이동찬 명예회장은 더 큰 사업에 뜻을 품고 경북기업을 정리한 후 상경하여 단칸 사무실에 삼경물산 서울사무소와 후일 코오롱상사의 모태가 되는 개명상사를 1954년에 설립해 한국과 일본의 무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나일론의 개화기를 앞당겨 나갔다. 1957년 4월12일 부친 이원만 선대회장과 함께 '한국나이롱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나일론사를 생산하며 한국 섬유산업의 기수로 등장해 한국 섬유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당시는 나일론사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품귀현상까지 빚었던 시기로 한국나이롱은 1963년 국내 최초로 일산 2.5톤 규모의 나일론사 준공을 시작으로 1967년 공장을 증설, 10톤 공장으로 도약했다. 한국의 섬유산업을 개척하며 증흥의 밑거름을 마련한 것이다. 나일론사의 수요확대에 따라 1968년 판매전담회사로 코오롱상사를 창립, 이동찬 사장이 초대 사장에 취임했다. 당시 사장 취임사를 통해 밝힌 이 명예회장의 경영지침은 향후 코오롱그룹의 반세기 역사 속에 뿌리 깊게 전해져 오고 있다. 이동찬 사장은 기업의 건강한 이윤추구를 통해 소비자를 보호하고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약속'과 내적인 충실도를 높여 확고한 기반 위에서 회사를 육성, 발전시켜나가겠다는 '안정을 바탕으로 한 발전'을 선언했다. 이어 폴리에스터사의 제조에도 착수해 1968년 한국폴리에스텔 등을 설립했고, 1970년 한국나이롱 사장에 취임하면서 원숙한 경영인으로의 길을 걷는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국내 나일론섬유업계의 호황기인 동시에 화섬업계가 크게 도약한 시기였다. 설립 20주년이 되던 1977년 코오롱그룹은 그룹의 종합적인 발전과 경영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그룹 회장제를 신설하고 이동찬 대표이사 사장을 코오롱그룹의 회장으로 추대했다. 코오롱그룹의 최고경영자가 되기까지에는 열다섯 살의 나이로 부친인 이원만 선대회장을 도왔던 때로부터 기산하면 실로 40년 만의 일이자, 경북기업의 설립으로 사업가로의 길을 걷기 시작한 때로부터 셈해도 30년이란 오랜 세월이 걸린 셈이었다. 이 명예회장은 취임 후 신년사를 통해 경영다각화의 성공적인 출발을 기뻐하며 기업의 생명과 같은 경쟁력의 제고를 강조했다. 회장 취임해인 1977년, 한국나이롱과 한국포리에스텔을 주식회사 코오롱으로 변경했고, 급변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아 제조업에 첨단 경영을 도입, 새로운 도약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 나일론사 공급이 수요를 앞지르자 한국나이롱은 사업다양화와 제품다양화를 모색하며 타이어코드 등 신제품 개발에 주력했다. 격동의 1980년대에 들어서는 '변신'이라는 모토아래 기존의 섬유산업은 양적, 질적 성장을 함께 도모하면서 필름, 비디오테이프, 메디컬 등 관련 사업 분야로 사업영역을 확대해 사업다각화에 성공하며 오늘날 코오롱그룹을 국내 유수의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또 1983년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에 취임, 섬유인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섬유백서'를 발간하는 등 한국 섬유산업의 선진화에 힘썼다. 1990년대에 들어서 21세기형 산업의 총아로 떠오른 정보통신산업으로 진출을 추진해 그룹내 정보통신회사를 설립했다. 또 다른 신성장 산업의 하나인 유통업에도 적극 진출해 코오롱그룹을 21세기 신경제의 주체로 자리잡을 수 있는 확고한 교두보를 마련해 놓았다. 이원만 선대회장의 뒤를 이어 제2대 그룹회장에 오른 이 명예회장은 재임기간 동안 그룹 총수로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코오롱을 명실상부한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기업은 내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것 "산업인의 사명에 투철하고 능률과 창의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는 보람찬 일터를 만들며 인간 생활의 풍요와 인류 문명의 발전에 이바지한다" 이 명예회장의 경영이념은 한국 경제의 성장과 맥락을 함께 해온 지난 반세기 코오롱의 역사속에 묻어있다. 광복 후 일본에서 귀국한 청년 이동찬은 경제인으로서 입신을 모색하게 되는데, 이는 반드시 몸을 바쳐 애국하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라, 피폐한 조국의 경제를 일으켜 세우고 헐벗은 국민에게 따뜻한 옷을 입게 해주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큰 애국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은 이 명예회장의 경영이념에도 반영돼 고도 산업사회를 건설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빈곤으로부터 해방돼 얻어 낸 자랑스러운 유산을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것이 모든 산업인의 고귀한 사명이자, 역사적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기업은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임직원 모두의 사회생활의 터전이며 원천인 사회의 기업으로, 기업의 부실은 사회에 대한 배신이며 배임이라고 봤다. 이동찬 명예회장의 사회적, 공동체적 책임의식에 입각한 기업 경영이념으로 코오롱은 국가 경제 성장을 선도하며 맥을 같이 할 수 있었고, 60년의 역사를 간직한 기업으로 현재도 인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기업으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이동찬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이자 등산을 통해 터득한 이 교훈은 정상에 대한 목표를 세우고 겸허한 마음으로 한발 한발 오르다 보면 어느덧 정상에 서게 되고, 호연지기를 만끽하게 된다는 이 명예회장의 경험에서 배어 나온 것이다. 무리하게 스피드를 내거나 성급한 경영을 지양하고 그룹 전체가 서서히 산을 오르고 있다는 등산할 때의 마음가짐으로 그룹을 이끌어왔다. 특히 무리를 지어 등산을 할 때 뒤에서 따라 갈 때는 힘들고 짜증스럽지만 앞장서서 산을 오를 때는 뒷사람을 인도한다는 사명감과 보람으로 고된 줄 모른다는 교훈을 기업경영과 결부시켜 회사 임직원들에게 자주 들려주었다. 이 명예회장에게 등산은 인생의 지혜와 슬기를 터득케 했던 스승이며, 동시에 그 스스로 임직원이 직접 산을 오르며 교훈을 얻어가길 바라는 등산 예찬론자이기도 하다. 청렴결백한 기업인으로서 '기업은 내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것'이라는 소신으로 산을 오르듯, 마라톤을 하듯 같은 보폭으로 사업 보국을 위해 힘써온 이 명예 회장 같은 기업인이 있었기에 코오롱은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주요업적 및 대외활동 이 명예회장은 49년간의 기업 활동 중 화려한 수상경력이 입증하듯 대내외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1982년 기업인 최고의 영예인 '금탑산업훈장'을 받았으며 같은 해 체육훈장 '백마장'을 수장했다. 1984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나일론을 도입한 공로와 '산업발전을 통한 사회봉사'를 기업사명으로 하여 새로운 산업분야를 꾸준히 개척하여 발전시켜온 공로로 '한국의 경영자상(한국능률협회)'을 수상했다. 그리고 중앙대 '명예경제학 박사학위(1988)'를 받은데 이어 고대 최고경영자교우회의 '최고경영자대상(1988)'도 수상했다. 또 1992년 개인에게 수여되는 국내 최고의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장했다. 국가발전에 지대한 공로가 있는 자에게 수여되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은 개인에게 수여되는 국내 최고의 훈장으로 기업인으로서는 이 명예회장이 처음이었다. 이는 기업 경영인으로서 지난 40여 년 간 성실하게 우리나라 경제발전을 선도해 온 것에 대해 인정받은 것이며, 1982년부터 10여 년 간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을 맡으며 노사문제 안정화에 기여해 왔음은 물론, 1989년 경제단체협의회 회장으로서 산업평화 정착에 이바지하여 사회적인 책임을 다한 것에 대해서도 인정을 받은 것이다. 특히 1982년 숨 가쁘게 돌아가는 우리나라의 경제 환경 속에 누구도 맡기를 꺼려할 정도로 어려운 자리였던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높은 수출장벽과 노사분규로 대두한 심각한 위기 상황 타개를 위해 임기 2년의 경총회장 자리를 무려 14년간이나 맡으면서 바람직한 노사관계 진입을 위해 노력했다. 대내외적인 어려운 환경의 변화를 극복하고 노사 양측에 서서 각각의 입장을 이해하고 반영하기 위해 몸소 뛴 노력으로 이 명예회장은 취임 초기의 포부대로 산업평화 정착에 많은 기여를 했다. 경총회장으로 이 명예회장은 지난 1989년 경제 5단체가 참여하는 경제단체협의회 창설을 주도해 한국 경제의 최대 걸림돌이던 노사문제를 풀어가는 데 주역으로 활동했다. 1990년에는 노사와 공익대표가 참석하는 국민경제사회협의회를 발족시켰다. 기업주와 근로자가 첨예하게 대립했던 1993년에는 경총회장으로서 한국노총과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 한국 노사관계의 새 장을 열었다. 노사분규가 심했던 1993년, 이 명예회장은 당시의 상황을 경영자, 근로자, 정부 3자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보고 기업을 이끄는 4가지 핵심요소로 자금, 근로자, 시설, 경영자를 꼽았다. 특히 근로자는 이들 4가지 요소의 핵심이며 기업의 기둥임을 강조했다. 이동찬 명예회장은 기업주와 근로자가 상호 대등한 위치에서 대화와 타협으로 분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런 노력의 결과로 한국노총과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 한국 노사관계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4년에는 산업평화 선언을 통해 노사협력의 시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는 이동찬 명예회장의 기업주와 근로자는 상호 공생 공영하는 공동 운명체라는 인식의 바탕위에서 이루어진 일련의 활동이며, 이는 코오롱그룹의 경영이념에도 반영되어 보람의 일터 운동을 탄생시켰다. 보람의 일터 운동은 기업주와 근로자의 공생공영 정신에 기반을 둔 것으로 신명나게 일하는 일터 만들기를 목표로 ▲참여의 보람 ▲성취의 보람 ▲대가의 보람을 이룩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근로자는 정당한 임금을 받되 일 자체에서 성취의 보람을 느끼고, 이룩한 결과에 따른 승진과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경영자와 종업원이 다 함께 노력하자는 것이었다. 이 정신은 후대 이웅열 현 코오롱그룹 회장의 경영방침에도 이어져, 산업계 전반의 변화로 말미암아 노사갈등이 극심했던 화섬업계에서 2007년 항구적 무분규를 골자로 하는 노사상생동행을 선언, 강성노조로 경쟁력을 잃어가던 화섬업계에 노사 상생 기류를 확산시키고 기업의 실적도 크게 개선해 코오롱의 미래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밖에 이동찬 명예회장은 통일문제와 관련, 민간단체인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임원으로 조국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특히 170여개의 지역협의회 구성에 앞장서 통일과 관련된 사업에 있어 많은 지원을 했다. 이 명예회장은 기업가로서뿐 아니라 공인이자 더불어 사는 이웃이 되기 위해 사회공헌활동도 적극적으로 해왔다. 1974년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한 이래 1975년 대한농구협회 부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등으로 각종 단체에서 활약했다. 1980년에는 대한농구협회 회장에 취임한데 이어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으로서 스포츠를 통한 외교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또 대한골프협회 회장을 맡아 '골프백서'를 발간하는 등 골프 대중화사업에 힘씀으로써 오늘날 한국선수들의 세계 골프대회 재패를 위한 토양을 마련했다. 한국 마라톤의 열성적인 후원자로 널리 알려진 이 명예회장은 비인기종목이던 마라톤과 육상의 중흥을 위해 1985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전국 남녀고교 구간마라톤대회'를 주최해 마라톤 선수의 저변확대와 인재의 조기 발굴 육성을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코오롱마라톤 팀을 창단해 우수한 선수들을 육성하고, 한국마라톤 기록 갱신을 위한 활력소의 일환으로 기록 갱신자에 대해 연구장려비를 지급한다는 일련의 내용을 발표해 마라톤 선수들을 격려했다. '손기정 선수 이후 맥이 끊겼던 국내 마라톤 선수의 올림픽 금메달 획득'이라는 이동찬 회장의 바람은 청년기 마라톤 기록갱신으로 1억 원의 연구장려비를 받은 황영조 선수의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제패(1992)를 통해 현실화됐다. 1992년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은 이동찬 명예회장은 1993년에는 21세기 경영인클럽의 '신산업경영대상', 1994년 한국경영학회의 '한국경영자대상'을 받아 대외적으로 탁월한 경영인으로서 위상을 인정받았다. 이 명예회장은 2002 한일 월드컵 초대 조직위원장을 역임하며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와 축구 전용경기장 확충 등에 많은 기여를 했다. 한편 이웃과 더불어 번영하는 것을 기업인의 소명이라고 믿으며 '더불어 사는 우리사회' 만들기에 노력해온 이 명예회장은 기업경영활동을 마감한 후 코오롱그룹 오운문화재단의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살맛나는 세상'캠페인 사업을 하는 등 사회봉사 활동에 힘썼다. 산간벽지 학교에 학습기자재 보내기 운동을 벌였다. "어려운 이웃에게 용기와 자활의 기회가 되고, 지역 주민들에게도 편안한 쉼터가 되기를 바란다"며 1992년에는 12억원 상당의 강북구 길음동에 길음사회복지관을 건립해 기증하고, 2003년 사회복지법인 운가자비원에 27억원 상당의 수유종합사회복지관을 건립해 기증했다. 1995년에는 충북 괴산에 청소년 수련마을인 보람원을 개원해 한국 청소년 교육의 새장을 열었다. 또 살맛나는 세상 캠페인의 일환으로 사회의 선행·미담사례를 발굴해 널리 알리기 위해 그의 호를 딴 '우정선행상(牛汀善行賞)'을 제정해 2001년부터 매년 4월 시상식을 통해 선행을 격려해 왔다. ◆구구익선(舊舊益善), 오래 될수록 좋은 것이 있다 이동찬 명예회장의 슬리퍼는 1947년부터 신었으니 50년이 넘었다. 버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 낡았지만 슬리퍼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오랜 세월과 알뜰한 애정이 빚어낸 정겨운 멋이 있다. 10여년전 비서실에서 그 슬리퍼를 버리고 새 것으로 바꿨다가 이 명예회장에게 멀쩡한 것을 왜 버리느냐고 된통 야단을 맞고 쓰레기통을 뒤져 간신히 찾아냈다는 일화도 있다. 이 명예회장의 점심메뉴는 주로 된장찌개, 칼국수, 수제비 등이다. 다른 반찬이 남은 상태에서 추가반찬을 시키는 일은 없다. 삼복더위에도 부채와 선풍기만 있으면 된다. 10년 넘게 입어온 맨스타 트렌치 코트, 출장시 수행비서들과의 동숙, 등산이나 낚시 갈 때에는 9인승 승합차 이용 및 도시락 지참, 그룹 임직원들에게 옷 물려주기.. IMF 이후 달라진 생활 모습이 아니라 아낄 때와 쓸 때를 구분하자는 이 명예회장의 평소 생활철학이다. 은혜를 갚는 일이나 신의를 지키는 일엔 알뜰함이란 있을 수 없다. 꼭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만 쓴다. 그래서 이 명예회장은 장학사업, 마라톤 꿈나무 육성 등에 꾸준한 지원을 해오고 있다.